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2 헤밀 편 - 긴 겨울 =========================================================================
아드리아나는 극장 벽 앞에 못 박힌 듯 서서 전단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적힌 자신의 초상화와 자신의 ‘진짜 이름’을.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모두가 자신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아드리아나 양을 찾음. 사례함.’
그 문장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손끝이 떨리고 식은땀이 솟기 시작했다. 한시라도 빨리 그곳을 벗어나야 했다.
“어머, 저 아가씨….”
순간 목 뒤로 쭈뼛 소름이 돋았다.
두 명의 부인이 극장을 나오면서 아드리아나와 전단을 발견한 것이었다. 부인들은 양산을 펼쳐서 햇빛을 가리고 여유로운 걸음으로 아드리아나와 웬디에게 다가왔다.
“정말이네. 머리색이랑 눈 색도 똑같고.”
좀 더 나이가 있어 보이는 부인이 그렇게 말하며, 눈웃음을 지은 채로 아드리아나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았다.
아드리아나는 당황해서 눈만 크게 뜨고 입을 벙긋거렸다.
“아냐, 안 닮았어. 우리 오드리가 훨씬 날씬해. 저 여자는 뚱뚱해.”
불쑥, 웬디가 그림을 쳐다보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그러자 부인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 화내지 마렴, 꼬마야. 물론이지. 너희 언니가 훨씬 날씬하지. 우린 그냥 너희 언니가 그림 속의 대단한 미인과 조금 닮은 것 같아서 놀려본 것뿐이야.”
“그래, 아줌마들이 부러워서 그런 거야.”
젊은 부인이 호호 웃으며 말을 이었다.
“확실히, 귀한 가문의 아가씨들은 우리 기준으로 봤을 때는 조금 지나치게 풍만하죠. 아름답기는 해도요. 높으신 분들은 미의 기준도 다르다니까요. 안 그런가요?”
그리고 아드리아나에게 동의를 구하듯 덧붙였다. 아드리아나는 굳어 있던 얼굴로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전단의 초상화는 1년 전에 그려진 것이었다. 아드리아나는 그 사이에 키가 5cm 이상 컸고, 최근에 겪은 갖은 마음고생과 몸 고생으로 여윈 상태였다. 게다가 귀족 여성의 초상화가 실제보다 훨씬 풍만하게 그려진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아가씨는 혹시 코니스에서 오셨나요? 저도 코니스에 친척이 있는데, 그 사람도 색깔이나 느낌이 아가씨랑 굉장히 비슷하거든요. 작고 화사하고 여린 느낌이…. 제가 아는 사람은 다 큰 남자인데도 말이에요.”
부인이 다시 떠들며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이미 전단에 대해서는 잊어버린 듯, 그녀들은 새로운 화제, 즉 코니스의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관심을 돌렸다.
“우리 오드리는 저렇게 뚱뚱하지 않아.”
웬디가 다시금 강조했다. 아드리아나의 안색이 나빠진 것을 보고, 그림 속의 풍만한 여자와 비교 당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얼른 집에 가자.”
웬디가 아드리아나의 손을 잡으며 재촉했다. 아드리아나는 전단을 신경 쓰며 주저하다가, 할 수 없이 다시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만약 가능했다면 그 전단을 아무도 볼 수 없도록 떼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보는 사람이 많은 길 한복판에서 그런 행동을 하면 괜히 더 수상하게 보일지도 몰랐다.
보호소로 돌아가는 동안, 아드리아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와 닿을 때마다 자신의 정체를 들킨 게 아닐까 애를 태웠다. 조금 전의 부인들은 그냥 ‘약간 닮은 사람’ 정도로 생각하고 지나쳤지만, 아드리아나를 찾고 있는 당사자들에게 발견되면 또 어떨지 몰랐다.
전단을 붙인 사람은 누구일까. 부모님? 스콰이어? 어느 쪽이든 아직은 마주치기가 두려웠다.
*
“잘 다녀왔어? 수녀님은 뵈었어?”
보호소에 도착하자, 복도에서 바구니를 쌓아놓고 옮기던 미네타가 두 사람을 맞아주었다.
아드리아나는 자꾸 주의가 흩어지는 것을 끌어 모으며 겨우 대답했다.
