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4 헤밀 편 - 긴 겨울 =========================================================================
그날 저녁, 미네타가 까만 나무껍질이 가득 담긴 봉투를 꺼내서 방으로 돌아왔다.
“머리카락 색을 한 번 바꿔볼래?”
그것은 마을의 아가씨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염색 재료였다.
“오드리는 머리카락이 엄청 밝아서 아마 갈색 정도밖에 안 될 거야. 이거, 작년에 아가씨들 사이에서 까만 머리카락이 유행한 덕분에 엄청 팔렸거든. 염색된 색이 마음에 안 들면 금방 빠지게 할 수도 있으니까, 한 번 해볼래?”
아드리아나가 코니스인인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백금발은 아이넨의 시골 마을에서는 너무 눈에 띄었다. 아드리아나는 고민하지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네타는 물이 가득 담긴 냄비에 나무껍질을 넣고 팔팔 끓인 다음 부채를 불어가며 식혔다. 물은 거의 까만색에 가까운 흑갈색을 띠었다. 뜨겁지 않을 정도로 물이 식자, 미네타가 거기에 녹말가루를 풀어 넣고 저었다.
“여기다 머리를 감고 한참 있다가 헹구면 돼. 여러 번 감으면 색이 더 짙어져. 피부에 묻은 건 잘 지워지는데 옷에 물든 건 빼기 어려우니까 홀딱 벗고 하는 걸 추천할게.”
그러고는 안경을 들썩거리며 눈썹을 능글맞게 움직였다.
아드리아나는 얼굴을 붉히며 눈을 한번 흘겨준 후, 냄비를 들고 욕실로 갔다.
걸쭉해져 있는 액체를 대야에 붓고, 쪼그리고 앉아서 머리카락을 담갔다. 골고루 색이 잘 배도록 머리카락에 정성껏 물을 먹이고, 긴 머리카락 다발을 높게 말아 올린 다음, 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수건으로 감싸놓고 옷을 입었다.
방으로 돌아오자, 먼저 침대에서 여유부리고 있던 미네타가 돌아보았다.
“잘했어? 힘들지는 않았어?”
“머리카락이 까맣게 보였어요.”
“헹구면 많이 밝아질 거야.”
“그런가요?”
“염색하는 거 처음이야? 다른 지방에서도 유행하는 것 같던데.”
“음,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요. 하지만 전 안 해본 게 많아서요.”
배시시 웃으며 말하자, 미네타가 자못 다정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다 해본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어.”
미네타의 말이 의아해서, 아드리아나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난 오드리가 지금의 오드리인 게 좋아. 결핍이 있으면 있는 대로 말이야. 이기적인 말인지는 몰라도.”
“제가 지금 어떤데요?”
웃으며 가볍게 묻자, 미네타가 옆으로 돌아누워서 팔로 머리를 받치며 눈을 지그시 떴다.
“다르지. 아이넨의 일반적인 17세 도시 영애들과 비교하자면 말이야. 매일 같이 사치스러운 파티에서 친구들과 술을 퍼붓는다든지, 거기서 예쁜 옷 자랑하고 고상 떨면서 애인들 물건 평가하는 이야기로 열을 올린다든지…. 오드리가 그런 데에 끼어있다고 상상하면 난 아주 서운해져. 아무튼 내가 본 5명 중 4명은 그랬거든.”
그녀의 말에, 아드리아나가 눈을 더욱 크게 떴다.
“물건이라니, 우리같이 젊은 나이에도 애인들의 재산을 두고 경쟁한다는 말인가요?”
이번에는 미네타가 놀란 눈을 했다.
“…그래, 아무튼 뭐 재산의 일부지. 나 오드리랑 얘기하고 있으니까 왠지 로레인 수녀님이랑 얘기할 때보다 커다란 억압감이 느껴지네.”
“아…. 제가 너무 보수적인 말을 했나 봐요.”
아드리아나가 겸연쩍게 웃었다. 하기야 자신이 로레인을 만나봤을 때만 해도, 그녀가 성직자임에도 불구하고 속세의 습성에 조금쯤은 너그러움을 보여주는 관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게다가 아직 우물 안 개구리인 자신이 사람들의 ‘재산’ 욕심에 대해 함부로 말한 건 경솔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미네타랑 로레인 수녀님이 앞으로도 제게 많은 걸 가르쳐주시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창피해서 물어보기가 어려울 것 같거든요.”
수줍게 말하자, 미네타가 들으라는 듯 크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여길 뜨기 전에 오드리를 현대인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구먼. 일단 가서 머리 한번 감아 보고 와.”
아드리아나는 얼른 배우겠다고 웃어 보이고서 욕실로 달려갔다. 늦지 않게 머리를 헹구고 말려야 제시간에 잘 수 있을 터였다.
