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8 헤밀 편 - 찾다 =========================================================================
‘여기서 계속 살아도 될까?’
아드리아나는 헤밀에서 새로운 이름으로 새 삶을 살아가는 자신을 상상했다. 이 보호소도 좋았다. 며칠밖에 지내지 않은 방인데도 이미 자기 방인 것처럼 아늑했다.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며 종일을 이곳에서 보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잠시 들른 손님에 불과했다. 아드리아나가 보기에 미네타는 자신이 줄곧 이곳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 다른 길을 떠날 사람이라고 선을 긋는 듯도 했다.
그 점이 조금 서운한 것도 같았다. 조난당해 업혀온 입장이니 언젠가 떠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이 생활을 계속하고 싶다는 바람이 생겨나 있었다.
‘그래도 여기서 부를 이름이 필요하다고 지어줄 정도면, 한동안은 이곳에 있을 걸로 생각해도 되겠지…?’
혹나 괜한 민폐만 되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을 한 것은 그때 잠시였다.
아드리아나가 도움 되는 일꾼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다음 날도 미네타는 덕분에 살았다며 수업 일정이 잔뜩 적힌 종이를 건네주며 웃었다. 아침을 먹은 후에 웬디를 데리고 외출하려 하자 꼬마들은 물론 다른 일꾼들까지 징징대며 매달렸다.
“오드리, 어디 새지 말고 돌아와야 해. 오후에 판매용 차를 담을 건데 꼬마들이 도와주는 것보다 먹어치우는 게 많아서 감시자가 없으면 힘들단 말이야.”
“네. 바로 올게요, 미네타.”
“우리 버리고 가지 마, 오드리!”
“안 갈 거야. 웬디랑 교회에 갔다가 올게.”
“아가씨, 설마하니 이대로 작별인 건 아니겠지요? 전에 자원봉사자 아가씨가 온 적이 있었는데, 애들한테 며칠 시달린 나머지 훤한 대낮에 별 좀 보고 오겠다며 나가설랑 다시는 볼 수 없었다우.”
“그, 그런….”
“나도! 나도 누나 따라가고 싶어요! 나도 데려가아!”
꿀에 달라붙는 벌떼처럼 몰려드는 사람들을 떼어내느라 한참 실랑이를 하고, 아드리아나와 웬디는 마침내 둘이서 보호소를 나섰다.
울타리가 쳐진 곳까지 가는 동안에는 자전거 타는 실력이 조금 위태위태했지만, 금방 감각이 되살아났다. 아드리아나도 열두 살 이전까지는 자전거 타는 것을 금지 당하지 않아서 정원 안을 돌아다니며 놀곤 했었다.
두 사람은 함께 드넓은 풀밭을 가로지르고 언덕을 내려갔다. 이른 장마가 지나간 8월 하늘이 쾌청했다. 완만한 경사를 타고 내려가는 길은 페달을 밟지 않아도 되어서 무척 편했다.
“바람 시원하다. 그치, 웬디?”
“히히. 근데 나 머리카락 때문에 얼굴 간지러워.”
“아, 그래?”
아드리아나는 자전거를 세우고 길 한쪽에 서서 웬디의 머리를 묶어주었다. 짧은 단발머리라서 옆 머리카락이 자꾸 삐져나오기에, 아래는 놔두고 옆과 위만 한 움큼 모아서 얼굴을 간질이지 않도록 묶어주었다.
고향 리노아스에서는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라면 아이나 어른 모두 머리를 허리까지 길러서 풀고 다니는 게 유행이었다. 머리카락이 거슬릴 만한 일을 할 때에만 머리끈을 사용했는데, 귀족 여성이 머리카락을 거추장스러워할 만한 작업을 할 일은 여간해서 없었다.
“웬디는 머리 감고 말리기 편하겠다. 빗질도 조금만 해도 되겠는데?”
“그래도 나는 머리 긴 게 좋은데. 오드리처럼.”
웬디가 어쩐지 의기소침해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원래 조그맣던 높은 톤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작게 사그라졌다.