“네. 정말 좋은 분이셨어요.”
“흠. 그분을 처음 보고 그렇게 말하는 건 오드리가 처음인데. 좋은 분인 건 사실이라고 해도 말이야.”
미네타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녀 역시도 눈가가 어두웠다. 어제 뭔가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아드리아나는 그녀에게 자신의 일을 의논하기를 잠시 미루기로 했다.
“근데 다들 어디 갔어요? 차 만드는 건 어디서 해요?”
아드리아나가 묻자, 미네타가 커다란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바구니 두 개를 집어서 웬디와 아드리아나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격려하듯 두 사람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가볼까? 우리 빵순이 웬디가 빵 봉투를 들고 방글거리는 모습을 보니 일을 시키는 내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는군.”
세 사람은 각자 바구니를 들고 건물 뒷밭을 지났다. 잡목이 울타리처럼 늘어선 밭을 뚫고 지나가자 작은 과수원이 나타났다. 아이들과 일꾼들은 모두 그곳에 있었다.
“아이구, 우리 오드리 아가씨 집 안 나가고 돌아왔구먼. 밭일까지 해주려고 온 거유?”
아드리아나와 웬디가 합류하자, 다들 일하다 말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특히 아이들은 두 사람이 슈하스에서 뭔가 선물을 사오지 않았는지, 그곳에서 무얼 하고 왔는지 궁금했던 듯 지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어허. 열심히 일하지 아니한 자는 이따가 빵 없다.”
미네타는 한 마디로 신속하게 아이들을 자기 자리로 돌려보내고, 아드리아나에게 열매 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노란 귤 같은 열매가 달린 작은 나무였다. 일부 구역에는 블루베리처럼 생긴 까만 열매 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다들 들고 있는 바구니 안에 노란 열매, 까만 열매가 가득 담겨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미네타의 뒤를 따라다니며 바구니를 채우다가, 귀엽게 생긴 조그마한 열매를 하나 따서 입에 넣었다. 열매와 나무에서 감도는 상큼한 향이 무척 좋았다. 그러나 열매를 한 입 깨문 순간, 레몬 같은 신맛이 물씬 배어 나와 입안에 확 퍼져 들었다.
퉤퉤, 뱉어내고 난 후에도 얼굴을 찡그리느라고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지독했다. 주위에서 웃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거 그냥은 못 먹어. 잼이나 차로 만들어야 먹지.”
“아…, 너무 시어요. 이게 다 익은 건가요?”
“따서 며칠 놔두면 당도가 높아질 거야. 그래 봤자 생으로 먹을 정도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차로 만들면 향이 무지 좋거든.”
“아휴, 셔….”
입안에 퍼진 신맛이 금방 가시지 않아, 아드리아나는 오만상을 쓴 채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처음 먹어 본 열매의 독한 맛과 장난치기 바쁜 아이들의 소동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불안감이 다 사라지지는 않았다. 적어도 아버지나 스콰이어에게 발각되어 끌려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 속에서 그냥 이렇게 지내고 싶은데.
아드리아나는 마음의 불안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밝게 웃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방인인 자신의 우울함을 전염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계속 살면 안 되냐고 말해볼까. 미네타랑 이곳 사람들 모두 나를 좋아해 주는 것 같은데, 왜 그런 말을 해주지 않는 걸까.’
그리고 일과가 모두 끝난 저녁, 아드리아나는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해보며 미네타를 기다렸다.
그녀에게 자신에 대해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사실은 고향에서 나쁜 일을 겪어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고, 자신의 진짜 이름과 신분을 들켜서는 안 된다고, 그리고 앞으로는 이곳에서 살고 싶다고, 그렇게 말해볼 생각이었다.
‘긴장 돼…. 같이 살 수 없다는 말을 듣더라도 상처받지 말아야지.’
아드리아나는 애써 자신을 다독이며 기다렸다.
흘러가는 시간이 몹시 더디게 느껴졌다.
어느덧 9시가 넘었다. 평소라면 미네타가 자러 방으로 돌아올 시각이었다.
그때 밖에서 희미하게 자동차 엔진음이 들려오더니 현관의 초인종이 울렸다.
‘누, 누가 왔어.’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아드리아나는 손이 떨려서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릴 뻔했다.
