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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다 아름다운-5화 (5/140)

00005  리노아스 편 - 조난  =========================================================================

아드리아나는 버클리가 머무는 저택 앞을 서성이며 한참을 기다렸다. 그에게 알려야만 했다. 그의 아버지는 권위 있는 성직자이므로 어쩌면 아드리아나의 아버지를 설득해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드리아나는 안절부절못하며 나무 그림자 아래를 서성이다가, 고양이 한 마리가 수풀을 밟고 낸 작은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가씨, 아가씨.”

이윽고 카리나가 긴 치맛자락을 붙잡고 씩씩대며 쫓아왔다.

“돌아가요. 여기 계셔봤자 소용없어요.”

“버클리에게 알려줘야 해. 나중에 만나기로 했는데 내가 갑자기 없어져 버리면 얼마나 걱정하겠어.”

울먹임을 참으며 말하자, 카리나는 한마디 하려던 것을 그만두고 입을 꾹 다물었다.

두 사람은 그로부터 5분여를 더 기다리고 있다가, 저택 안쪽의 현관문이 열리는 기척을 듣고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버클리!”

버클리는 아드리아나를 발견하더니 현관 앞에 멈춰 선 채로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곁의 하인들을 의식하며 천천히 대문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겨왔다. 굳은 얼굴에는 곤혹스러워하는 빛이 역력했다.

아드리아나가 초조하게 발을 구르고 있는 동안, 그가 대문 앞까지 당도했다. 그러나 그는 바로 문을 열어주지 않고 뜸을 들였다.

“할 얘기가 있어요, 버클리.”

“약속이 있어서 빨리 가봐야 해, 아드리아나.”

“중요한 얘기예요. 지금 해야만 해요.”

“지금은 좀…. 나중에 얘기하자.”

“지금이 아니면 안 돼요. 나중 같은 건….”

나중 같은 건 없을지도 모른다고, 아드리아나는 자신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대문 창살을 붙잡고 매달렸다. 그러나 버클리는 대화는커녕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우리, 시간을 좀 갖는 게 좋을 것 같아. 너도 그렇고 나도…. 이대로는 뭔가 문제가 많다는 생각이 들어. 실은 전부터 해왔던 생각이야.”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버클리의 태도 변화는 아드리아나가 도통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룻밤 사이에 어떻게 그렇게까지 변할 수 있는지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가슴 한편으로는 어쩐지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두려워해 왔던 불분명한 상상이 현실로 드러나고 있음을 느꼈다. 그렇다고 버클리가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었다.

“저랑 얘기 좀 해요. 곧 스콰이어 공작 가에서 저를 데려가겠다고-.”

“아드리아나…. 지금은 너와 얘기할 수 없어.”

버클리가 되풀이했다.

연인이 다른 곳으로 끌려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듣고 할 말이란 게 고작 지금은 대화할 수 없다는 앵무새 같은 반복뿐이란 말인가. 언제나 자신의 별것 아닌 말에도 크게 웃어주고 쉽게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던 그가, 지금은 무관심해하며 회피하고만 있었다.

“대체 갑자기 왜 그래요, 버클리. 얘기 좀 해요. 제발….”

대문 너머에서는 아예 대답이 없어졌다. 그는 아드리아나가 빨리 포기하고 돌아가 주기만을 바라는 듯 보였다.

“그만 돌아가요, 아가씨. 어서요.”

보다 못한 카리나가 재촉했다.

“버클리….”

아드리아나는 카리나가 잡아당기는 대로 끌려가면서도 버클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얼린의 저택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드리아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자기 갈 길을 서둘렀다.

그의 앞에서 쓰러져 울고,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매달려서 바로잡을 수 있는 일이라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왠지 알 것 같았다. 이제 그를 통해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두 사람 사이에서만 존재하던 약속과 가치들이란 게 이렇게 쉽게 부정당하고 짓밟힐 수도 있는 것이었음을.

“울지 마세요, 아가씨. 저런 인간에게는 아가씨 눈물도 아까워요.”

