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엄마가 되어버렸다 특별 외전-30화 (219/221)

특별 외전 3. 당신을 기억하는 법3—2화.

이튿날.

특별 외전을 읽고 잠을 설친 설의 눈 밑은 거무죽죽했다.

그 유해한 책을 책장에 꽂아두면 볼 때마다 찝찝한 기분이 들 것 같아, 그녀는 고민 끝에 특별 외전을 대수에게 아예 양도하기로 마음먹 었다.

‘응? 뭐지?’

오전 강의를 듣기 위해 경영대 건 물로 들어서려던 설이 멈칫했다.

건물 입구에 있는 자판기 쪽에 왜 인지 학생들이 둥그렇게 모여 있었다.

“야, 야! 우, 우짜노? 니 그만 안 하나? 그러다 애 잡겄다!”

“뭘 말려. 맞아도 싼데. 신경 끄고가자.”

“미치인……!”

가까이 다가간 설이 까치발을 들 고 소란을 살피다 놀랐다.

‘뭐, 뭐야? 하대수 아니야?’

누군가와 엉겨 붙은 채로 거칠게 주먹을 내지르고 있는 건, 분명히 대수였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정확히는 대수의 아래에 깔린 남자가 일방적으로 맞는 중이었고, 익숙한 얼굴이 었다.

‘김철민 선배?’

입학한 뒤 첫 대면식 때부터 선배 들이 입 모아 ‘저놈은 꼭 피해 다 녀라’, 하고 조언을 해 줬던, 진상 복학생 선배 김철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선배인데 도대체 하대수는 무슨 생각으로 저런 짓을 하는 거지?

놀라 어버버거리던 설이 황급히 소란 속으로 뛰어들었다.

“하, 하대수! 그만해! 너 뭐 하는 거야!”

설의 목소리에 정신없이 철민을 깔아놓고 주먹질하던 대수가 멈칫 했다.

설이 다급히 대수의 팔을 당겨 일 으켰다.

“너 미쳤어?”

대수도 몇 대 얻어맞았는지, 입술 과 눈가에 작은 생채기가 나 있었다.

터진 입술을 손등으로 한번 훑은 대수가, 설을 빤히 응시하다 이내 바닥에 나뒹군 철민을 향해 일갈했다.

“주둥이 간수 잘해라.”

놀란 설이 제 입을 틀어막았다.

선배를 마구잡이로 팬 것도 모자 라 저런 말본새라니. 무슨 상황이었 든 간에 황당한 태도가 아닌가.

그러나 대수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지, 이를 한번 갈고는 휙 뒤돌 아 자리를 떠나버렸다.

멀어지는 대수의 뒷모습을 황당하 게 바라보던 설이 철민에게로 다가 갔다.

“선배, 괜찮으세요?”

“이, 이설?”

겨우 몸을 일으키며 입에 흐른 피를 닦던 철민은, 왜인지 설을 보고 바짝 굳었다.

곧 수많은 시선을 느끼고 눈치 보 던 그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도망치듯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서, 선배!”

뭐지? 왜 도망치는 거지?

의아해하는데, 소란에 휘말려 있던 낯선 얼굴 둘이 설에게로 다가왔다.

“니가 이설이가?”

머리를 하얗게 탈색한 눈이 작은 남자였다.

입술과 귀에 달고 있는 피어싱 하 며 탈색 머리, 요란한 옷차림과는 어울리지 않는 구수한 말투에 설은 당황했다. 경상도 출신인가?

“네, 그런데요?”

“니 철민이 여친이고?”

“네에? 아뇨?”

뜬금없는 남자의 질문에 설의 눈 이 휘둥그레졌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다른 남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철민이 저 새끼가 거짓말하는 거 라고 했지? 그리고, 진짜 여친이었 어도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 지. 맞아도 싸.”

유달리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남자도, 흰머리만큼이나 요란한 생김새였다. 시뻘겋게 염색한 머리에 절 로 시선이 갔다.

흰머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우리는 철민이 군대 동기여. 아, 오해할까 봐 말하는디 절~대로 친 한 사이는 아니지라.”

“아, 그러시구나.”

그런데 이번에는 전라도 사투리 아닌가? 대체 이 사람 어디에서 온 거지?

속으로 궁금해하는 설을 알아봤는 지 흰머리가 킬킬거리며 말했다.

“서울 토박이지라~ 사투리의 아름 다움에 반해 전국 사투리를 다 섭 렵 중이라 안 카나.”

