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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다 아름다운-11화 (11/140)

00011  헤밀 편 - 찾다  =========================================================================

“안 돼! 거기 서, 루시! 기다려!”

로레인이 루시를 쫓으며 ‘기다려!’를 연발하기 시작했다.

“길 위험하니까 뛰지 마, 로레인.”

발렌틴은 그들의 뒤를 쫓지 않았다. 숙소 주인에게서 평소 개를 멋대로 풀어놓고 키우고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개가 묶여 있는 것은, 지금처럼 방문객들이 머무는 동안뿐이라고.

“루시가 아래로 가는데? 낭떠러지가 있단 말이야.”

“너보다 여기서 훨씬 오래 산 개야. 경험도 조심성도 너보단 많을걸.”

“어휴, 웨버 영감님은 도움이 안 돼. 루시, 기다려!”

그러나 로레인이 아무리 기다려를 외쳐 봐도 허사였다.

루시는 잘 훈련된 녀석 답지 않게 주춤주춤 잠시 멈췄다가 앞으로 전진하기를 반복했다. 좀처럼 로레인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지를 않았다. 마치 자신을 쫓아오는 로레인을 놀리기라도 하는 듯 도망치다가 멈춰서 기다리고, 거의 따라잡힐 때쯤 또 도망치기를 되풀이했다.

“이 못된 녀석! 이리 오지 못해? 엉덩이를 때려 줄 테다!”

로레인이 우려하던 대로, 루시는 벼랑 쪽을 향했다.

그리고 그 길 끝에 도착해서, 벼랑 바깥쪽으로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순간 로레인은 루시가 떨어질까 봐 긴장하고 굳어 섰다. 발렌틴은 로레인이 개를 따라서 뛰어갈까 봐 그녀의 몸 앞을 팔로 가로막고, 미간을 좁힌 채 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루시가 헥헥 대며 고개를 돌려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런 다음 또 한 번 코끝을 벼랑 바깥쪽으로 향했다. 아주 못된 개가 되기로 작정한 건 아닌 모양이었는지 열심히 꼬리도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이리와, 어서! 위험하단 말이야!”

로레인이 거리를 둔 곳에서 꼼짝 못하고 서서 재촉했다.

결국 루시는 끙끙대며 두 사람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왔다.

“대체 왜 그러는 거니? 이렇게 착한 강아지인데….”

로레인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루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문득 발렌틴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거기 뭐가 있는 거 아니야?”

“뭐?”

로레인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발렌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서서히 겁먹은 얼굴로 변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뭐야…. 무서운 소리 하지 마. 이런 컴컴한 날 벼랑 밑에 있긴 뭐가 있다고…. 나빠, 하지 마아….”

“그게 아니라, 거기 아래 틈 어딘가에 새끼 올빼미라도 걸려 있는 거 아니냐고. 사냥개잖아.”

루시 같은 포인터는 주인이 사냥할 때에 사냥감을 찾아서 알려주는 임무를 맡는다. 비가 내린 숲 속이 사냥개에게 좋은 환경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이 숲길은 루시에게 집 앞마당이나 다름없었다.

“으, 그럼 본다…. 나 볼 거예요….”

로레인이 중얼거리며 벼랑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들이 있던 위치는 곧장 바닥까지 떨어지는 낭떠러지 위는 아니었다. 그 아래로도 어느 정도의 평평한 공간이 계단처럼 이어져 있는 곳이었다. 발렌틴은 속으로 있긴 뭐가 있겠냐고 코웃음을 치며 그녀를 기다렸따.

두리번대며 아래를 살피던 로레인이 천천히 상체를 뒤로 당겼다.

“으아앗! 사람이 있잖아!”

로레인의 외침에, 발렌틴이 미간을 찌푸렸다.

“실없이 장난하지 마. 가 버릴 거야.”

그는 심드렁하게 중얼거리고서 몸을 돌렸다.

그러나 로레인은 듣지 못한 듯 벼랑 쪽으로 몸을 더욱 숙이며 다급하게 외쳤다.

“빨리! 빨리 어떻게 좀 해 봐! 저러다 떨어지겠어!”

로레인은 물론이고 루시까지 벼랑 밑으로 시선을 처박은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발렌틴은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려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벼랑 끝 1미터쯤 아래에, 여자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여자는 좁은 바닥 위를 뒤덮은 덤불 속에 갇혀 있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녀는 한참 아래로 꺼져 있는 물길로 추락하지는 않았다. 벼랑 위에서부터 덤불이 쭉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떨어질 때의 충격도 완화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비교적 넓은 덤불 공간에서도 하필 끝 쪽에 위태하게 누워 있었다.