카리나는 아드리아나를 부축해서 저택으로 돌아와 울음을 그칠 때까지 함께 있어주었다. 아드리아나는 방 바닥에 쓰러지다시피 기대 앉아서 무릎에 고개를 묻고 울었다. 카리나는 자기가 방해가 되지 않는지 한 번 묻기도 했지만, 대답하지 못하고 들썩이는 주인의 무력한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밤까지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

다음 날부터 아드리아나는 자신의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워낙 소박하게 살아왔던 터라 챙겨서 가져갈 만한 것도 적었다. 무얼 가져가든 두고 가든 큰 의미도 없을 것 같았다.

어머니는 아드리아나에게 스콰이어 가에서 몸을 조심하며 기다리라고 했다. 눈에 띄는 언행을 삼가고 조용히 지내고 있으면 뭐든 방법을 찾아내겠다고, 반드시 어떻게든 해주겠노라고,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듯한 절박한 약속이었다.

‘귀걸이….’

짐을 챙기던 중, 아드리아나는 아버지에게 받았던 보석들 중에 귀걸이 한 쌍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같은 디자인으로 된 목걸이와 반지가 세트인, 커다란 다이아몬드 귀걸이였다. 그동안 방 안에만 보관해 두었으니 분실할 이유도 없을 텐데, 어젯밤 이후로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귀한 물건일 텐데 혼나면 어떡하지….’

아드리아나는 한동안 방 안을 뒤지다가 생각을 고쳤다. 어차피 아버지는 앞으로 아드리아나가 무슨 장신구를 하고 있는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 어떤 표정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확인할 일도 없을 것이다.

예정대로라면 꿈에 부풀어 대학에 입학할 준비를 하고 있었어야 할 가을이었다.

아드리아나는 그렇게 스콰이어 가로 향하는 마차를 타게 되었다.

그리고 반나절 만에 그 사고가 일어났다.

*

갑작스럽게 연달아 몰려든 비극 앞에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절망과 두려움뿐이었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바닥도 없는 아래로 추락하게 될 줄은 몰랐다. 자신에게도 어딘가 갈 곳이 있겠지 하고 실낱 같은 희망만은 잃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장소란 게 여긴가.

아드리아나는 비바람이 휩쓴 컴컴한 숲속 낭떠러지 아래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런 식으로 마티아스의 사별한 네 번째 아내가 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부서진 마차 문 아래로 추락하는 순간, 이제 모든 것이 끝나는 듯했었지만, 커다란 충격에 머리를 맞은 듯 잠시 의식이 끊겼다가 곧 피부를 긁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깨어났다.

희미하게 젖은 풀과 흙의 냄새가 났다. 후각과 촉각이 정상으로 돌아오며 냄새와 통증이 점점 강해졌다. 뭔가 날카로운 것들이 온몸을 무자비하게 스친 듯 피부가 쓰라리고 따끔거렸다.

“아가씨! 아가씨!”

머리 위에서 카리나가 울부짖으며 찾는 소리가 들렸다.

“나 여기….”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시야 앞은 가느다란 가지와 촘촘한 이파리들로 뒤엉켜 있었다. 힘겹게 팔을 들어 올리자, 순간 누워 있는 지면이 출렁였다. 현기증 따위가 아니라 실제로 몸 아래 공간이 흔들린 것이었다. 우두둑우두둑, 나뭇가지가 잘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드리아나는 겁이 나서 그만 움직이기를 멈추고 누운 채로 주변을 살폈다. 아무래도 땅이 아닌 듯 출렁이는 자리가 불안정했다.

카리나의 목소리는 그리 높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자신은 아직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지는 않은 듯했다. 눈이 아스라한 빛에 조금 익숙해지자, 자신이 마차를 타고 지났던 길로부터 얼마쯤 아래로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

짜낼 수 있는 목소리는, 어느새 잦아든 빗소리보다도 작았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외치며 아드리아나를 찾았지만, 덤불로 가려져 바로 아래에 있는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아드리아나는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수풀이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바람이 역류하며 솟구칠 때마다 자리가 심하게 흔들거렸다. 왼팔 아래로는 아무것도 짚이지 않는 허공이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옆으로 떨어지거나, 몸을 받치고 있는 나무를 부러지게 할 것 같았다.

턱이 덜덜 떨렸다. 누워 있는 수풀에 압력을 더하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서 몸이 떨리지 않도록 버텼다. 그럴수록 마구 팔다리를 움직이고 싶어졌다.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남자들의 외침과 카리나의 통곡하는 소리가 차츰 멀어져갔다.

