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1 리노아스 편 - 파문 =========================================================================
덜컹 덜컹, 자갈길을 지나며 마차가 심하게 흔들렸다.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일반 마차로는 도무지 지나오지 못할 만큼 길이 안 좋은 곳도 더러 있었다.
어느덧 리노아스를 빠져나온 것인지도 몰랐다.
아드리아나는 창밖을 확인해보지 않았다. 바깥의 풍경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자신은 풍경을 들여다보아도 그곳이 고향 리노아스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제 다시는, 지난 17년의 시간 대부분을 보내온 자신의 방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절망인지 희망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 이외의 것을 생각하기 어려웠다.
오늘 아침, 스콰이어 가에서 마차를 3대 보내왔었다. 공작의 다섯 번째 아들인 마티아스에게 새 신부를 실어 보내기 위한 것이었다. 화려한 고급 마차의 육중한 무게감과 그 안에 가득 들어찬 선물들의 것까지 더해져서 아드리아나의 어깨를 짓눌렀다. 구름이 가득 낀 흐린 하늘도 머리 위로 가라앉으며 압박감을 더했다.
아드리아나는 온갖 보석으로 치렁치렁하게 치장하고 서서 스콰이어 가의 종들을 맞이했다. 최대한 비싸 보이도록 포장해서 내놓은 클로제 남작가의 물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마티아스에게는 보낼 수 없어요. 절대로 안 돼요.
어머니는 생전 처음으로 남편에게 큰 소리를 냈었다.
-아드리아나를 첫 번째 부인으로 들이겠다고요? 죽은 부인이 셋이니 살아있는 아내 중 첫 번째라고 해야 정확하겠죠. 저 애를 네 번째로 만들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연인이라고 믿었던 사람은 그 후, 아드리아나의 매달리는 눈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평생토록 모르고 살아왔던 불행이란 것이 줄줄이 덮쳐왔다.
-마티아스 경이 좋은 사람일 수도 있을 거야. 어쩌다 연달아서 아내를 잃은 가엾은 사람일 뿐인지도 몰라.
자포자기해서 했던 말에 대꾸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말했던 자신의 안에서조차 희망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차는 습한 바람을 뚫고 거친 길에 흔들리며 나아가다, 서서히 매끄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대로 몇 시간을 더 달려서 몇 개의 영지를 지나고 침침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영지의 경계가 되는 관문마다 멈추어 서는 것에, 아드리아나도 지역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겨우 알 수 있었다.
'외가로 도망쳐서 숨겨달라고 할까. 바다를 건너려면 배를 타야겠지.'
어머니의 고향은 바다 건너에 있는 왕국이었다. 그곳에 있는 외가를 찾아가면 자신을 보살펴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번도 가본적 없는 외가를 찾아갈 수 있을까? 차라리 스콰이어가 아드리아나의 어머니의 출신을 캐내서 추적해 오는 편이 더 쉬울지도 모른다.
‘어딘가 갈 곳이 있을 거야.’
눈을 감고, 문득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나라, 투스미아를 떠올렸다.
늘 멀리서 바라보고 자라왔던 거대한 이시스의 숲이 있는 왕국. 무서운 거인들이 지키는 땅이어서, 그 어느 왕국도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동화를 본 적이 있었다. 그곳 어딘가의 깊은 숲속에 숨어버리면, 스콰이어도 아버지도 아드리아나를 찾아내지 못하리라.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꿈같은 생각일 것이다. 방년 17세가 되도록 집 밖에 혼자 나가본 일조차 없는 여자가 무슨 수로 국경을 넘고 이시스를 찾아낸단 말인가.
이 순간에도 스콰이어 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갈 곳이라고는 그곳뿐인지도 몰랐다. 그 사실이 숨통을 조여 왔다.
아드리아나는 젖어드는 두 뺨을 손수건으로 지그시 누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마차 안에는 혼자뿐이었다. 함께 가게 된 하녀는 다른 마차를 탔고, 나머지 마차에는 아버지가 보내는 예물이 가득 실려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어머니께 편지를 쓰게 해달라고 해야지. 어쩌면 전화를 쓰게 해줄지도 몰라.’