발렌틴은 곧바로 미끄러운 벽을 짚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조, 조심해.”

루시를 꼭 끌어안은 채로 로레인이 말했다.

언제부터 거기에 고립되어 있었는지는 몰라도, 여자는 그때까지 정신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두려운 듯 몸을 움찔거렸다.

발렌틴은 서두르지 않고 덤불과 벽 사이 바닥으로 내려가서, 잠시 여자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팔을 뻗었다.

“가만히….”

움직이지 말고 있어달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그럴 것도 없이 여자는 몸이 완전히 굳어서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다.

발렌틴은 몸을 굽혀서 덤불 위를 거둬내고, 여자의 웅크린 팔 밑에 손을 넣었다. 조심스럽게 상체를 안고 안쪽 공간으로 끌어당긴 순간, 드레스 자락이 낀 수풀에서 요란한 나뭇잎 소리가 났다. 여자는 눈을 감고 축 늘어져버렸다.

“젠장할….”

여자의 옷자락이 걸려서 위험했던 순간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발렌틴은 그녀를 데리고 안쪽으로 이동한 후 잠시 숨을 돌렸다. 품 안에 안고 있노라니 그녀의 머리가 닿은 자신의 가슴쪽이 시원해져서, 여자의 몸이 얼음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 올려 줘! 내가 받을게!”

위에서 로레인이 팔을 크게 벌리고 소리쳤다. 그녀는 어릴 적에 발렌틴이 마당에서 공을 튕기고 노는 걸 볼 때에도 그렇게 두 팔을 벌리고 외치곤 했었다.

“…펜을 불러줘.”

발렌틴이 제대로 된 판단으로 방향을 바꾸어주자, 로레인이 정신을 차린 듯 즉시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루시가 그 뒤를 쫓아 뛰어갔다.

발렌틴은 잠시 젖은 바닥을 응시하며 질색하고 있다가, 여자를 안은 채로 벽에 몸을 밀착하고 주저앉았다.

조금만 잘못 몸을 움직여도 미끄러져서 추락할 장소에서 괜한 만용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여자를 번쩍 안아서 역기 들어 올리듯 1m 위로 올리는 시도를, 굳이 지금 처음으로 해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자의 몸은 몹시 차가웠다. 떨림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숨이 멎은 사람처럼 얼굴이 창백하고 미동도 없었다. 피부에는 나뭇가지 따위에 긁힌 듯한 상처가 여기저기 나 있었다. 그리고 휘황찬란한 귀걸이를 하고 있었는데, 발렌틴은 뒤늦게 그녀가 온몸에 보석을 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 대단한 가문의 영애이기에….’

혹은 지체 높은 귀부인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위세를 자랑하는 가문의 여자라면, 그리고 그 보호자가 알게 된다면….

‘아, 또 귀찮게 되는 건 아니겠지.’

발렌틴은 경계심을 담은 눈길로 여자를 거의 노려보듯 내려다보았다.

아무튼 확실치는 않았지만, 그녀는 로레인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또한 아주 연약해 보이는, 말 그대로 곧 숨이 끊어질지도 모르는 연약한 생명의 모습이었다.

“후….”

깊은 한숨을 뱉어내고, 그는 내켜 하지 않으면서도 여자의 몸을 도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바짝 껴안자, 여자에게서 느껴지던 찬 기운이 가슴에 더욱 깊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실컷 구해 놓고 어중간하게 내버리면 뒷일이 더 찜찜해질 터였다.

‘로레인을 따라온 것부터가 내 잘못이었지.’

한 번 고개를 숙여서 여자의 얼굴에 귀를 대 보았다. 아직 가느다랗게나마 호흡하고 있음을 확인하고서 다시 고개를 들었다.

"주인님! 웨버 경!"

때마침 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렌틴은 다시 여자를 안아 들고 일어났다. 물기와 흙을 흠뻑 빨아들여서 무거워진 드레스 때문에 무척 무거웠지만, 곧 다른 데로 주의가 쏠려서 잊어버렸다.

그의 가슴에 의지하고 있는 작은 여자의 뺨에, 어느새 따뜻하게 돌아온 체온이 느껴졌다.

*

두 사람은 교회의 일행을 펜에게 부탁하고, 여자를 차에 태워서 먼저 산을 내려가기로 했다. 신원불명인데다 귀금속을 온몸에 두른 어린 여자를 아무 데나 맡기고 손을 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많은 병원들이 믿을 만한 신원보증인 없이는 환자를 받아주지 않았다.

“제일 가까운 병원이 어디야?”

발렌틴이 운전대를 잡고 말했다.

“아….”