아드리아나는 또래보다 키가 작은 아홉 살 여자아이라도 긴 머리카락 동경하는 건가하고 미소 지었다. 그리고 혹시나 머리카락을 관리해주기 어렵다는 이유로 제 뜻에 반해서 자르게 된 건 아닌지, 더욱 다정하게 말했다.
“웬디는 단발머리도 아주 잘 어울리고 귀여워. 하지만 어리고 튼튼하니까 머리카락도 엄청 빨리 자랄 거야.”
“응. 엄청 빨리 자랄 거야. 나는 키도 20살 되기 전에 170cm 넘을 거야.”
“맞아, 그럴 거야. 근데 날 아가씨라고 부르려고?”
“히히.”
아드리아나는 웬디의 기분이 다시 밝아진 것을 보고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둘은 다시 자전거를 달려서 헤밀의 시골길을 지났다. 반만 포장된 좁은 길을 지나려니 길 위를 지나던 노부인이 한구석으로 비켜주며 인사를 해왔다.
“어머, 웬디 아니니? 예쁜 언니랑 자전거 타고 어딜 가니?”
“안녕하세요. 저는 오드리 언니랑 교회에 가요.”
“그거 좋겠구나. 잘 다녀오렴.”
노부인이 인사해주며 아드리아나에게도 눈인사를 건넸다. 아드리아나는 쑥스러워하며 고개 숙여 답하고, 타는 입술을 적셨다.
길 위에서 이따금 마주치는 사람마다 웬디에게 아는 척을 했다. 그리고 웬디는 미네타가 가르쳐준 대로 아드리아나를 ‘오드리 언니’라고 소개했다.
한편, 낯선 사람들과 계속해서 인사하고 눈을 마주쳐야 하는 것 때문에 아드리아나는 얼굴이 점점 뜨거워졌다.
‘슈하스는 헤밀보다 큰 마을이라던데 그곳의 사람들과도 전부 인사를 나눠야 하는 건 아니겠지?’
로레인 수녀가 있는 슈하스 교회에는 일요일마다 예배를 드리러 오는 사람이 수십 명이라고 했다. 왕실에서 종교적 교리를 가르치지 않는 아이넨의 작은 마을 교회 치고는 상당한 숫자였다.
이윽고 슈하스라고 적힌 나무 표지판이 나타났다.
길 한쪽이 거의 밭이던 시골 마을 헤밀을 뒤로 한 후였다. 슈하스의 길 위에는 무성한 가로수들이 충분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길 위에는 나뒹구는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그곳에 옹기종기 모인 1, 2층짜리 건물들의 모습이 어쩐지 낯익었다. 건물 위를 덮고 있는 빨간 지붕, 파란 지붕도. 보호소의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았던 마을은 헤밀이 아니라 슈하스의 모습이었던 듯했다.
“와, 집들이 너무 예쁘다. 창문 위에 집 이름도 적혀있어.”
“그건 가게들이야. 언니는 시내에 처음 와 봐?”
“처음이야. 그럼 여긴 상점가인 건가?”
“응. 맛있는 걸 파는 데도 있고 예쁜 옷 같은 것도 팔아. 앞으로 내가 많이 데리고 와줄게.”
낯설고도 흥미로운 거리와 종종 마주치는 사람들의 자유로워 보이는 차림새 따위를 구경하며, 아드리아나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심장이 마구 달음질쳤다.
‘이렇게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을 내가 마음대로 마구 달리고 있어….’
“저기 봐봐! 저게 오토 아저씨네 과자점이야!”
상점가를 얼마쯤 지났을 무렵, 웬디가 가게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붕 아래에 고운 자주색 천으로 된 햇빛 가리개를 드리운 작은 과자점이었다. 입구 앞에는 ‘오토와 슈’ 라고 쓴 나무 간판이 서 있었다.
어제 미네타는 로레인 수녀가 그 과자점의 빵을 아주 좋아한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선물할 수 있도록 약간의 돈도 내주었다.
“안녕하세요.”
아드리아나는 자전거를 가게 앞에 세워두고, 웬디와 함께 과자점 문을 열며 인사했다.
