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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다 아름다운-4화 (4/140)

00004  리노아스 편 -  파문  =========================================================================

버클리 때문에 걱정하던 때에는 잠이 오질 않았으나, 두려워 떨던 그 밤은 새벽이 되기 전에 잠이 들었다. 정신은 물론이고 몸의 기력마저 다 빠져서 죽은 것처럼 잠을 잤다.

*

아드리아나는 일꾼들이 아침을 시작하는 기척에 잠에서 깨어, 조심스레 방문을 열어보았다. 잠겨 있던 방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응접실로 내려가자 어머니가 아드리아나를 발견하고 아침 인사를 건네 왔다. 조금 피곤해 보이는 옅은 미소 속에, 걱정했던 것 같은 어두운 그늘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일 때문에 일찍 나가셨단다. 영지로 돌아오시려면 며칠 걸리실 거야.”

“제 방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나중에 꾸중 들으시면 어쩌시려고요.”

“괜찮아. 아버지를 배웅하면서 네게 아침을 줘야겠다고 언질을 드려봤는데 아무 말씀도 않으시더라. 안 되면 안 된다고 역정을 내셨겠지. 설마 하나뿐인 딸을 굶겨 죽이기야 하시겠니? 돌아오시면 무조건 잘못했다고 반성하고 있다고 말씀드리렴.”

어머니는 그렇게 주의를 주고, 큰일을 무사히 지나 보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집안일을 하는 하인들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아버지를 잘 아는 어머니의 말씀이니 틀림없을 것이다. 부모님의 당부를 어긴 잘못에 대해서라면 백번 잘못했으니 비는 것도 아까울 것은 없다. 하지만 버클리와의 일을 들킨 후환치고는 정도가 약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 일이 밖으로 새어나갈까 봐 조용히 묻어두고 싶으신 건지도 몰라.’

리노아스 영주로서의 체면도 있으니, 일을 크게 키워서 세간에 알려지게 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을 수도 있다. 딸에게는 반성할 시간을 주고, 자기 자신은 이성적으로 훈육할 냉정함을 되찾기 위해 아드리아나와 직접 얘기하기를 미루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 일은 어떻게 알게 되신 걸까? 설마 내가 버클리에게 보낸 편지를 들킨 걸까? 얼린이 소문을 낸 건 아니겠지. 그는 마치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내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말했어….’

얼린의 지적대로라면 저택 안의 많은 사람이 아드리아나의 비명을 들었을 것이다. 아드리아나는 부디 그런 일만은 없기를, 얼린의 말이 과장이었기를 바랐다. 버클리와의 일이 알려졌다면 앞으로 영지 안에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조차 없을 것 같았다. 가문의 수치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빨리 여길 떠나고 싶어. 기숙사 입주가 시작되는 대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말씀드려봐야지.’

아드리아나는 어머니와 점심을 먹고 난 후에 이야기를 꺼내보기로 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치고 차와 케이크가 나왔을 때, 운을 떼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각오한 것만큼 입이 금방 떨어지지 않았다. ‘어머니, 저는 여기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게 되었으니 하루라도 빨리 떠나서 살고 싶어요.’라고 말하면, 그 뒤에 남은 가족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얘, 모니카 양이 보낸 편지를 보았니? 엄마가 책상 위에 올려놓았는데.”

문득 어머니가 말을 꺼냈다. 가냘프고 섬세한 손길로 포크로 쥐고 접시 위의 케이크를 자르는 데 집중하는 표정은 평온하게만 보였다.

“아, 네. 봤어요.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모니카양이 작년부터 바넬에 있다는 건 알지? 킹스턴과는 한참 떨어져 있으니 아예 일찌감치 학교로 떠날 셈인가 보더라. 기숙사에는 9월 중순부터 입주할 수 있다고 해도 아직 텅텅 비어서 쓸쓸할 거라고 걱정하면서 말이야. 엄마 생각에는…너도 그때 미리 입주해서 모니카 양과 서로 의지하면서 학교생활에 적응해보면 어떨까 싶구나.”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즉각 반응을 보이지 못하는 아드리아나의 케이크 접시 위에 딸기 조각을 하나 덜어주었다. 아드리아나는 자신의 비겁한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뺨이 달아올랐다.

그런 딸의 반응을 의식하지 않는 듯, 어머니가 자신의 찻잔에 따뜻한 물을 채워 넣으며 느긋한 어투로 말했다.

“…말린다고 될 일이겠니. 사랑에 빠지면….”

…알고 계셨어요? 감히 물어볼 수도 없었다. 아드리아나는 그저 죄송스럽고 부끄러워서 이미 식어버린 자신의 찻잔만 응시하고 있었다. 가슴의 열도 그렇게 식는 기분이었다.

아마도 어머니는 그날, 비밀스러운 스킨십을 즐기다가 허둥대며 옷매무시를 고친 두 사람을 보았을 것이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어머니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다니. 아드리아나 자신처럼, 또는 그보다 더 순진한 어머니여서 아무것도 모르고 속아 넘어가셨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파렴치하고 어리석게 느껴졌다.