***
어느덧 9월이 반 이상 지났다.
헤밀에서는 때 아닌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지만, 보호소에도 아드리아나 자신에게도 걱정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은 채 평화로운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오랜만에 시내로 심부름 겸 구경을 하러 나왔다. 수업이 없는 토요일이었고 마침 다른 일들도 한가했다.
이제는 혼자서도 곧잘 바깥을 돌아다녔다. 지리에는 완전히 익숙해져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혼자서 슈하스 시내 한쪽 길을 달렸다.
아드리아나를 찾는 전단은 한참 전에 떼어지고 없었다. 상연이 끝난 연극의 포스터들을 벽에서 떼어 내서 둘둘 말아가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이 떼어간 것인지, 아드리아나를 찾는 사람이 포기한 것인지는 몰랐다. 연유야 무엇이었든지 간에 아드리아나의 초상화는 더 이상 길거리에 붙어 있지 않았고, 이제 다시 자유롭게 헤밀과 슈하스를 지나다닐 수 있었다.
아직은 낯선 사람들이나 가문의 사람들과 닮은 모습이 보이면 경계심이 들었지만, 생활에 익숙해져가며 그런 불안감도 옅어지고 있었다.
“어머나 어머나! 이건 나의 찰스가 주연이라는데?”
아가씨들이 포스터 앞에 몰려들어 꺅꺅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새로 붙어 있는 포스터에는 잘생긴 남자 배우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요즘 어떤 연극들이 상연되고 내려지고 있는지 전부 알고 있었다. 나올 때마다 포스터들을 구경하기 때문이었다.
‘또 새로 하는 게 있나….’
포스터들을 들여다보며 서성이고 있던 때였다.
아드리아나는 문득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한순간 오싹해져서 몸을 움츠리며 옆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활짝 웃는 상냥한 미소가 자신을 향했다.
“저기, 혹시 미네타 선생님 댁의….”
“아…. 휴스턴 씨?”
그는 보호소에 방문했던 변호사 노아 휴스턴이었다. 연극을 보러 온 듯 손에는 티켓 한 장을 들고 있었다.
“어…, 그러니까….”
노아의 입술은 제대로 된 인사를 하지 못하고 거기서 멈췄다.
아드리아나는 곧, 경황이 없던 첫 만남에서 그에게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아, 저는 오드리예요.”
새로운 이름으로 직접 자신을 소개해보는 건 처음이어서 조금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노아의 얼굴에 다시 밝은 미소가 돌아왔다.
“오드리 양이었군요. 잘 지내셨습니까? 못 알아볼 뻔했어요. 머리 모양을 완전히 바꾸셨네요.”
“아, 네. 더워서 잘랐어요.”
아드리아나는 한 달 전에 머리카락을 짙은 갈색으로 염색했고, 얼마 전에는 풍성한 머리카락이 답답하게 느껴져서 어깨 위 길이까지 과감하게 잘라버렸다. 아깝지는 않았다. 산뜻하게 자른 편이 더위를 나는 데에도 한결 나았고, 예상대로 머리를 감고 말리기에도 훨씬 편했다.
거리에서 주변을 둘러보아도 머리카락을 짧게 다듬어서 멋을 낸 여성의 모습을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 자신도 이곳 사람들 속에 자연스럽게 섞이게 된 것 같아서 마음도 편해졌다.
이제는 설령 아버지가 나서서 자신을 찾으러 온대도 쉽게 알아보지 못할 터였다.
“그것도 미네타 선생님의 솜씨겠지요? 전에 아이들 머리를 잘라주신 걸 본 적이 있는데 미용실을 차리셔도 되겠더군요. 나중에 저도 한번 부탁드려 봐야겠네요.”
“아마 돈 대신 몸으로 갚으라고 할 거예요.”
아드리아나가 웃으며 말하자, 노아가 웃었다.
“그분이 그런 말씀도 하세요?”
“입버릇인걸요.”
“그래요?”
노아의 입가에 더욱 미소가 번졌다.
그는 출장에서 급하게 돌아오는 길이라던 지난번보다 머리 모양도 더 자연스러워 보였고, 떠들며 웃고 있으니 변호사라기보다는 갓 스무 살이 넘은 대학생쯤으로 보였다.
게다가 왠지 의외였다. 아드리아나가 전에 보았을 때, 미네타와 노아는 서로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는, 그다지 친근하지 않은 관계 같았는데, 노아는 미네타에 대해 이야기하며 아주 살가운 표정을 했다.
“오드리 양도 연극 보러 나오신 건가요?”
“아뇨, 전….”
아드리아나는 얼른, 들고 있던 연극 홍보 전단을 돌돌 말아 감추며 말끝을 흐렸다. 지금 처지에서는 연극 관람도 사치였다. 입구에 비치된 전단을 모으려고 한 장씩 가져온 것뿐이었다.
