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2 리노아스 편 - 파문 =========================================================================
그가 처음으로 가슴을 쓰다듬었을 때, 아드리아나는 심한 거부감을 느꼈었다. 몸을 움츠리고 앞을 가리며 약하게 저항을 했다. 버클리는 얼굴을 붉히며 기분 좋은 듯 웃었다.
“예뻐..., 아드리아나.”
아드리아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자신의 의견을 강하고 단호하게 밀어붙여본 적이 없었다. 여성으로서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고 배웠다. 하물며 좋아하는 사람에게 싫은 내색을 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버클리는 손을 위로 미끄러뜨려 쇄골 아래를 쓰다듬다가, 그대로 슬며시 블라우스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으....”
몸을 더욱 움츠렸지만, 그는 손을 깊이 집어넣어서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드리아나는 지금까지 하녀를 포함한 어느 누구에게도 옷을 들추고 몸에 손을 대도록 허락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하고 끌려다니는 동안, 점차 그가 하는 행위에 익숙해져갔다. 그가 기뻐하며 뺨에 입을 맞춰주는 것만으로도, 아드리아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정말 네게 아무도 이런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어?”
“가르쳐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알 것 같아요. 이런 건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사이에만 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당신은 절 사랑하시는 건가요?”
아드리아나의 물음에, 버클리는 당황해 하며 웃기만 했다.
이후 다시 단둘이 되었던 날, 아드리아나는 다시 한 번 그에게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답하면 그로 하여금 자신을 만지는 행위를 그만두게 할 셈이었다.
그러나 버클리는 아드리아나를 실망시키지 않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는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아드리아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다정한 시선으로, 또한 호기심에 가득 찬 기색으로 상기된 채 다시 몸을 더듬었다.
그 날 그는 당장 아드리아나의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기에 이르렀다. 아드리아나는 여느 때보다 더 강하게 저항했다. 다리를 꼭 오므리고 고개를 흔들며 거절했다.
“시, 싫어요. 이런 건 안 될 것 같아요.”
“조금만, 아드리아나….”
“안 돼요, 버클리. 이건 싫어요.”
“정말 조금만….”
아드리아나는 그가 생각보다 고집스럽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느꼈다. 신사라면 여자가 살짝만 거절해도 물러나 주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닌가. 몇 번이나 거듭 싫다고 말했음에도 밀어붙이는 그에게 실망감이 들었지만, 의지하고 좋아해 왔던 마음이 단번에 돌아서지는 않았다.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매정하게 대하는 것도 두려웠다.
버클리는 달래고 회유하며 억지로 다리 사이에 손을 넣었다. 막상 그곳을 끈질기게 자극 당하자,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강한 쾌감이 느껴졌다. 반발심과 두려움은 곧 잊어버렸다. 아드리아나는 금방 그것을 갈구하게 되어서, 싫었던 처음의 기억마저 어렴풋하게 잊어버렸다.
이 모든 행위가 자신들의 사랑과 헌신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사랑하기에 공유할 수 있는 감각이라는 그의 말을 믿었다.
버클리는 끊임없이 달콤한 고백의 말을 속삭였고, 아드리아나는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에게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그의 애정 행각은 점점 대범해졌다. 그는 아드리아나의 모친이 아래층에 있다는 사실도 개의치 않고, 속옷을 더럽히면 안 된다는 이유로 애무 중에 그것을 벗게 했다.
“넌 정말 대단한 여자야. 내가 본 어떤 여자애들과도 달라. 도시에서는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여자애들조차 너만큼 순수하고 예쁘지가 않아.”
아드리아나는 누군가에게서 외모를 칭찬하는 말을 듣고서 그만큼 기뻤던 적이 없었다. 자신의 미모가 처음으로 자랑스럽고 뿌듯하게 생각되었다.
“도시에는 대단한 미인들이 많다고 들은걸요. 버클리, 당신이 날 너무 좋게 말해주는 거 같아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 눈에는 네가 제일 아름다워 보여.”
버클리가 아드리아나의 입술과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몸을 밀착시켰다. 아드리아나가 그의 품에 바짝 달라붙으며 몸을 비비자, 그가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며 밀어냈다.
“왜요…?”
“그런 게 있어. 남자한테는….”
버클리는 바지가 두꺼워서 불편하다고 중얼거리며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자신의 하반신을 아드리아나에게 꾹꾹 누르며 밀착시켰다.
아드리아나는 당황해서 몸을 움츠리며 뒤척였다.
“이, 이게 뭐예요?”
“이것도 선생님들이 가르쳐주지 않았어?”
그때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울렸다.
