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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다 아름다운-15화 (15/140)

00015  헤밀 편 - 긴 겨울  =========================================================================

하지만 다른 여자 관객들은 로빈이 가슴을 꿈틀거리는 장면마다 까르르 웃어대며 즐거워했다. 그녀들은 자기들끼리 속닥거려가며 열정적으로 주인공을 응원했다.

“저런 남자를 두고는 황제한테라도 못 가죠.”

“그런데 아이넨에 저런 배우가 다 있었나요?”

“티는 안 나도 얼마쯤은 다른 왕국의 피가 섞인 게 아니겠어요?”

“우리 왕국이 배경인데 그런 거라면 좀 슬프네요.”

“피를 따져서 뭐해요? 중요한 건 이 안에 있는 마음이죠.”

부인이 지그시 가슴 앞에 손을 모으자, 그녀의 일행인 듯한 여자가 '중요한 건 가슴이 아니고요?'하고 호호 웃었다.

과연 그녀들이 응원하는 것이 가련한 여자 주인공을 향해 오랫동안 순애보를 간직해온 남자 주인공에 대한 것인지, 그 남자 주인공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의 몸인지 헷갈렸다. 어쩐지 요즘 극장 앞에 부녀자들의 모습이 부쩍 늘더니, 요즘에는 여성들 취향의 연극이 많이 늘고 있는 듯했다.

아드리아나는 민망함에 옆좌석의 노아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는 로빈이 황제의 부하들과 싸우는 장면을 보느라 눈도 깜박이지 않고 있었다.

“하하하.”

그는 연극이 무척 마음에 드는 듯, 그 역시 이따금 크게 웃기도 하며 즐거워했다.

“황제가 정말 나쁜 놈이네요.”

막이 바뀌는 동안, 그가 작게 속삭였다.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아드리아나는 노아의 말에도 동조했지만, 실은 이야기를 보는 동안에 황제보다 바이올렛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하겠다는 것인지, 사랑하는 사람이 같이 도망치자고 하는데 왜 같이 가지 않는지, 원수인 황제와 몸을 섞고 살 수 있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자신이 리노아스에서 겪었던 일을 떠올렸다. 자신도 평판이 좋지 않은 높은 신분의 남자에게 끌려가서 결혼하게 될 뻔했었다. 그때 만약 버클리가 같이 도망치자고 해주었다면, 자신은 망설임 없이 그의 손을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버클리는 연극 속의 로빈처럼 연인에게 목숨을 걸고 사랑하고 아끼는 남자가 아니었다. 관계를 거부하자 그날은 더 이상 웃어주지도 않았었다. 애초에 그가 아드리아나를 위해 스콰이어 가와 싸우겠다고 나서는 모습 따위는 상상도 되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라도 버클리와 헤어지게 되어서 잘 된 일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다행이라고 생각할 거야. 만약 그 사람과 결혼이라도 했다면, 난 그가 어떤 사람인지 뒤늦게 깨달았어도 헤어지지도 못했을 테니까.’

어느덧 다시 막이 올랐다.

잔잔하게 울리는 첼로의 선율과 함께 어둠이 걷혔다. 뿌연 조명이 달빛을 그렸다. 은은하게 빛나는 반달 아래에, 연인이 마주 안고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가만히 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다가, 저도 모르게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들려오는 곡을 알고 있었다. 무대 위에 걸린 달의 이름과 똑같은 그 곡의 제목을, 자신은 알고 있었다.

버클리가 알려준 그 곡을 하루에도 몇 번씩 들으며 그를 생각했었다. 아드리아나는 자신에게 처음으로 도시에서 상연하는 ‘연극’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유행하는 곡이라며 레코드를 가져다주었던 그를 온종일 생각했었다.

‘앗.’

무의식중에 물어뜯고 있던 손톱과 피부 틈에서 피가 조금 배어나왔다. 아드리아나는 놀라서 얼른 입에서 손을 뺐다. 그러고는 그 손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뺨에 댔다가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가 하며 안절부절못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영원한 줄 알았던 시간은 겨우 2달밖에 이어지지 않고 끝나버렸다. 그 짧은 시간의 일이 이렇게 인생을 바꿔버렸다. 도대체 언제가 되면 버클리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건지, 어떻게 하면 그의 기억에서 벗어나 다 나을 수 있게 되는 건지 알고 싶었다.

*

“와, 전 울 뻔했어요.”

극장을 나오며 노아가 말했다. 하지만 촉촉해진 눈가를 꾹꾹 누르는 모양새가 울 ‘뻔’에 그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오드리 양은 어땠어요? 괜찮았어요?”

“네. 뒷부분이 재미있었어요. 마지막에 행복하게 끝나서 다행이에요.”

아드리아나도 빨개진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구체적으로 어느 장면에서 울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뭘 보고 있는지도 모를 그 순간부터 우울해졌던 까닭이었다.

“요새는 해피엔딩이 인기가 없어서 찾아보기 어렵죠. 오랜만에 주인공들이 잘되고 끝났네요.”

“슬프게 끝나는 내용이라면 전 못 볼 것 같아요.”

“전 아무거나 다 잘 보기는 하지만요.”

아닌 게 아니라, 노아는 허무맹랑한 장면에서조차 웃거나 훌쩍이기도 하면서 상연 내내 연극을 몰입해서 보았다. 그는 웬만한 이야기는 다 재미있게 본다고 했다. 책, 음악, 연극 가리지 않고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에 잘 감명 받는 성격이라는 것이었다.

“미네타에게 연극 재미있었다고 말해줘야겠네요. 근데 나중에 제게 극장에 데려와 주겠다고 한 친구가 있는데... 그 애한테 왠지 미안해요.”