“그냥 심심해서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다가 그림들이 보여서 구경하고 있던 것뿐이에요. 배우들을 참 잘 그려놓은 것 같아서요.”
아무튼 그것도 진실이었다.
“아하. 혹시 오드리 양도 연극 보는 거 안 좋아하세요? 저 미네타 선생님한테도 퇴짜 맞은 적 있거든요.”
“그러셨어요?”
“예. 전 이것 말고 다른 취미가 없어서…. 요즘 사람들이 이게 하도 재미있다고 하기에 한번 보려고요.”
노아가 포스터 하나를 가리켰다.
잘생기고 어깨가 떡 벌어진 남자 배우가 나오는 그 연극이었다. 품에 안긴 예쁘장한 여자 배우는 남자 배우만큼 존재감 있게 그려져 있지 않았다.
“음, 그건….”
아드리아나가 지켜본 결과, 그 연극이 인기 있는 건 순전히 남자 배우를 향한 여성들의 지지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대에 부풀어 있는 듯한 노아의 얼굴을 보니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재미있을 수도 있겠네요. 직접 안 보고는 뭐라 말하기는 성급하겠죠…?”
“그럼 한번 보시겠습니까?”
노아가 눈을 빛냈다.
“같이 봐주시면 표는 제가 사드릴게요.”
거절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시간은 많았고, 리노아스에 살던 때에도 연극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어서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표를 사게 해도 되는 걸까. 남성과 단둘이 어디까지 어울려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 시내의 극장이라고는 해도.
더욱이 노아는 호감 가는 사람이었다. 외간 남자를 지나치게 가까이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 그가 호감 가기 쉬운 인물이라는 사실이 약간의 위기감을 느끼게 했다. 만약 둘이서 친밀한 시간을 보냈다가 경솔하게 마음을 빼앗겨 버리기라도 한다면…. 버클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쉽게 그를 좋아하게 되어버리는 건 아닐지 겁이 났다.
“오드리 양이 연극을 보시고 나서 혹시 마음에 들면 미네타 선생님에게도 꼭 전해 주세요. 그분은 이상한 철학을 갖고 계시거든요. 괜찮은 남자는 소설책 밖으로 안 나온다면서 배우고 뭐고 싫다고 하시더라고요. 남자 배우를 보려고 연극을 보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노아가 말했다.
아드리아나는 그가 미네타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며 다정해지는 것을 보며, 어쩌면 그가 미네타에게 호감을 가진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경계심을 조금 낮추었다.
‘나도 참 창피하게…. 만약 미네타를 좋아하는 거라면 잘 됐어.’
노아는 더 기다리지 않고 해맑은 얼굴로 돌아섰다.
“그럼 표를 한 장 더 사올게요.”
괜찮죠? 하고 표를 흔들어 보이는 그를 향해, 아드리아나는 애매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
“바이올렛, 애처로운 나의 제비꽃! 그대가 진정 나를 사랑한다면 지금 당장 이 손을 잡고 나와 함께 이 저주받을 황제의 성을 떠나겠다고 말해주오!”
“오, 로빈. 이러면 안 돼요. 그가 우릴 살려두지 않을 거예요. 난 곧 결혼할 몸이에요.”
“아아, 그런 냉정한 말은 거두어 주시오. 저 악랄한 독재자는 결코 내게서 그대를 앗아갈 수 없을 것이오! 나는 그와 싸우는 게 두렵지 않소!”
“로빈, 정녕 당신도 나를 떠나시려는 건가요? 그가 내 부모님을 살해하고 이제 당신마저 살해한다면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가야 하나요?”
“나를 믿으시오, 아름다운 여인이여. 내가 기필코 당신의 원수를 쳐부수고 말 것이니!”
그렇게 남자 배우가 위풍당당하게 솟은 자신의 가슴을 탕, 두드린 순간, 아드리아나는 저도 모르게 목을 당기며 눈썹을 꿈틀했다.
대사의 내용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까부터 그의 복장이 매우 신경 쓰여서 집중할 수 없었다. 배우들은 이야기의 배경인 옛 아이넨 왕국의 겨울 전통 복식을 입고 있었는데, 다들 목 위까지 올라오는 고풍스러운 겨울 정장차림을 한 가운데에, 유난히 남자 주인공 배우만 셔츠 앞을 거의 명치까지 활짝 열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가슴 한가운데에는 마치 곰의 무늬 같은 털이 무성하게 나 있었다. 연적인 황제를 바라보며 눈빛을 이글거리는 장면에서는, 양쪽 가슴의 근육도 화난 것처럼 실룩거렸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복부는 기름을 바른 듯 반들반들했다.
‘무, 무서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