버클리는 황급히 앞을 추스르고 옷차림을 바로 했다. 그는 조금 허둥대긴 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드리아나의 어머니를 속여 넘겼다.
아드리아나는 그의 그런 태도를 보는 것에 왠지 모를 불쾌함을 느꼈다. 자신 역시 어머니를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이 일었지만, 버클리와의 일을 밝히기는 두려웠고 그를 거절해서 멀어지는 것은 더더욱 두려웠다.
“어차피 넌 내게 시집올 거잖아. 그렇지?”
“응….”
아드리아나는 그와 빨리 결혼하게 되길 바랐다. 아버지는 버클리를 반대하지 않을 것 같았고, 버클리 역시 그의 부모가 아드리아나를 반대하지 않을 거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우린 아직 학생이니까. 스스로 벌어서 자립하지 못하는 한 어른이라고 할 수 없어. 당장 결혼을 하는 건 무리지.”
“결혼을 하고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도 있는 걸요. 우리 부모님도 그렇게 하셨다고 들었어요.”
“남작님은 일찍 가문을 물려받으셨잖아? 아직 장래가 정해지지도 않았고 소득이 없는 나와는 달라. 난 대책 없이 결혼해서 부모에게 기대 사는 그런 꼴사나운 짓은 하고 싶지 않아.”
아드리아나는 그가 어른스러운 사람이라서 자신보다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사람이 한 가족이 된 후에 함께 성장해나가는 것이 뭐가 꼴사나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혼해서 평생을 함께할 사이라면 지금 결혼하는 것과 나중에 결혼하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두 사람은 부모에게 기대지 않아도 생계에 어려움을 겪지 않을 터였다. 학비는 장학금을 받을 것이고 생활비는 과외를 하면 해결될 테니까. 아드리아나의 피아노 실력은 수준급이어서, 지금도 고액의 과외비를 지불하고 아이의 지도를 부탁하고 싶다는 부인들이 많았다.
자신이 현실을 모르고 철없이 무책임하게 결혼을 조르는 것일까.
그렇다면 버클리는 어떤 완벽하고 훌륭한 미래를 보고 있는 걸까.
“아드리아나. 너와 둘만 더 오래 있고 싶어. 더 기분 좋은 일도 하고 싶고.”
“어떤 건데요?”
“여기선 가르쳐 줄 수가 없어. 내 말을 들어줄래?”
“어떤 건데요?”
아드리아나는 내심 불안해져서 거듭 되물었다. 버클리가 상기된 표정을 하고 속삭일 때에는 그의 평판에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떠올리고 있기 마련이었으므로.
“화요일날 얼린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갈 수 있겠어?”
“부모님께서 허락해 주시지 않을 거예요.”
“하녀들을 데리고 간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명문대 학생들도 많이 어울리는 건전한 사교 모임이야. 다른 사람도 아닌 얼린이라고. 어른들도 싫어하실 리 없지. 우리는 적당히 어울리다가 둘이서 빠져나오자.”
“그런 건….”
“아드리아나. 너와 둘이서 오랫동안 같이 있고 싶어. 이렇게 고작 몇십 분이 아니라 몇 시간이라도 같이 있어보고 싶어. 난 곧 킹스턴으로 돌아가야 해.”
버클리가 그렇게 애원하자, 아드리아나는 매몰찬 거절의 말을 입에 올리지 못했다. 자신도 그와 같이 있고 싶었다.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그의 마음이 떠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한번 말씀드려볼게요.”
결국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
“얼린 경이 여는 사교 모임이라니. 누구랑 같이 가기로 한 거냐? 그런 곳까지 부모를 데리고 가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을 텐데. 보호자가 되어줄 만한 사람이 있는 게냐?”
클로제 남작은 뜻밖에도 부정적이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아마 버클리 선생님이랑… 레이나 양도 가신다는 것 같아요.”
아드리아나는 속으로 가책을 느끼면서도, 평소 아버지에게 후한 평가를 받는 두 청년의 이름을 거론했다. 거짓은 아니었다.
이내 아버지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그렇군. 그 두 사람이 있다면야. 너를 잘 부탁한다고 인사를 해 놔야겠구나.”
선뜻 허락이 떨어졌지만, 아드리아나는 오히려 본격적으로 긴장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있는 자리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로부터 쏟아지는 시선과 관심은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아드리아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오직 연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얼린의 저택으로 향했다. 전날 카리나가 골라준 단정한 원피스를 입고, 또래들이 하는 것보다 옅은 화장을 하고서였다. 동행한 하녀 리디의 화장은 아드리아나보다 더 짙어보였다.
마차가 얼린이 거주하는 저택 앞에 멈췄다.