애써 스스로를 다독여 봐도 마티아스에 대한 두려움과 배신한 연인에 대한 분노, 어머니에 대한 걱정이 심장을 옥죄었다.
그럼에도 아직 절망할 수 없었다. 언제나 희망만 알고 살아와서 절망하는 것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했다. 비단 배우지 못한 것이 그 뿐만은 아니었으나.
어느덧 거세진 바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차창의 커튼을 살짝 걷어보니 시커멓게 물든 하늘이 보였다. 흡사 세상의 끝을 향해 달리고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뒤따르던 마차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폭풍이라도 올 것 같아! 젠장.”
마차가 요란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뭔가가 부딪쳐 오는 소리도 났다. 아드리아나는 마차 한구석에 앉아 몸을 웅크렸다.
“먼지 때문에 앞이 잘 안 보여! 돌아서 내려가야겠어!”
“안됩니다! 폭이 좁아서 마차를 돌리기 어려워요! 올라가다 보면 산장 앞에 빈터가 있어요! 거기서 쉬는 게 낫습니다!”
계속해서 나뭇가지며 돌멩이 따위가 날아와 마차를 두들겨 댔지만, 일행은 멈추지 않고 달렸다. 조금 전까지는 스콰이어 가에 가는 것이 그토록 두려웠던 아드리아나였지만, 이제는 무사히 그곳에 도착하기만을 바라는 심정이 되었다.
굉음이 된 바람 소리, 물체들이 부딪쳐대는 소리, 쇠 갈리는 듯한 불길한 소리 따위가 이어지다가 돌연 마차가 멈춰 섰다.
“아가씨…!”
카리나의 비명이 울린 것과 동시에 말들이 사납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바로 앞쪽에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말 울음소리가 뒤섞이며 난무했다.
그러다가 왜인지 소리가 점점 아래로 멀어져갔다. 크게 물보라 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일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아드리아나는 밖을 내다보려고 머뭇거리며 창가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다 자신이 탄 마차가 느리게 뒷걸음질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끄러지는 속도가 빠르게 가속했다.
“아…!”
마차가 기울며 문이 부서지듯 벌컥 열렸다.
안으로 물기가 튀어들었다. 하나 둘, 얼굴에 달라붙는 물방울의 수가 늘어났다. 아드리아나는 당황하여 창가에 매달린 채 손바닥으로 얼굴의 물기를 훑어냈다.
문을 닫으려고 한 순간, 갑자기 반대편 문으로 고꾸라졌다. 마차가 뒤집어져서 땅바닥을 향하게 된 문에 등을 심하게 부딪치는 바람에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충격으로 꼼짝 못하고 가쁜 호흡만 몰아쉬며, 천장을 향해 뚫린 문을 통해 컴컴한 허공을 응시했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하아… 하….”
귓전에는 자신의 숨소리와 온통 비바람 소리뿐이었다. 잠시 후 그 틈을 뚫고, 마차가 삐걱대는 소리가 교묘하게 신경을 긁기 시작했다.
아드리아나가 다시 몸을 일으켜 보려던 순간이었다. 덜컥, 등을 받치고 있던 문이 열렸다.
바닥에 위치한 문이 어떻게 열린 건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순식간에 몸이 허공으로 가라앉았다.
#1.리노아스 편 - 파문
후텁지근한 여름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빗소리를 듣고 눈을 반짝 떴다. 소파에 앉아서 기타를 끌어안은 채 잠깐 졸았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그날따라 자신의 나일론 줄을 튕기는 소리가 몽롱하게 들렸던 듯도 했다.
기타를 내려놓고 일어서서 창가로 다가갔다. 방 안에 유일하게 나 있는 그 작은 창문은 자신의 키보다 높은 곳에 뚫려 있어서 저택 아래의 풍경이 보이지 않았다.
창문 아래에 의자를 놓고 조심스럽게 위로 올라섰다. 창밖이 온통 뿌옜다. 부슬비가 피워내는 연기 같은 아지랑이가, 멀리 보이는 이시스 산꼭대기의 모습마저 가려놓고 있었다.