“안 돼, 가지 마….”

아드리아나는 사람들이 주변을 탐색하다가 다시 돌아와 주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아직 10월이 되기 전이었는데도 추위에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어머니가 기다리라고 하셨는데.’

어떤 시도도 해보지 못하고 이런 곳에서 딸이 잘못되어버리면 어머니는 얼마나 슬퍼하실까. 버클리는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슬퍼해 줄까. 아니, 그가 슬퍼하든 무관심하든 이제 와서 상관이 있으랴.

영원 같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차츰 몸이 뻣뻣하게 굳어갔다. 차가운 손과 발끝은 다시 감각을 잃었다.

바람이 윙윙대는 소리가 다시 거세졌다. 어쩌면 귀속에서 시끄럽게 울리고 있는 것은 바람 소리일지도 몰랐다. 주변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꿈이었으면. 아니, 이미 몽롱한 꿈속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희미하게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환청이라고 생각했지만, 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가까워지며 또렷해졌다. 커다란 개가 짖는 듯한 소리였다.

‘늑대? 들개인가?’

컹컹!

어느새 개 짖는 소리의 거리가 지척까지로 좁혀졌다. 돌연 마구 뛰어오는 듯한 발소리가 더해지자 마비되었던 공포심이 되살아났다. 가슴이 쿵쾅거렸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루시! 기다려, 루시!”

여자의 목소리였다.

“이 못된 녀석! 이리 오지 못해? 엉덩이를 때려줄 테다!”

여자의 헐떡이는 목소리가 개를 따라서 가까워져 왔다.

‘살려주세요….’

아드리아나의 눈가가 뜨거워지며 다시 물기가 고여 들었다.

‘살려주세요….’

하지만 역시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겨우 입을 움직였을 뿐.

“멍!”

벼랑 위에서 개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개는 크게 한 번 짖은 후 꼬리를 흔들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리와, 어서! 위험하단 말이야. 자꾸 속 썩일 거니?”

여자가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개는 우물쭈물하며 두리번거리다 결국 아드리아나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들 역시 아드리아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떠나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절망하고 눈을 감으려던 순간, 이번에는 개와 여자의 그림자가 동시에 벼랑 위에 불쑥 나타났다.

여자는 풀숲 안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으아앗! 사람이 있잖아!”

“으흑…!”

그제야 목에서 흑흑 흐느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추위와 공포에 질려서 기력을 소진한 터라, 그렇게 우는 것만으로도 진이 다 빠져서 곧 까무러칠 것 같았다.

“빠, 빨리 어떻게 좀 해 봐! 저러다 떨어지겠어!”

여자가 아드리아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자 어디선가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데.”

저벅저벅, 축축해진 흙과 풀을 짓이기는 발소리가 나고, 여자와 개의 그림자 옆에 그보다 더 큰 그림자가 나타났다.

큰 그림자는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한동안 잠자코 아래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다음 순간, 망설임 없이 미끄러운 벽을 짚고 아드리아나가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조, 조심해, 오빠.”

아드리아나는 그가 아래로 내려옴에 기겁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이제 함께 추락할 차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큰 그림자는 아드리아나와 벼랑 사이를 안정적으로 딛고 내려섰다. 풀숲 옆에 지면이라고 할 만한 공간이 있었던 듯했다. 아드리아나가 팔다리를 덜덜 떨며 안도감에 숨을 들먹이고 있는 동안, 그는 곁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다가 몸을 굽혔다.

감옥처럼 겹겹이 둘러져 있던 가지와 이파리들이 걷어내졌다. 오랫동안 아프게 굳어 있던 어깨 아래로 그의 손이 들어왔다. 커다란 손이 등을 지나서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그는 품 안에 넣은 아드리아나의 몸을 안아 올렸다..

그 안에서 무력하게 늘어지기 전의 짧은 순간, 아드리아나는 자신을 안은 존재에게서 느껴지는 체온에 울컥 그리움이 이는 것을 느꼈다. 닿은 몸으로부터 형용하기 어려운 안정감과 따스함이 번져들었다.

자신은 이런 느낌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 지독한 계절이 오기 전에 알았던 태양의 것과 닮은, 혹은 그보다 훨씬 더 전에 알았던 무언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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