로레인이 안절부절못하며 대답하는 데 뜸을 들였다. 그러다 이내 결심한 듯, 여자의 몸에 두른 보석들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뭐하는 거야?”

발렌틴이 백미러를 들여다보며 물었지만 로레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서두르는 손길로 보석들을 전부 자신의 천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그러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근처 아동보호소로 가자. 산을 내려가면 헤밀 서쪽 끝에 있어.”

“아동보호소라고?”

“응. 멀리까지 병원을 찾아갔다가 허탕 칠지도 모르고, 그리고….”

로레인이 다시 한 번 여자의 얼굴을 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거기로 가요. 얼마 안 걸릴 거야.”

“안전벨트 매.”

발렌틴이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엉망이 된 산길을 운전하기가 고역이어서 속으로 욕설을 삼키며, 자칫하면 길을 벗어날 것 같은 좁은 도로를 긴장한 채로 달렸다.

20분쯤 후, 그들은 헤밀의 아동보호소에 도착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두 분은 여기까지 웬일이시고요?”

미네타가 자신의 눈 대신 안경을 의심하듯, 그것을 벗어서 닦으며 물었다.

“산에서 주워왔소.”

“네에?”

“성지에 갔다가 발견했어요, 미네타. 조난당한 아가씨 같아요. 다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열이 많이 나서 우리가 해열제를 먹이고 왔어요.”

발렌틴과 로레인이 그렇게 설명하자, 미네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침대 주변으로 커튼을 쳤다.

“젖은 옷부터 어떻게 해야겠어요. 신사분은 잠시 나가 주시겠어요?”

미네타의 말에, 발렌틴은 먼저 차로 돌아왔다.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노라니, 얼마 후 로레인이 급한 걸음으로 건물을 빠져나왔다. 옷을 갈아입히는 것도 힘들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나는 남아서 같이 아가씨를 돌봐야겠어. 오빠도 여기서 눈 좀 붙였다가 아침에 가는 게 어때?”

로레인의 말에 발렌틴이 고개를 저었다. 남아 있어봤자 할 일도 없고 방해만 될 것 같았다.

“그럼 난 먼저 돌아갈게. 교회까지는 혼자 갈 수 있지?”

“응. 좀 걸어도 되고 애들 자전거를 빌려도 돼.”

“환할 때 움직이도록 해.”

발렌틴은 로레인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를 남긴 후 차를 돌렸다. 그러다 곧바로 브레이크를 밟고 다시 조수석 차창 밖을 쳐다보았다.

“로레인.”

“왜?”

“…설마, 나 기억하지는 못 하겠지?”

심각한 얼굴로 묻는 그를 보고, 로레인이 멍하게 서 있다가 웃음을 지었다.

“아. 근데 그 상황에서 아가씨가 오빠 얼굴을 보기나 했을까 싶네. 혹시 묻더라도 이름은 알려주지 않을게.”

“음.”

발렌틴은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창문을 올렸다.

그에게는 고향을 떠나와서 테스카에 처음 정착했던 때에 당했던 아픈 기억이 있었다. 무더운 여름날의 땡볕 아래에서 한 여성이 길가에서 주저앉는 것을 보고 부축했다가, 바로 다음날에 ‘딸을 추행했으니 결혼해서 책임지라’는 선전포고를 받았던 것이다.

그는 나중에 테스카에서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건은 쉽게 해결되었지만, 그때의 황당함과 치욕스러움은 쉽게 잊히지가 않았다.

‘어째 팔을 부축한 것뿐인데 요란하게 덥석 안긴다 했지.’

물론 조금 전의 아가씨는 의심할 바 없이 실제로 조난당해서 생명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었다. 게다가 발렌틴이 다가가자 겁에 질려서 떨다가 벼랑 밑으로 떨어질 뻔했다.

‘어디의 뭐하는 아가씨인지.’

흐린 달빛에도 희고 깨끗한 피부가 매끄럽게 빛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비에 젖어 산발하고 오들오들 떨던 모습만 인상에 남아서, 진짜 외모가 어떻게 생겼었는지는 벌써 기억도 나지 않았지만, 체온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꼭 안고 있던 때의 느낌은 아직 생생했다.

바깥 구경이나 하고 살았을지 의심스러운 고운 피부, 장소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치렁치렁한 차림으로 싸여 있던 몸, 그리고 자신에게 밀착되었던 보드라운 뺨과 가슴, 엉덩이 같은 신체 부위의 푹신하고 말랑말랑한 감촉이….

‘미쳤나.’

발렌틴은 저도 모르게 그때의 기분을 곱씹고 있다가 길을 지나칠 뻔하고 핸들을 확 꺾었다. 시골길을 홀로 달리는 까만 리무진이 한층 난폭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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