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외전 3. 당신을 기억하는 법3—3화.
대수는 놀란 채로 굳어 한참 말이 없었다. 싸한 정적에 민망해진 설이 허둥거렸다.
“뭐, 뭐……. 반응이 있어야지?!”
“……뭔 말을 더 해.”
이윽고 고개를 휙 돌린 대수가 작 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살짝 보이는 귀가 붉어져 있었다.
“어, 그, 그런가?”
난감해하던 설이 물었다.
“그, 그런데 보, 보통 사, 사귀면 뭐, 뭘 하지?”
절로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바보처럼 느껴져서 설이 눈을 질끈 감고 자책했다.
그렇지만 정말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오빠들이랑 망상 연애야 많이 해 봤지만…….’
실제 연애는 또 처음이라…….
대수가 설을 돌아보며 말했다.
“누구 한 번도 안 사귀어 봤어?”
“으응……. 이제 뭘 하면 돼?”
“나도 모르지.”
담백한 대수의 대답에 설이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연애 못 해봤을 것 같았어.”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건데?”
“응, 그렇겠지.”
눈이 가늘어진 대수의 표정을 보 고 웃음을 터뜨린 설이 아, 탄성을 내뱉더니 들고 있던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꺼낸 건, 대수에게 양도하려고 마음먹었던 특별 외전이었다.
“나 이거 어제 다 읽었어. 너 읽으 라고 가져왔는데, 음……. 다시 안 돌려줘도 괜찮아. 그냥 너 가져.”
책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대수의 표정은 어쩐지 난감해 보였다.
“대수야?”
“어, 어…….”
이내 떨떠름하게 책을 낚아채듯 가져간 대수가 제 가방에 그것을 숨기듯 구겨 넣었다.
재빠른 몸짓에 설은 생각했다.
‘하대수……. 진짜 이 소설 팬인가 보구나.’
고민하던 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대수야, 웬만하면 완결 딱 지 붙은 뒤에 나오는 비하인드 스토리는 안 읽는 거 추천해. 얼른 덮어버려.”
“……왜?”
“스포 해도 돼?”
“상관없어.”
“작가님이 가이오니아가 아직 살 아있는 것처럼 찝찝한 뉘앙스를 남 겼지 뭐야. 다 읽고 뭐 안 닦은 기 분이었어.”
책 내용을 모르니 무슨 말인지 이 해할 수는 없었지만, 대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끝부분만 아니었으면 완벽 했는데 좀 아쉽더라. 다들 나처럼 생각했는지 리뷰창이 난리가 났더 라고. 작가님 속상하실까 봐 어제 메일 한 통 보내긴 했는데…….”
어느새 다시 대수와 나란히 앉은 채로, 설은 계속 조잘거렸다.
“아! 그래도 그거 빼고는 다 괜찮 았어. 헤헤……. 결국 록사가 앤한 테 고백을 했는데 말이야…….”
노랫소리처럼 귓가에 부드럽게 감 기는 목소리를 들으며, 대수는 이따 금씩 고개를 끄덕이거나 피식 웃어주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몰라도, 그 목소리가 참 듣기 좋다고 생각하면서.
***
— 작가님, 진짜 수습 안 하실 거예요?
〈남주의 엄마가 되어버렸다〉저자 실버라이트는 아침부터 걸려온 담당자의 전화에 할 말이 없었다.
— 제가 분명히 출간하기 전에 이 거 난리 날 거라고 말씀드렸죠?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 다…….”
특별 외전 마지막에 끼워 넣은, 최종 빌런 ‘가이오니야’가 여전히 살 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찝찝한 암시에 구매자들의 반발이 심각했다.
— 하아……. 일단은 다음 특별 외 전 출간 일정 잡아둘게요. 거기에서 어떻게든 수습하세요. 완전히 죽었 다는 거 확실히 보여주시면 되니 까…….
“그건 안 돼요.”
— 안 되다니요? 지금 이 난리가 났는데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정말 안 돼요. 전 지금까지 그 소설에 사실만을 썼는 걸요. 제가 아는 사실은 ‘데보라가 가이오니아의심 장을 파괴했고 그가 자취를 감췄 다’는 것까지예요. 특별 외전 마지 막에 남긴 비하인드는 그냥 제 개 인적인 의문이었고요.”
— ……저기요, 작가님?
“소설로 다 옮겨 놓고 나니까 궁 금해지더라고요. 가이오니아의 소멸 은 진짜 소멸이었을까? 프로크레아토르도 가이오니아를 처음 죽여 봤을 텐데, 과연 그의 계획에 정말 허점이 하나도 없었을까? 가이오니아는 확실히 사라진 게 맞을까?”
—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작 가님이 아시겠지!
“저도 그것까진 모른다니까요?”
— 아니, 작가님이 모르면 누가 알 아요? 지금 수습하기 귀찮아서 이 러시죠? 이상한 소리 그만하시고, 빨리 가이오니야 시체를 보여주시 든가 어쩌시든가 하세요.
“담당자님, 누누이 말씀드리지만전 그 소설에 거짓을 조금도 섞을 생각이 없어요. 그 소설은 다 사실이고 전 제가 아는 것만 썼어요.”
‘소설이 사실’이라는 표현은 대체 뭘까?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랑 비슷한 표현인가?
— ……꿈에서 보셨다면서요. 전생 에서도 작가였다고 막…….
“네. 꿈에서 본 사실이에요.”
—…….
수화기 너머의 담당자는 말이 없 었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뻔히 짐작이 갔다.
‘난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정신 나간 작가의 담당이 됐을까…….’
— 일단은 알겠습니다, 작가님. 제 가 생각하기에 출간보다는 치료가 먼저인 것 같습니다. 내일쯤 병원 예약하고 찾아뵐 테니까…….
