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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다 아름다운-7화 (7/140)

00007  헤밀 편 - 찾다  =========================================================================

통화 연결음이 몇 번인가 울리고, 상대 쪽에서 수화기를 드는 소리가 났다.

“리노아스 남작관저입니다. 누구십니까?”

흘러나오는 딱딱한 목소리에, 아드리아나는 흠칫 놀라서 황급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전화를 받은 것은 아버지가 데려온 젊은 집사였다. 아버지는 그를 차기 집사장으로 만들 거라고 공언하며, 오랫동안 집안일을 보살펴준 늙은 집사장이나 어머니보다도 신뢰하고 가까이했다.

그에게 알려진다면 자연히 아드리아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쩌지. 어머니가 먼저 전화를 받을 일은 없을 텐데….’

리노아스에는 아직 전화기가 많이 보급되어 있지 않았다. 대부분의 공문도 서면을 통했으므로 남작의 저택에 전화벨이 울리는 일은 여간해서 없었다. 늙은 집사장이 전화를 받을 때까지 여러 번 시도했다가는 수상하게 여겨질 것이다.

‘편지를 보내면 어머니께서 먼저 읽으실 수 있을까? 아냐, 다들 내 글씨를 알아볼지도 몰라…. 그럼 미네타에게 대신 써달라고 하면…?’

그러나 만약 몰래 편지를 보낸다 해도 다른 누군가가 먼저 뜯어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아드리아나는 자신에게 오는 편지가 전부 어머니의 손을 거쳤던 것처럼, 어머니에게 가는 편지 역시 다른 누군가의 손을 거치지 않는다는 확신을 할 수 없었다.

결국 며칠 후쯤 다시 전화를 걸어보기로 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사무실을 나왔다.

*

다음 날도, 다음다음 날도 미네타는 아드리아나의 계획에 대해 재촉하지 않았다.

“난 손해 볼 것 없으니까 말이야. 앞으로 어떻게 할지 천천히 생각해 봐요. 어른 셋에 말 안 듣는 고양이들 손 빌려서 살림하는 형편인걸. 오히려 아가씨가 있어줘서 편하지.”

아드리아나는 신세 지는 미안함에 더욱 열심히 일을 도왔다. 뭐든 일하는 게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빨래 개는 것을 돕고, 어질러진 물건들을 정리하고, 아이들이 공부하는 것을 도왔다.

과연 보호사의 살림을 세 사람만으로 꾸리기에는 턱없이 힘들어 보였다. 그래도 미네타와 주방을 돌보는 아주머니, 물건을 관리하고 청소해 주는 아저씨 셋이서 자신의 가정을 보살피듯 어떻게든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누나, 오늘은 우리 음악 시간 있어요. 그리고 이따가 글자 공부도 해야 하는데, 누나는 글자 알아요?”

아이들은 경계심 없이 다가왔다. 아드리아나가 그곳에 있는 어른들 중 가장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쉽게 친근감을 느끼는 듯했다.

“애들 키워봤자 소용없어. 젊은 파릇파릇한 사람들만 좋아한다니까.”

미네타는 아이들에게 곧잘 툴툴대고 호통을 쳤지만, 아이들은 무서워하면서도 그녀를 잘 따랐다. 아드리아나의 눈에는 여자 혼자 힘으로 이 시설을 세웠다는 그녀가 누구보다 대단해 보였다.

자신도 혼자서 뭔가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아가씨. 오늘 애들한테 노래를 하나 알려주기로 했는데, 아가씨가 나 대신 좀 해줄래? 노래책은 애들한테 꺼내달라고 하면 될 거야.”

“그럴게요. 다녀오세요.”

토요일 아침에는 미네타가 일찍부터 아드리아나에게 일을 맡기고 시내에 볼일을 보러 외출했다. 아드리아나는 잘 통제되지 않는 아이들에게 끌려 다니며 나름대로 간식을 챙겨주고 함께 노래책을 찾아냈다.

“얘들아, 피아노는 어디에 있니?”

“그런 건 없어요. 이거 불 거예요.”

사내아이 하나가 때가 탄 흰색 피리를 들어 보였다. 보호소에는 피아노가 없어서 피리 소리에 맞추어 음을 잡는 모양이었다. 아드리아나는 차마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어서, 그저 정중한 태도로 아이에게 피리를 불어달라고 청했다. 그나마도 실력이 썩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냥 다 같이 엉망이었지만, 목소리들이 예뻐서 나름대로 듣기에 귀여웠다.

“아가씨, 피아노를 찾았다고 하셨소?”

루이가 공부방 문을 열고 말을 걸어왔다. 그는 50대 중반에 머리카락과 수염이 새하얀, 보호소의 유일한 남자 직원이었다.