비도 좋아하니까 상관은 없었다. 날이 화창한 밤에는 이시스 위에 걸린 달을, 흐려서 비가 오는 날에는 나른한 빗소리를, 드물게 추워져 눈이 내리는 겨울에는 희게 빛나는 하늘 풍경을 즐기는 나름대로의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잠시 밖을 바라보다가 의자 등받이를 짚으며 내려왔다. 평소라면 결코 하지 않을 교양 없는 행동이었다. 방에서 저택 바깥 풍경이 어떻게 보이는지 딱히 관심도 없었다. 다만, 이제 이곳을 떠날 날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한 번쯤 보아두고 싶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가을이 되면 이곳 리노아스와도 작별해야 했다. 몇 달 전에 원서를 넣었던 킹스턴 대학에서 인증한 입학 허가서가 바로 어제 아드리아나의 손에 들어왔다. 그래서 10월이 되기 전에 대학의 분교가 있는 마다하스로 떠나야 하게 되었다.
마다하스도 리노아스만큼 좋은 곳일까? 어쩌면 더 좋은 곳일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그럴 것 같았다.
아드리아나는 대학과 마다하스에 관한 행복한 망상에 빠졌다. 평생 외출이라고는 거의 해보지도 못하고 자신의 방 안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 소녀가 이제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들뜨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언젠가 연주자가 되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딸이 많은 사람 앞에 나서야 하는 직업을 갖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테니 학자가 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학생을 가르치는 일도 좋을 것 같았다.
“아가씨, 아직 안 주무세요?”
하녀 카리나가 문틈으로 얼굴을 내밀고 물었다.
“금방 잘 거야. 카리나, 잠깐만 들어와 봐.”
아드리아나가 동갑내기 하녀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는 그녀뿐이었다. 카리나는 저택에 처음 왔던 날, 이 작은 방과 작은 창문을 보고서 감옥 같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아드리아나는 카리나가 좋았기 때문에 그 일을 섭섭하게 여기지 않았다.
대학에 가려면 카리나와도 헤어져야 했다. 그것이 더욱 서운한 일이었다.
“노래를 불러줘, 카리나. 자장가.”
배시시 웃으며 말하자, 카리나가 눈을 흘겼다.
“그래요, 아직 열일곱 살 밖에 안 된 아기씨.”
아드리아나는 침대 위로 올라가서 자신의 배 위에 두 손을 포개고 누웠다. 카리나가 머리맡에 앉아서, 자신이 가르쳐준 코니스의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아주 어릴 때, 어머니에게서 배운 노래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드리아나가 네 살이 지난 후로 노래를 불러주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다가, 문득 창밖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빗소리가 들리고 있음에도 왜인지 이시스의 푸른 숲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마다하스에서도 이시스가 보일까?’
꿈속에서 아드리아나는 마다하스가 아닌 이시스를 향해 떠났다. 어릴 때는 좀 더 자주 꾸었던 꿈이었다. 계절은 항상 산꼭대기에 흰 눈이 수북이 쌓인 겨울이었다. 주변이 온통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산, 호수, 사람들….
그리고 그곳에서 아드리아나는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다. 그의 손을 잡으면 여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커다란 기쁨이 차올라서 눈시울과 가슴속을 뜨겁게 적셨다. 그의 품에 안기면 현실에서는 결코 알았던 적 없는 저릿한 열정이 느껴졌다.
영혼의 틈과, 아직 알지도 못했던 뜨거운 육체의 갈망을 채워줄 사람이 그임을 알 수 있었다.
내 운명이 여기에 있어.
너무나 행복해서 영원히 잠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에는 정체 모를 그리움만 남았다.
***
“제롬 군은 요즘 보기 드문 대단한 청년이야. 일주일에 예배를 세 번씩 꼬박꼬박 드리지. 게다가 용돈 받던 어린 시절부터 빠짐없이 십일조를 해왔어. 버클리 부부의 고결한 성품과 신분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야.”
기숙사 입학을 한 달 앞둔 9월이었다.
클로제 남작은 지난 8월에 새로 들인 딸의 가정교사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생전 처음으로 딸에게 남자 가정교사를 들일 정도로. 최근 이국의 새로운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더니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과연 아드리아나의 눈에도 버클리는 무척이나 신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는 세상의 그 어떤 존재보다도 신을 더 사랑한다고 말했다. 아드리아나는 종교를 갖지 않았고 신학에 대해 배워보지 않았기 때문에 본 적도 없는 존재를 그 정도로 믿고 사랑한다는 것이 여간 신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때, 실례인 줄도 모르고 이렇게 질문했다.