“음. 그럼 오늘 온 건 비밀로 하죠. 오드리 양이 그 친구랑 여기 온 뒤에 미네타 선생님에게도 알려 드리면 되지 않을까요?”

그 친구랑 여기 온 뒤라니, 웬디가 자라서 연극을 보여주기를 기다리려면 몇 년을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아드리아나는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미네타의 자전거를 맡겼던 가게로 들어가자, 자전거에 실려 있는 짐을 본 노아가 깜짝 놀라며 보호소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나섰다.

“웬 짐이 이렇게 많아요? 올라가실 거면 모셔다 드릴게요. 잠깐만 기다려요.”

그는 주차해뒀던 자가용을 가져와서 트렁크에다 아드리아나의 자전거를 실었다. 그리고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아드리아나는 쭈뼛쭈뼛 차 안으로 몸을 실었다.

“전 자동차를 처음 타 봐요.”

왠지 자동차 안이 낯설지만은 않은 듯한 착각이 일었지만, 자신은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마을에 살고 있었고 늘 마차밖에 타본 기억이 없었다. 노아가 시동을 거는 동안, 아드리아나는 신기한 자동차 내부를 흘끔거리고 차창 밖을 쳐다보다가 지나가는 부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과 마주쳤다. 그만 얼굴이 붉어졌다.

“슈하스에도 자동차가 슬슬 늘어나는 추세죠. 저도 올해 장만한 겁니다. 변호사 일을 하기 전에는 자전거를 탔었는데, 마을 밖으로의 이동이 잦아지니 어쩔 수 없이 자동차 운전을 배웠어요. 전 지금도 자전거가 더 좋지만요.”

노아가 핸들을 크게 돌려서 차를 유턴시키며 말했다. 아드리아나는 그 모습이 신기해서 쳐다보고 있다가, 조금 들뜬 투로 대답했다.

“저도 자전거를 타는 게 좋아요. 하지만 자동차도 좋아 보이네요.”

“짐이 많을 때랑 멀리 다닐 때는 편하긴 하죠.”

“뚜껑이 있어서 날씨가 안 좋을 때도 좋을 것 같아요. 마차처럼요.”

아드리아나가 말하자, 노아가 눈썹을 까닥 치켜세우며 웃었다.

“마차를 자주 타셨나요?”

“아….”

슈하스에서는 마차가 거의 짐을 옮기는 용도로만 사용되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걸어 다니거나 자전거를 탔다. 그리고 극소수에 해당하는 부유층의 사람들은 자동차를 가지고 있었다. 마차를 타는 것은 도로가 더 활성화된 도시의 사람들이거나, 아예 지방 영지에 사는 귀족들 정도였다.

하지만 아드리아나는 자신이 귀족 가의 영애라는 것을 알릴 수 없었다.

“아, 예전에 친척 집에서….”

아드리아나는 서툴게 거짓말을 했다. 미네타에게서 ‘코니스에서 온 사촌’ 행세를 해야 한다는 주의를 단단히 듣고 있는 참이었다.

“와, 오드리 양은 슈하스 분이 아니시군요?”

노아가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아드리아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네, 하고 넘겼다. 다행히 그는 출신이나 사적인 것에 대해 꼬치꼬치 묻지 않았다.

“참, 잠깐 남작님 댁에 들러서 서류 하나만 전해주고 갈게요.”

“네.”

자동차가 하겔 남작의 성이 있는 고지대로 향했다. 지나다니며 올려다보기만 하던, 아드리아나의 아버지의 것과 비슷하게 생긴 성이었다.

자전거로는 꽤 걸릴 듯 보였던 성이 금세 그들 앞으로 가까워졌다.

노아는 미리 약속을 해두었던 듯, 내리자마자 성 앞에 있는 관리인에게 서류를 맡기며 뭔가를 설명했다.

아드리아나는 차 안에서 기다리며, 밖을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노아처럼 가죽 가방을 든 양복 차림의 남자들이 수시로 성을 출입하고 있었다. 아드리아나의 아버지인 클로제 남작과 달리, 슈하스의 남작은 사람들을 아주 많이 만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후원금을 절반이나 세금으로 거둬가는 사람이라고 했어.’

그런 생각을 하며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있다가, 맞은편 앞의 차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그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노아의 것보다 더 커다란 흰색 차였다.

거기서 한 남자가 뒷좌석 문을 열고 내렸다. 그는 발걸음을 옮기기 전에, 자신의 옷깃 틈으로 살짝 손을 넣어 까만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그리고 가볍게 고개를 돌린 순간에 드러난 그의 옆얼굴을 보고, 아드리아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남자는 물론 아드리아나를 보지 못했다. 이윽고 정신이 든 아드리아나가 멍한 얼굴로 슬그머니 차창에서 손을 내렸다. 그리고 차 그림자 안으로 몸을 숨기려 운전석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소리가 귀에 들려올 정도로 커지기기 시작했다.

그 남자를 만나본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하지만 살짝 엿보이는 그 옆모습만으로도 아드리아나는 그임을 확신했다.

그 꿰뚫어보는 듯한 냉소적인 시선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얼린이야…. 그가 틀림없어.’

“왜 그래요?”

어느새 금방 차로 돌아온 노아가 운전석 문을 닫으며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드리아나는 운전석 쪽으로 기울이고 있던 자세를 똑바로 했다. 얼린은 큰 걸음으로 성 안으로 향하고 있었으니 지금쯤이면 벌써 멀어져 있을 터였다.

‘그는 나를 알아볼 거야.’

============================ 작품 후기 ============================

이쪽에도 코멘이 생겼네요ㅜㅜ 고맙습니다. 중반까지 남주가 안 나와서 침침하다보니 쓰는 저도 축축 쳐지는데 힘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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