평소 보호소에는 찾아오는 이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이 시간이면 대부분 잠자리에 들었을 시각이었다. 쿵쾅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조심스럽게 커튼을 약간만 들추었다.
가로등 아래로 대문 밖의 낯선 방문자의 모습이 보였다. 다소 캐주얼한 정장 차림에다 가죽 가방을 든 남자가 푸른빛이 도는 자동차 앞에 서 있었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서 있는 모습의 실루엣이나 머리 모양을 봐서는 젊은 남자일 것 같았다.
아드리아나는 리노아스에 있을 때 저런 사람을 본 적이 있었나 생각해내려 애썼다. 옷차림은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이었다. 리노아스가 있는 남서쪽 영지의 스타일은 아니었다.
이윽고 미네타가 나가서 남자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는 미네타에게 격식을 갖추며 인사를 했고 미네타 역시 조심스러운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와 버렸어…. 나를 잡으러 와 버렸나 봐….’
심장이 마음대로 요동쳐서 자신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건물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둘 다 표정이 어두웠다.
아드리아나는 재빨리 커튼을 내렸다.
‘뒷문으로 나가서 도망칠까? 내가 도망칠 수 있을까?’
이곳은 작은 산꼭대기나 다름없었고 근처에 인가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남자는 자동차를 가지고 있었다.
입술 사이로부터 떨리는 신음이 새어나왔다. 이도 저도 못하고 방 안을 서성이다가 노크소리가 들리자 무심결에 흑, 하고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드리. 나 손님이….”
미네타가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아드리아나의 울먹이는 얼굴을 발견하더니 눈을 휘둥그레 뜨며 안으로 들어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미네타….”
“왜 그래? 갑자기 무슨 일이야?”
미네타가 아드리아나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아드리아나 역시 당황해서 그녀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남자가 자신에 대해 아직 말하지 않은 걸까? 자신을 잡으러 왔다고 밝히지 않은 걸까? 혼란스러워하며 미네타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열려 있는 문에서 다시 노크 소리가 났다.
“저, 괜찮으십니까?”
그는 가로등 밑에 서 있던 그 남자였다.
그 역시 미네타만큼이나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방 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드리아나가 아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남자였다. 미네타와 같이 안경을 낀 지적인 얼굴과 상냥해 보이는 부드러운 이목구비, 단정한 차림새 등은 자신을 잡으러 온 추적자나 심부름꾼의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저분은 누구세요?”
아드리아나가 미네타의 그림자에 몸을 반쯤 감추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저분은….”
미네타가 등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대답하기 전에,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혹시 제가 놀라게 해 드린 건가요?”
남자가 겸연쩍은 듯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너무 늦은 시간에 찾아왔죠. 출장을 좀 멀리 다녀오느라 이렇게 밤늦게 실례를 하게 되었습니다만…. 노아 휴스턴이라고 합니다.”
그러고는 자기소개를 마저 해도 될지 눈치라도 보듯, 미네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미네타가 쓴웃음을 지으며 아드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요즘 자주 보이는, 난처해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휴스턴 씨는 가끔 우리 보호소 일을 상담해 주시는 변호사야. 실은…종종 약간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거든. 이런 시설을 운영하다 보면 뭐….”
미네타가 소개를 해주자, 문 앞에 선 낯선 이는 자신에 대한 오해가 풀렸으리라 여기고서 더욱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놀라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제 외모가 워낙 터프한 탓에 불한당으로 오해받는 일이 많습니다.”
그 말에 아드리아나는 겨우 안심하고 작게 미소 지었다. 그를 오해한 것이 부끄러웠지만 오해여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럼 나는 휴스턴 씨랑 사무실에서 잠깐 얘기하고 돌아올게. 오드리 먼저 자고 있어.”
“네.”
미네타와 휴스턴이 다시 밖으로 나가고 아드리아나는 다시 방 안에 혼자 남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혹시나 싶어 방문을 잠갔다. 그러다 미네타를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얼른 잠금쇠를 풀었다.
슬그머니 창문의 커튼을 다시 한 번 들춰보았다. 바깥에는 휴스턴이 타고 온 자동차 한 대가 가로등 불빛 아래 고요하게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잘 수 있을까….’
두 번째 손님이 오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며, 아드리아나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