-그럼 선생님은 부모님보다도 신을 더 중요하게 여기시나요?
-더 중요하다는 건 적절한 표현이 아니지만, 굳이 선택하라면 신을 선택할 겁니다. 물론 제게 부모님은 무척 소중한 존재들이시지만, 최우선은 늘 한 분이어야 합니다.
아드리아나는 더욱 놀라워져서 다시금 물었다.
-부모님께서는 그 사실에 대해 서운해하시지 않나요?
-부모님께서도 제가 그러길 원하십니다.
-선생님은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신을 어떻게 그렇게까지 사랑하게 되셨나요?
버클리는 이번에는 조금 망설이는 듯했다. 그리고 얼마 후,
-부모님에게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하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아드리아나의 의아함을 명쾌하게 풀어주지 못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의 신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다. 그가 난처해하는 기색을 보였던 까닭에, 그리고 무절제한 지식의 탐구를 삼가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지켜야 했던 까닭이었다.
버클리는 그 후 일주일에 두 번씩 저택을 찾아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아드리아나에게 여러 유용한 지식들을 가르쳐주었다.
그는 금방 아드리아나의 호기심 많은 천성을 깨닫고서, 자신이 담당한 과목 이외에도 킹스턴에서의 생활과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들 따위에 관해 들려주었다. 가끔은 도시에 사는 이들의 어떤 타락한 생활에 대해서도 들려주었는데, 그런 이야기들은 아드리아나에게 정서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아드리아나는 기분이 나빠졌지만, 버클리 덕분에 도시의 타락을 미리 경계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인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께서 버클리 선생님에게 과목 외의 것들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주의 주는 것을 잊으셨나 봐.’
아드리아나는 버클리에게서 들은 내용을 아무에게도 옮기지 않았다. 그렇게 둘이서만 공유하는 비밀들이 늘어갔다.
처음 느끼는 종류의 흥분이 시간을 메워나갔다.
아드리아나는 그때까지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과 시, 그 밖의 다른 감성적이거나 지적인 주제를 가지고 누군가와 교감해볼 기회가 없었다. 어머니나 다른 가정교사들, 하녀들과는 공유해볼 수 없던 즐거움이었다. 또한 처음으로 남성과 그토록 많은 대화를 나눈 셈이었다.
-제가 좋아하는 곡들을 아드리아나 양에게도 들려 드리고 싶군요. 다음에는 클로제 부인께 허락을 맡아서 레코드를 전해 드릴게요.
버클리는 종종 도시에서 접해온 음악이나 책을 추천해 주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 중의 일부는 아드리아나의 마음에도 쏙 들었다.
-이번에 여자 기숙사를 새로 지었는데 상당히 훌륭해요. 아드리아나 양이 우리 학교에 들어오게 되면 소개시켜주고 싶은 친구들이 있어요. 킹스턴에는 재미있는 친구들이 정말 많아요.
아드리아나는 킹스턴에 가는 것이 몹시 기다려졌다. 생각만 해도 들떠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제 그녀는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이시스 산을 바라보고 평온하게 명상하는 대신, 버클리가 빌려준 책을 읽고, 그가 빌려준 음악을 들었다.
-이건 요즘 유행하는 곡이야. 학교 식당에서도 이 노래를 틀어 놓는다니까. 가수가 노래를 부르면서 이런 춤을 추지.
-아하하. 그건 뭔가 징그러워요.
-뭐? 왜 눈을 가리는 거야. 정말로 이게 재미있지 않다고?
버클리는 가끔 아드리아나를 곤혹스럽게도 했지만, 대체로 즐겁게 해주었다. 그는 아드리아나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아는 똑똑한 사람 같았다.
-‘선생님’은 너무 어색하지 않아?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데. 신분으로 치면 아드리아나 양이 나보다 위야. 옛날이었으면 그랬겠지.
-그럼 함부로 이름을 부르란 말이에요? 선생님을 그런 식으로 부르다니, 난 그게 더 어색한걸요.