계산대에 턱을 받치고 서 있던 거구의 남자가 인사를 듣고서 묵직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시커먼 머리카락과 덥수룩한 수염을 산적처럼 기른 험상궂은 외모에다 흰색 민소매 셔츠를 입고 있었다.
“오토 아저씨야. 빵을 만드는 아주 대단한 사람이야.”
웬디가 자랑스러럽게 말하고서, 빵이 진열된 판매대 쪽으로 척척 걸어갔다. 아드리아나는 저도 모르게 움츠리고 있던 어깨를 펴고 웬디의 뒤를 따라갔다.
가게 안에는 다른 손님들도 몇 명 있었다. 판매대에는 몇 가지 종류의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빵이 소량씩 진열되어 있었다.
“신기하다. 맛있게 생겼어.”
“우리 초코빵 먹으면 안 돼? 초코빵 맛있는데.”
“음, 글쎄. 돈이 남을지 모르겠네. 이런 빵들은 얼마지?”
삐뚤삐뚤한 글씨로 적힌 가격표를 훑어보니, 미네타가 받은 돈으로 빵을 넉넉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드리아나는 로레인에게 선물할 것과 보호소에 가져갈 것까지 넉넉하게 빵을 담았다.
계산을 부탁하자, 오토가 종이봉투 두 개에 빵을 나눠 담아준 뒤, 계산대 아래 선반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서 내밀었다.
웬디가 기뻐하며 두 손을 뻗었다.
“꿀이다!”
“나눠 먹어라.”
오토는 짧게 말하고서, 꿀을 제외한 빵 값을 계산해 주었다.
“고맙습니다!”
아드리아나는 웬디와 함께 오토에게 인사하고 가게를 나왔다. 그는 이번에도 무성의한 동작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분명히 그에게서 인사를 받지 못했다고 오해하는 손님도 많을 것이다.
“조금 무섭게 생겼지만 좋은 아저씨다, 그치?”
“좋은 아저씨야! 그리고 대단해!”
웬디는 보호소에 가져갈 빵들이 든 봉투를 두 팔 가득 껴안고 자전거 앞까지 걸어가서, 그것을 바구니에 담았다. 그리고 한층 더 행복해진 것 같은 얼굴로 자전거를 달렸다.
슈하스 교회는 숲이 가까운 비탈길 위에 있었다. 교회의 외관은 일반 가정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크기가 2, 3배쯤 커 보였다.
아드리아나와 웬디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예배가 시작해 있었다.
“우리 지각했나 봐.”
예배에 방해되지 않도록 살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가며 웬디에게 속삭였다. 그러자 웬디가 집게손가락을 입술 위에 대 보이며, 교회 안에서는 떠들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신부의 조용하고 단조로운 목소리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앉아서 잘 들리지 않는 신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주변을 흘끔대며 생명의 은인이었던 사람들로 추정할 만한 인물들을 찾아보았다. 나이가 아주 많아 보이는 수녀 한 명, 지극히 점잖은 얼굴 표정을 하고 있는 중년의 수녀가 한 명 있었다.
‘훨씬 어릴 것 같은 목소리였는데….’
그다음에는 남자 성직자들을 눈으로 훑었다. 강론 중인 신부는 키가 컸지만 적어도 50세가 넘어 보였고 체구도 왜소했다. 그리고 그 밖에 성직자로 짐작되는 회색 옷을 입은 남자들을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그들 중에서 아드리아나를 한 팔로 일으킬 수 있을 듯한 사람은 없었다.
‘하긴. 그때 그 그림자도 딱히 거구로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기도 해. 그리고 남자들은 보기보다 힘이 세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스르르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신부의 목소리가 자장가보다도 나른하게 들렸다.
요즘 아드리아나는 평생 해본 적 없던 노동을 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보호소의 일과는 비교적 마음에 들었지만 육체적으로는 매우 고되었다. 매일 오후 8시 정도만 되어도 눈이 감겨서 다음날 아침까지 한 번을 깨지 않고 잘 정도로….
“…눈을 뜨라, 자매여!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리! 오오, 선한 등불을 밝히리! 오오, 형제여…!”
별안간 들려오는 우렁찬 합창에, 아드리아나는 화들짝 놀라서 거의 경기를 일으키며 잠에서 깼다.