“아, 네. 없다고 들었어요.”

“피아노를 치실 줄 아는가 보오?”

“네. 조금….”

아드리아나가 부끄러워하며 미소 짓자, 루이의 표정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그럼 혹시 기타도 치실 줄 아는가?”

“그것도 조금요. 기타가 있나요?”

아드리아나의 물음에 루이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있지. 내가 우리 아버지에게 받은 놈이 있다오. 잠깐만 기다려요, 내 꺼내올 테니.”

그는 금방 기타를 찾아서 들고 왔다. 아드리아나의 것과 같은 나일론 줄 대신 금속 줄로 된 기타였다. 주인이 어찌나 정성껏 손질해주고 있었는지, 20여 년이 지난 물건답지 않게 외관이 깨끗했다.

“난 원체 손이 곱아서 칠 수가 없거든. 몇 년 전에 줄도 갈아놓긴 했는데…. 이거 쓸 수 있을까?”

루이가 기대감에 찬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아드리아나는 기타 줄을 하나하나 튕겨 보고는, 그를 실망시키지 않아도 되어서 잘됐다고 생각했다. 조율만 해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주 좋은데요. 고마워요.”

“천만에! 도움이 되어서 기쁘구먼.”

아드리아나가 아이들의 노래 반주를 해주는 동안, 루이도 창가에 앉아서 오랜만에 자신의 기타가 울리는 것을 들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몹시도 행복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아드리아나도 기뻐졌다. 어릴 때 친할아버지 앞에서 악기를 연주해 드리며 보았던 푸근한 미소 같았다. 아드리아나의 할아버지는 아버지와 달리 말이 없고 허허 웃기만 하는 인자한 분이었다.

“미네타가 늦네….”

저녁을 먹고 치우고 있을 무렵에도 미네타는 귀가하지 않았다.

아드리아나는 설거지를 돕고 방으로 돌아와서 미네타를 기다렸다. 침대 위에 엎드려 책을 펼치고 몇 페이지째를 읽고 있으려니, 꼬마 셋이 방문을 노크하며 나타났다.

그 중 가장 큰 아이가 쭈뼛대며 부끄러운 듯 말했다.

“언니. 아까 그거 쳐주세요.”

“아까 그거?”

“기타요.”

“아….”

아드리아나는 멋쩍게 웃으며 침대를 내려왔다. 그리고 꼬마들을 침대 중앙에 앉혀놓고, 자신은 기타를 가져와서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아까 너희가 불렀던 거 다시 듣고 싶어?”

“그거 싫어. 다른 거.”

제일 어린 남자아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대답했다.

“…요녀석은 의사 표현이 확실하군.”

아드리아나는 미네타의 퉁명스러운 말투를 흉내 내며 말해서 아이들을 웃게 해 주고, 기타를 집어 들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코니스의 자장가를 연주했다. 바깥에는 노을이 내리기 시작하고 있어서, 서정적이고 잔잔한 곡의 배경으로 그럴싸하게 보였다.

“나 알아요. 이건 자장가야.”

웬디가 말했다.

“어떻게 알았니?”

“엄마가 알려줬어요.”

“나도 우리 엄마가 알려줬는데?”

아드리아나가 신기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미소 짓자, 웬디가 뿌듯한 듯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조용하게 연주하는 기타 소리가 나른하게 방 안을 채웠다. 여자아이들은 진지한 얼굴로 귀를 기울였고, 어린 사내아이는 베개를 끌어안은 채 바라보고 있다가 아기처럼 금방 잠이 들었다.

“여기서 자면 혼나는데.”

웬디가 속삭이며 말하더니, 아드리아나의 옆으로 가까이 자리를 옮겨 앉았다. 조그만 두 손이 아드리아나의 왼쪽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였다.

“아가씨, 노래는 못 해요?”

미네타를 따라하는 듯한 ‘아가씨’라는 말에 아드리아나는 풋 하고 웃는 소리를 냈다. 미네타가 부르는 ‘아가씨’라는 단어의 뜻은, 아무래도 하인들이나 영지민들에게서 듣는 ‘아가씨’와는 다른 뜻인 것 같았다.

“난 노래는 잘 못해.”

“이놈. 언니한테 버르장머리 없이 아가씨라고 하는 녀석이 누구냐.”

별안간 창문 밖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어느새 보호소로 돌아온 미네타가 창문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서 웬디를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언제 오셨어요? 늦으셨네요.”

“아. 좀 늦었지.”

미네타가 조금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대답하며 아드리아나에게 손을 들어보였다. 이내 아이들이 창문 앞으로 가더니, 창문 맞은편의 훼방꾼이 코를 붙이고 있는 자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미네타도 언니를 아가씨라고 부르면서.”