기다리고 있던 일꾼들이 아드리아나를 안으로 안내해주었다. 아드리아나는 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눈동자를 바쁘게 움직이며 버클리의 행방을 찾았다.
널따란 응접실 안에 삼삼오오 무리지어서 차려진 음식을 즐기며 토론을 벌이는 청년들이 보였다. 저택의 임시 주인인 얼린은 피아노 옆에 서서 느슨한 태도로 샴페인을 홀짝이고 있었다. 그는 여러 명의 청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는데, 바로 그 곁에 버클리의 모습도 보였다.
“왔어?”
버클리가 아드리아나를 발견하더니 뺨에 다소 힘이 들어간 듯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아드리아나는 주변의 시선이 자신들에게로 향하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살짝 수그렸다.
“사람이 많네요. 다들 저보다 나이도 많아 보여요.”
“다들 대학생이거나 졸업생이니까. 몇 달만 지나면 너도 똑같아질 거잖아.”
버클리는 아드리아나를 기다란 테이블 한쪽으로 데려가서, 옅은 사과색 샴페인 한 잔을 들려주었다.
“이건 알코올이 거의 들어 있지 않아서 괜찮을 거야. 술 잘 못 마시지?”
“네. 고마워요.”
아드리아나는 향긋한 샴페인으로 목을 축이며 긴장을 풀었다. 버클리는 아드리아나의 옷차림이 마음에 드는 듯, 곁에 서서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저녁 시간 지나서 들어갈 수도 있다고 말씀 드렸어?”
“네. 7시 전까지는 들어오라고 하셨어요.”
“곧 말론도 올 거야. 오늘은 리디에게 줄 선물이 있다던데.”
버클리의 말에 리디의 동공이 확장되는 듯 보였다. 하녀장이 아드리아나의 곁에 꼭 붙어 있으라고 신신당부했던 만큼, 리디가 오늘도 자리를 피해 줄지는 미지수였지만.
“사람들이 적은 곳에 가서 앉고 싶어요….”
아드리아나가 한적해 보이는 테라스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버클리는 낯선 표정으로 주변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조금만 이따가. 인사를 해야 할 사람들이 있어서 말이야. 리디랑 같이 여기서 기다려. 금방 돌아올게.”
그는 다소 산만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한 무리의 청년들이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떠나갔다. 홀 중앙에 자리한 대학생 무리 속에 레이나의 모습도 보였지만, 그녀는 아드리아나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아드리아나는 낯선 곳에 리디와 둘만 남겨진 것에 불안해졌지만, 당황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애쓰며 조용히 구석자리를 지켰다.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시선이 불편했다. 모두들 아드리아나를 쳐다보며 귓속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교에 한 번도 나와 본 적 없는 풋내기라서 비웃는 것일까. 무의식중에 뭔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도 한 것일까. 아드리아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버클리가 홀 안에서 모습을 감췄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욱 혼란에 빠졌다.
‘어디 간 거지? 나만 두고….’
방황하던 아드리아나는 입구 바깥에서 버클리를 발견했다. 그는 홀 안으로 들어오려다, 그때 막 저택으로 들어오는 아가씨들에게서 시선을 받고 멈추어 섰다.
“어머, 제롬…. 돌아와 있었네.”
“아, 오랜만이다.”
먼저 인사를 건넨 아가씨나 버클리나 표정이 부자연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드리아나가 나서지도 못하고 쭈뼛대고 있는 동안, 어느새 버클리가 곁으로 돌아와서 어깨를 감쌌다.
“기다렸지? 이리 와.”
그는 발걸음을 빠르게 하며 아드리아나를 데리고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밟았다.
“누구예요?”
“그냥 같은 학교를 다녔던 친구야. 아, 말론, 여기!”
때마침 들어온 말론에게 리디를 보내주고, 버클리는 아드리아나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자리를 비켜줄까 걱정했던 일이 무색하게도, 리디는 말론이 들고 있는 요란한 선물 포장을 보자마자 탄성을 지르며 떠나버렸다.
아드리아나는 버클리를 따라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마음대로 들어와도 괜찮은 거예요?”
“괜찮아. 얼린은 자기 침실만 아니라면 어디서 누가 뭘 하든 신경 안 써.”
버클리의 석연치 않은 표현을 흘려 넘기며, 아드리아나는 그의 옆에 앉았다.
둘이 되었으니 보고 싶었다는 말을 듣거나, 앞으로 떨어져 있는 몇 주간의 계획에 대해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클리….”
작게 이름을 부르자, 그가 미소 지으며 아드리아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입을 맞추었다. 그의 혀가 입속으로 들어오자 저도 모르게 어깨가 굳었다. 아드리아나는 눈을 질끈 감고서 버클리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