“아, 깜짝이야….”
얼굴은 새빨개지고 심장이 쿵쾅댔다. 다들 일어서서 노래책을 들여다보며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나, 나한테 눈을 뜨라고 그러는 줄 알았어.”
아드리아나가 부끄러워하며 소곤거리자, 아까는 교회 안에서 떠들면 안 된다던 웬디가 두 손을 입 앞에 모으고 히히 웃었다.
내내 우왕좌왕하고 주위를 눈치 보며 헤매는 사이에 어느덧 마지막 찬송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아드리아나가 은인들에 대해 아는 정보라고는 ‘로레인’이라는 이름 하나뿐이었다. 그들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에 아직까지 얻은 수확이랄 만한 게 없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웬디를 데리고서,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뒤따라 나갔다. 그리고 입구 한쪽에서 기다리고 서 있다가, 나이 지긋한 수녀 한 명이 느릿느릿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로레인 수녀에 대해 물었다.
“이걸 어쩌나. 로레인 수녀님은 아직 안 돌아왔는데요. 급한 일인가요?”
노수녀는 이가 많이 남지 않아서 부정확한 발음으로 입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모처럼 멀리까지 나왔는데 실망을 금할 길이 없었다. 아드리아나는 선뜻 돌아가는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어쩌지…. 집에 일찍 돌아가기로 약속했거든요. 그분이 어디에 계신지 알 수 있을까요? 가까운 데라면 제가 찾아뵙고 싶어요.”
“저어기 멀리 외곽 마을에 지원을 가셨어요. 어제나 오늘 돌아온다더니 글쎄, 몇 시에 올는지는 모르겠네요.”
“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하는 건가, 아드리아나는 난처해져서 웬디를 내려다보았다. 웬디도 아드리아나의 치맛자락을 붙잡은 채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음…. 할 수 없죠. 그럼 다음에 다시 올게요. 이건 빵인데 여기 계시는 분들과 함께 드시겠어요?”
아드리아나는 빵이 든 종이봉투를 노수녀에게 건넸다. 그리고 아쉬움을 남겨둔 채로 하릴없이 발길을 되돌렸다.
“그래도 다음 주도 있으니까…. 덕분에 바람도 쐬었고.”
애써 위안하는 말을 하며 웬디에게 미소 지어 보이자, 웬디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덕분에 초코빵도 생겼고.”
“후후. 그러네.”
두 사람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교회를 나왔다.
자전거를 세워두는 곳에 가자, 벌써 다들 각자의 집으로 속속 떠나버렸는지 아드리아나와 웬디의 것 2대만이 남아있었다. 길이 좁아서 돌아가는 사람들과 부딪칠 위험이 있는 어귀까지는 자전거를 끌며 걸었다.
웬디는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불렀다.
“오드리, 집에 가면 기타 쳐 줘.”
“그럴까? 얼른 일을 다 한 다음에.”
“응. 근데 나 지금 초코빵 먹고 싶어.”
“안 돼. 돌아가서 다 같이 나눠먹어야지.”
“작은 거 한 개만 먹으면 안 돼? 배고파.”
과연 예배가 끝나는 시각은 식사 시간쯤이어서, 아드리아나도 허기를 느꼈다. 보호소까지는 한참이나 남았는데, 웬디에게 아무것도 못 먹이고 자전거를 타게 하는 것도 가엾었다.
아드리아나는 반으로 잘라진 작은 빵이 든 비닐 하나를 꺼냈다.
“자전거 타면서 들고 먹으면 위험하니까 하나는 입에 넣고 가. 하나는 바구니에 넣어놨다가 중간에 쉬면서 먹고.”
“오드리는 안 먹어?”
“난 괜찮아. 이따 먹을게.”
웃으며 대답하고, 종이봉투를 다시 여며서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막 자전거에 올라타려던 때였다.
“앗, 초코빵 안 사왔다! 맛있겠다!”
길 반대편에서 누군가 호들갑스럽게 외쳤다. 웬디가 먹고 있는 초코빵을 보고 말하는 것 같았다.
높고 또랑또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묘하게 귀에 익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