“맞아.”

“그거야-.”

미네타가 말하려다 말고 입만 벙긋거렸다. 그러다가 곧 대답을 이었다.

“나는 나고, 너희는 아직 안 돼. 아가씨라는 말은 나만큼 큰 어른들만 쓸 수 있는 말이야.”

“미네타만큼?”

“그래. 적어도 170cm는 넘어야 하지.”

“히이! 그럼 나랑 웬디는 40년은 더 커야겠네.”

“100년 커도 안 돼, 인마들아.”

미네타는 아무렇게나 내뱉고서, 건물 입구로 돌아 들어왔다.

“쯧쯧, 이거 봐. 내가 아무 데서나 자는 거 아니라고 그렇게 교육을 시켰는데.”

그녀는 잠에서 깨지 못하고 꾸물거리는 사내아이를 들쳐 안더니 나머지 여자아이들을 거느리고서 다시 방을 나갔다.

아드리아나는 미네타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평소에도 장난을 할 때조차 무표정일 때가 많은 사람이었지만, 시내에 갔다 오기 전보다 얼굴 표정이 어두워 보이는 듯해 걱정이 되었다.

게다가 자신이 아직도 ‘아가씨’로 불리고 있는 것에도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 그 이유가 다름아닌 아드리아나 자신이 이름이 기억났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감추고 있는 까닭이기 때문이었다.

본의 아니게 모두를 속이고 있다는 양심의 가책이 들었다. 아드리아나는 방의 불을 켜놓고 기다리며, 뭔가가 목에 막힌 듯 괴로워서 고민하다가 결국 미네타에게 사실을 털어놓기로 했다. 호의를 베풀어 주고 있는 그녀라면 믿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 사진 어때? 분위기 죽이지 않아?”

금방 방으로 돌아온 미네타가 문 앞에 서서 흑백 포스터 한 장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그것은 아름다운 여성의 사진이었다. 기타를 들고 창가에 앉아 있는 고운 자태에서 성인 여성의 우아한 기품과 소녀의 순수한 아름다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듯했다.

그 윤기 나는 새까만 머리카락과 내리깐 눈의 짙은 속눈썹을, 아드리아나는 감탄한 듯 바라보았다.

“아…, 무척 예쁜 사람이네요.”

“그렇지? 내가 무지 좋아하는 사진인데 운 좋게 포스터를 구해서 모셔뒀지. 이 아가씨 말이야, 론도 바깥 대륙의 유명한 여배우래. 멋있지?”

론도 밖이라는 말에 아드리아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미네타의 곁으로 다가가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론도는 여러 왕국이 모여 있는 이 대륙의 이름이다. 아드리아나는 자신이 태어난 왕국 하나는 고사하고, 영지 안에 대해서도 잘 몰랐기 때문에 론도 밖이라는 세계가 환상처럼 느껴졌다.

“그곳에도 정말로 사람들이 사는군요. 너무 멋져요, 미네타.”

“이름이 오드리야.”

아드리아나는 순간, 자신의 이름이 불린 줄 알고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미네타는 포스터를 든 채로 아드리아나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녀가 싱긋 웃었다.

“아가씨 이름으로 어때? 오드리.”

“제 이름…요?”

“계속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도 이상하고, 내일은 외출도 할 텐데 이름이 없으면 곤란하지 않겠어? 아가씨 체구가 딱 이런 느낌이라서 그런지 나의 오드리가 생각이 났어. 맘에 안 들어?”

미네타가 허리에 한쪽 손을 짚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드리아나는 그 분위기에서 진짜 이름을 알려 드리겠다는 말을 하기가 난처해졌다.

“아뇨. 너무 예쁜 이름인데….”

얼굴을 붉힌 채로 쭈뼛대자, 미네타가 어깨를 두드리며 알아서 결론을 내렸다.

“뭐, 아가씨가 여기 있어봐야 얼마나 있겠어. 잠깐인데 아무렇게나 부르면 어때. 오히려 황송한 이름인 줄 알아야 한다고. 난 사무실에 가서 정리할 게 좀 있으니까 먼저 자고 내일 봐.”

“아,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어요?”

“없어. 푹 쉬고 내일 웬디나 잘 데리고 다녀와요. 그 녀석 만만치 않을걸.”

미네타가 손을 흔들며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아드리아나는 잠시 미네타의 뒷모습을 보고 서 있다가 방문을 닫고 불을 껐다.

“오드리라고….”

예상치도 못한 새 이름까지 생겨버렸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예쁜 외모 이상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여인이었다. 게다가 이것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한 허가 한 가지가 내려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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