뚝.
실버라이트가 피곤한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정말 사실만을 썼고 한 치의 거짓도 기록하고 싶지 않았다.
가이오니아가 정말로 소멸했는지는 알 겨를이 없었으므로, 확실한 죽음을 서술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팬이었던 독자들의 칼 문 리뷰는 조금 상처였다.
댓글 다 보는데…….
“하아……. 어?”
한숨을 쉬던 실버라이트가 모니터 화면을 보고 놀랐다.
분명 배신감에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독자들의 원성이 자자할 것이 기에, 일부러 들어가지 않았던 메일함.
오랜만에 접속한 메일함에는 익숙 한 이름의 발신자가 보내온 메일 한 통이 있었다.
[이설: 안녕하세요, 작가님.]
이설. 첫 출간 때부터 팬이라며 주 기적으로 응원 메일을 보내주던 독 자였다.
‘이설 독자님도 특별 외전 봤겠구 나…….’
이 독자의 배신감도 대단할 것이 었다. 실버라이트는 눈을 꼭 감고 메일을 열었다.
***
주홍빛 가로등 불빛이 만개한 벚 꽃잎마다 스며든, 아름다운 봄밤.
1일 차 연인은 설렘 반, 어색함 반으로 함께 걷고 있었다.
설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안 데려다 줘도 되는데…….”
말없이 걷는 대수를, 설이 힐끔을려다보았다.
길가마다 선 가로등 불빛이 은은 하게 드리운 대수의 얼굴은, 가히 설의 덕심을 자극할 만했다.
‘얼굴만 봐도 재미있다…….’
악연이었던 대수와 사귀게 된 것도 놀라운데 사귀자마자 줏대 없이 얼굴만 보고도 심장이 콩콩 뛰고 설레다니.
과연 얼굴이 개연성이라는 말이 틀린 소린 아닌 모양이었다.
옆에서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괜 히 몸이 더워지는 기분이었다.
“대수 너는 여동생 있다고 했나? 몇 살 차이야?”
“지금 일곱 살이야.”
“와……. 완전 귀엽겠다. 나중에 소개시켜 줘.”
“그래.”
짧은 대답과 함께 대화가 끊겼다.
묵묵히 걷기만 하는 대수의 눈치를 슬쩍 본 설이 고민하다가 또 운을 띄웠다.
“나는 오빠 두 명 있는데. 우리 첫째 오빠는 말이야, 엄청 잘생겼는데 돈도 잘 벌어.”
“뭐 하는데?”
“작가! 그런데 오빠 책은 내 취향 이 아니라서 안 읽어…….”
“네 취향은 뭔데? 남주의 어쩌고 그거?”
“응. 하아……. 마지막 비하인드 스토리만 아니었어도…….”
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설의 입술이 쭉 밀려 나왔다.
“야, 하대수.”
“어.”
“너 나 좋아하는 거 맞아? 뭐 이 렇게 말 한 마디 없어? 계속 나만 말하는 것 같네.”
설의 투정에 대수가 멈칫하더니, 이내 헛기침과 함께 슬쩍 고개를 틀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 르겠어.”
귀가 빨갰다. 아마도 부끄러워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설의 눈이 동그래졌다.
혹시 막상 사귀고 보니 별로라 후 회를 하고 있나, 잠깐 고민했던 게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대수의 반응은 신선했다.
괜히 부끄러워진 설이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으음, 내일 토요일이니까 영화 볼 래? 보, 보통 커플들은 영화관 많 이 가고 그러지 않나?”
“그래.”
“응, 그래.”
“내일 네 집 앞으로 데리러 갈게.”
“조, 좋아!”
붉어진 얼굴로 둘은 괜히 서로의 반대편을 보며 걸었다.
무심코 걷는 중에 손등이 스치자 설이 화들짝 놀라 대수를 돌아봤다. 그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으흠!”
“…….”
모른 척, 다시 걷기 시작하는 둘의 손이 또 실수인 듯 자꾸 부딪혔다.
콩, 콩, 콩.
설은 뛰는 가슴을 가만히 붙들고 생각했다.
‘연애가 이런 거였어?!’
모쏠 인생 20년. 망상은 질릴 만 큼 해본 터라 실제로 연애하는 날 이 와도 큰 감흥은 없을 거라 생각 했는데…….
의외로 첫 연애의 맛은 생각과는 달리 어색하면서도 달았다.
이러다 심장이 터져 죽는 게 아닌 가 싶어 걱정스러우면서도, 부끄럽 고 간질거리는 느낌이 마냥 싫지만 은 않았다.
자꾸 부딪히던 손이, 어느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맞물렸다.
‘으아아앙……! 손잡았어! 심장 터 질 것 같아……!’
대수의 손은 크고 따뜻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 은 기분에 어쩔 줄 모르던 설은, 꼭 같은 얼굴로 허둥거리고 있는 대수를 발견했다.
“그, 저, 뭐냐……. 오, 오빠 두 명이라며. 두, 둘째 오빠는 뭐 하는 데.”
“아아, 어, 그……. 둘째, 응, 둘째 오빠는…….”
새하얘진 머릿속을 달래며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문득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설의 걸음이 느려졌다.
‘……뭐지?’
마침 지나치던 가로등 아래, 우두커니 선 한 남자가 설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는 되어 보일 정도로 큰 키를 가진 남자는 상당히 이국적인 생김새였다.
진한 금빛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특이한 금안.
놀라우리만치 표정이랄 게 없는 얼굴이었지만, 설을 빤히 응시하는 눈빛만큼은 어딘지 모르게 절절해 보였다.
설은 마법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걸음을 멈추고 남자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