그러나 아드리아나는 얼마지 않아 그를 ‘버클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녀는 곧 그가 좋아졌다.
***
“이번 노래는 어땠어? 마음에 들었어?”
버클리가 의자를 아드리아나의 곁으로 당겨 앉으며 물었다.
그와의 10번째 수업 날이었다. 지금쯤 하녀 리디는 그와 함께 온 친구 말론을 따라가 정원 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터였다.
“이번에 주신 건 정말로 마음에 들어요. 지금까지 들은 곡들 중에 제일 좋았어요.”
아드리아나는 버클리가 바짝 다가오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이것도 반복 학습된 행위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까. 수업에 대한 것은 금세 잊어버렸다. 그리고 기대감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들어서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런 밴드 음악을 좋아할지는 몰랐는데. 너란 여자는 정말 모르겠다니까.”
버클리가 웃으며 아리송한 말을 했다. 아드리아나는 그의 앞에서 의뭉스러운 태도를 보이거나 거짓말을 해본 적도 없는데 이상한 말이었다. 그를 신뢰하는 만큼 자신의 거의 모든 것을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전 별로 어려운 여자가 아니에요.”
부끄러워하며 그렇게 말하자, 버클리가 당황한 듯 묘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뭐….”
그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이내 은밀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가 고개를 기울여 아드리아나에게 입을 맞췄다. 아드리아나는 눈을 감고 그의 허리를 안았다.
지난 몇 번의 만남에서 두 사람은 만난 날짜의 수보다 더 많은 입맞춤을 나누었다. 사실 타액을 섞는 행위에는 익숙해질 것 같지가 않았다. 그저 버클리가 자신을 원한다는 것, 체온을 맞대고 애정을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기뻤을 뿐이었다.
버클리의 미끌거리는 혀가 입안을 허우적거리는 동안에, 아드리아나는 그의 몸을 껴안고 그의 마음을 느껴보려 노력했다. 어쩐지 그가 이런 행위를 통해 진정으로 행복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그의 숨결은 행복과 애정으로 들뜬 아드리아나의 것과 달랐다.
그는 왜 이런 행위를 하는 걸까. 어떻게 이런 행위를 알게 된 걸까.
둘의 관계가 비밀스럽게 변한 것은, 아드리아나가 킹스턴에 가는 것을 더욱 고대하게 된 이유를 말해준 후부터였다. 바로 ‘버클리가 킹스턴에 있기 때문’이라는 그 사실 말이다.
아드리아나는 그가 좋았고 오랫동안 함께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모든 면과 모든 행동이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싫은 내색을 했다가 그에게 미움 받고 혼자 남게 될까 봐 겁이 났다.
“아드리아나, 네가 빨리 킹스턴에 왔으면 좋겠다.”
버클리가 입술을 떼고서 아드리아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드리아나는 입술을 앙다문 채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격한 아버지의 품을 벗어나게 되면, 그와 더 자주 만날 수 있게 될 거라는 사실을 그녀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아드리아나의 몸에 더 뜨거운 애정을 표현해주게 되리라는 것도.
공부는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몇 주를 속절없이 흘려보냈다.
버클리가 처음 입맞춤을 해온 날이 아주 오래 전의 일 같아졌다. 그것은 세 번째 만남에서였다. 그는 그날 처음으로 아드리아나의 입술에 키스하고, 그 다음 방문 때에는 입술 대신 목덜미에 입을 맞췄었다. 그리고 또 그 다음 주에는 그녀의 가슴과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 작품 후기 ============================
초반 몇 화 지나면 분위기 곧 밝아집니다. 잔잔한 힐링과 성장기 그리고 꿀 떨어지는 로맨스가 이어집니다. 로맨스 외 내용에 많이 약한 분이라면 '기로'편(36화)부터 보시다가 마음에 드시면 앞으로 돌아와서 정주행하셔도 괜찮을 듯합니다. 초반부터 계속 남주와의 만남과 중요 복선이 다수 등장하고, 전부 읽으셔야 이해하실 수 있는 부분도 많으므로 가급적 정주행을 권해 드립니다.uu
추코평 남겨주시면 큰 힘이 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