“순하게만 커온 네가 집을 떠나 고생할 일이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다만, 마침 같이 입학하게 될 모니카 양도 좋은 아가씨고, 제롬 군도 널 잘 돌봐주지 않겠니? 같은 학교에 다니는 건 아니라지만 우리보다야 그가 네게 신경을 잘 써주겠지.”

어머니는 아드리아나는 물론이고 버클리에 대해서도 신뢰하는 듯했다. 아드리아나 역시 그가 자신을 잘 돌봐줄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가 그렇게 해야만 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말로써 들은 순간, 오히려 그런 믿음이 타당한가 하는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자신들이 그런 믿음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일까. 버클리와의 달콤하고 소중했던 비밀들 역시 추잡하고 하잘 것 없는 일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아드리아나는 무의식 중에 버클리가 자신들의 일을 떳떳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왜 그런 관계를 이어왔는지, 왜 그토록 매달리고 연연해왔는지, 이제 와서 되짚어 봐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서로의 허물을 용서하고 포용해야 하는 사랑을, 버클리와 자신이 약속했기 때문에?

“그리고 당분간 선생님들은 오시지 않을 거야. 너도 늘 공부만 했으니 오랜만에 쉴 기회가 생겼다고 생각하고 실컷 쉬렴. 며칠뿐이겠지만 그것도 어디니.”

그 ‘선생님들’ 안에는 버클리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어머니는 아드리아나에게 오후 시간의 짧은 외출을 허락했다. 이미 아버지가 하인을 시켜서 가정교사들에게 수업을 쉬겠다고 알려뒀을 터이지만, 버클리에게는 아드리아나가 직접 사정을 전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준 것이다.

아드리아나는 지체하지 않고 곧장 카리나와 함께 버클리를 찾아갔다. 왠지 리디는 보이지 않았다.

친척 집에 혼자 머물고 있던 버클리는 한참 후에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둘은 인적 없는 정원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입학한 후에 다시 만나자는 아드리아나의 말에, 버클리는 알겠다고 수긍하며 포옹을 해주었다. 그는 전날 얼린의 저택에서 아드리아나를 무성의하게 배웅한 일을 두고, 말론에게 되먹지 못한 남자라는 핀잔을 들었다는 얘기도 해주었다.

“내가 아드리아나 네게 여러 가지 잘못을 많이 한 것 같아.”

버클리는 그동안 자신이 신과 부모를 기쁘지 않게 할 일들을 해왔다는 생각에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아드리아나와 떨어져서 자신의 죄를 뉘우칠 시간을 갖고 싶었다는 것도 털어놓았다.

아드리아나는 버클리가 자신에게 먼저 마음을 얘기하고 나눠주지 않은 것이 내심 서운했다. 또 자신의 그의 죄의 일부가 된 것 같아서 슬펐지만, 그를 추궁하는 일로 시간을 끌지 않았다. 그를 만나러 오기 전에 어머니와 약속한 대로,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더 이상 어머니를 걱정시키지 않는 딸이 되어야 했고, 버클리에게 어울리는 어른스러운 여성이 되어야 했다. 안달하고 초조해해서는 어느 쪽의 마음에도 부응할 수 없었다.

“보여? 카리나.”

“저긴 벌써 가을인가 봐요.”

침대 위에 늘어져서, 카리나의 무릎을 베고 창밖으로 보이는 이시스를 올려다보았다.

마다하스에서도 이시스의 풍경을 볼 수 있을지 궁금했다. 위치상으로는 투스미아와 좀 더 가까워진다. 그렇다면 이시스의 모습도 더 크게 볼 수 있게 될까?

“아가씨는 이곳을 떠나는 것이 두렵지 않으세요?”

“잘 모르겠어. 그냥 궁금하고 기대되고…. 카리나와 헤어지는 것은 슬프지만.”

아드리아나의 말에, 카리나가 환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저도 아가씨를 따라갔으면 좋겠지만, 대학에 갈 정도로 똑똑하지가 않아서 말이에요. 불편함이 없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영애들에게 하녀도 데려갈 수 없게 하다니 너무한 것 같아요. 전 마님 곁을 지키면서 아가씨께서 돌아오시는 날을 기다릴게요.”

“응.”

머리카락을 빗겨주는 카리나의 손길을 느끼며, 이제 이런 나날들과 작별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짠해졌다.

“있잖아. 버클리가 카리나가 골라준 드레스를 맘에 들어 하는 것 같았어.”

아드리아나의 말에, 카리나가 곱게 눈을 흘겼다.

“그분을 기쁘게 하려고 한 일이 아니거든요?”

“바보. 난 네 안목을 칭찬한 것뿐이야.”

마음속에 가라앉은 불안의 찌꺼기까지 비워버렸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버클리를 믿고 일상으로 돌아오려는 노력은 어느 정도의 효과를 발휘해주었다.

다음날에는 가정교사 없이 오랜만에 혼자 피아노 앞에 앉았다. 잠시 손을 풀다가, 버클리가 빌려준 레코드에 수록되어 있던 곡을 연주해 보았다. ‘반달’이라는 제목의 피아노와 첼로의 협주곡이었다. 서정적이고 유려한 첼로의 선율이 마음에 들어서 좋아하는 곡이었다.

아드리아나는 몇 번 틀리지 않고, 곧 끝까지 그럴싸하게 연주할 수 있었다.

“너무 듣기 좋아요, 아가씨. 레코드의 곡보다 더 좋은 것 같아요.”

피아노를 좋아하는 카리나는 아드리아나의 새로운 연주에 감동 받은 듯, 매일 같이 그 곡을 쳐달라고 졸랐다. 아드리아나는 기뻐하는 카리나를 보며, 버클리도 그와 같이 기뻐해 줄까 기대했다. 자신이 알려 준 곡을 연주하는 걸 보면 뿌듯하게 여겨줄 터였다.

‘빨리 만나고 싶어.’

조급해하지 않아도 시간은 금방 지나갈 것이다. 곧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그를 생각하며 애태울 틈도 없을 것이다.

*

그로부터 1주일이 지나서 클로제 남작이 영지로 돌아왔다.

아드리아나는 자신의 잘못에 자비를 베풀어준 부친에게 감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수없이 연습해보고 용기를 다지고 있던 인사를 드리러 나갔다.

“아버지, 잘 다녀오셨어요?”

“그래, 너도 잘 쉬었느냐.”

“예, 아버지. 저…많이 뉘우치고 반성했어요.”

“그래야지. 나도 그동안 네게 신경을 못 쓴 탓이라는 생각이 많이 드는구나.”

아버지의 목소리에 화난 기색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완전히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였다. 게다가 테이블 위에는 방문한 곳에서 사왔다는 선물이 잔뜩 쌓여 있었다.

“네 마음에 들지 모르겠다. 한번 보렴.”

아드리아나는 아버지의 관대함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쭈뼛쭈뼛 선물을 풀어보았다. 몇 개나 되는 상자 안에는 외출용 드레스, 모자, 보석으로 만들어진 장신구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 아버지….”

“너도 이제 어른이야. 외출도 수시로 하게 될 테고 아무래도 차림새에도 더 신경 쓰게 되겠지. 널 검소하고 바르게 잘 키웠다고 생각했다만, 딸을 하녀처럼 키웠다는 말을 듣기는 싫구나.”

외출이니 남에게 듣는 말이니, 아버지가 그 나름대로 아드리아나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아드리아나는 금방 감동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저는 이런 걸 받을 자격이….”

바로 몇 주 전에 버클리와의 일로 모두를 실망시켰는데 어찌 뻔뻔하게 이런 호화로운 선물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아드리아나는 황송해하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내 딸이라는 것이 자격이다.”

클로제 남작이 건조한 투로 말하며, 선물을 아드리아나의 앞에 챙겨주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며칠 뒤에 스콰이어 공작 가에서 올 거다.”

“스콰이어 공작…?”

왕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재력가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아드리아나는 그에 대한 몇 가지 단편적인 사실밖에 몰랐다. 그가 국왕의 형이고, 나이가 70세를 훨씬 넘었으며 아주 부유하고 두 명의 아내를 데리고 있다는 것.

“스콰이어 공작의 5번째 아들이 신부를 찾고 있단다. 조금 이르지만 이런 기회가 또 있을지는 모르는 거다. 아드리아나 네가 태어날 때 받은 점괘 때문에 우리는 늘 조심하며 너를 키웠다. 똑똑하고 참하게 잘 키웠다고 생각했지만, 이번 일을 봐도 우리가 언제까지나 널 보호할 수는 없을 것 같더구나.”

아버지는 처음 듣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았다. 아드리아나의 표정은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네가 태어날 때, 18세가 되기 전에 사생아를 낳고 인생을 망칠 거라는 안 좋은 점괘를 받았었지. 어미를 닮아서 예쁘게 태어난 게 화근이 될까 싶었다마는, 벌써 열일곱이 다 지났으니 점괘가 틀렸다는 건 증명이 되었구나.”

척추를 따라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내가 사생아를 낳는다니 무슨 뜻이지. 그건 아버지가 없는 아이를 말하는 거였던 것 같은데. 대체 지금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지. 아드리아나는 그 알아듣지 못할 말이 불러 일으키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좋은 가문에 가서 떳떳하게 잘 살거라. 대학이고 뭐고 대단한 척 떠들어봤자 공작가 정도 귀한 가문의 여자가 되는 것에 견줄 수는 없지 않니. 이제 그런 쓸모없는 것들은 잊어버려라.”

남작은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손님을 만나러 가야 한다며 그 자리를 떠나기 전, 딸에게 한 가지만을 더 확인했을 뿐이었다.

“…듣자하니 제롬군은 네가 아직 순결한 처녀일 거라고 믿는다던데, 그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해도 되겠느냐?”

아드리아나는 이번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아버지의 질문을 바르게 이해한 것인지, 버클리가 말한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불구하고 지독한 수치심이 일었다. 아버지와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곧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물론 나도 네가 착한 아이일 거라고 믿는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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