“아무도 안 궁금해하니까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마라.”

빨간 머리가 옆에서 인상을 찌푸리며 핀잔줬다.

“아! 아무튼 이거이 먼 일이냐믄…….”

흰머리가 쯧, 혀를 차며 이마를 긁적였다.

“우리가 우연히 요 앞에서 철민이 만나가 얘기를 하는 중이었는디, 이 놈이 여친이 생겼다 하데? 근디 그여친이 얼굴도 무쟈게 이뻐불고 뭔수능도 만점 맞은 신입생이라길래 내가 배가 아파부렀지라~”

“…….”

“그래가꼬 이것저것 더 물어봤드 니만, 새끼가 신나가지고 거, 뭐 냐…….”

“야, 거기까지만.”

흰머리의 말을 막고 나선 빨간 머리가 귀찮은 표정으로 설에게 말했다.

“이설, 네가 자기 여친이라면서 듣 기 거북한 소리를 하더라고. 별로좋은 말은 아니었으니까 굳이 더 물어보진 말고.”

“그, 그랬구나…….”

“아무튼 김철민이 그만하래도 계 속 씨불이는데, 아까 그놈이 온 거 야. 지나가다 들었는지 다짜고짜 주 먹질한 거고.”

“아까 고놈이 니 진짜 남자친구 제? 미안하다, 야. 우리가 빨리 말 렸어야 했는디…….”

“뭘 말려. 잘 처맞았는데. 내가 김 철민 그 새끼 빨리 손절하자고 했 지?”

“지가 맨날 먼저 와 갖고 딸랑거 리는 거를 워쩌라고야?”

투닥거리는 두 남자의 대화를 멍 하니 듣고 있던 설이, 이내 어색하 게 웃으며 인사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먼 저 가 볼게요.”

“어엉, 그랴~! 나중에 보믄 아는 척하고~!”

“작업 거냐? 너도 김철민 과야?”

“뭐라는교, 이 불멧돼지가.”

이어지는 둘의 목소리를 뒤로한설의 걸음은, 이미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 대수의 뒤를 쫓고 있었다.

***

한참 애먼 데를 돌아다니고 나서 야, 설은 과실에서 대수를 찾아냈다.

그는 텅 빈 과실에 홀로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특유의 거만한 포즈로 다리를 꼬고 앉아, 지그시 눈을 감은 대수의 얼굴 위로는 창에서 스민 아침 햇 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얼굴 무슨 일이야…….’

황당하리만치 잘생겨서 그런지 얼굴에서 빛이 난다고 착각할 뻔했다.

멍하니 대수를 지켜보던 설이 퍼 뜩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야, 하대수!”

그제야 기척을 느꼈는지 대수가 천천히 눈을 떴다.

“한참 찾았잖아.”

“……날? 왜?”

“왜냐니?”

머뭇거리던 설이 천천히 다가가 대수의 옆에 몸을 앉혔다.

“……김철민 선배 왜 때렸는지 들 었어.”

“…….”

“으음, 그……. 어제 학생식당에서 도 그렇고, 도와줘서 고마워.”

“그 말 하려고 날 찾았어?”

대수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럼 뭔 소릴 더 해?”

“너 아홉 시 반 강의 아니야? 지금 열 시인데?”

왼쪽 손목의 시계를 슬쩍 내려다본 대수가 묻자 흠칫한 설이, 이내 뺨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쨌어. 너 찾으려고.”

“…….”

이렇게 사실대로 말하면 또 오해하겠지?

아니나 다를까, 돌아보니 대수는 이마를 짚은 채로 피곤한 척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하아……. 그래, 네 마음대로 생 각해라, 생각해.”

포기하고 한숨을 쉬던 설이, 문득 대수의 얼굴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 철민과 엎치락뒤치락하며 생긴 상 처가 분명했다.

“가만 있자…….”

바로 일어난 설이 과실에 있는 공 용 서랍을 뒤졌다. 기억하기로는 이 곳에 구급상자가 있었다.

“아, 여기 있다!”

구급상자를 가지고 설이 쪼르르 자리로 돌아오자, 대수가 미간을 좁 혔다.

“뭐 하냐?”

“너 얼굴에 상처 났어. 입술 터지 고, 눈 밑에도 긁혔어. 밴드 붙여줄 게.”

연고를 꺼내 짜낸 설이 손을 뻗자 대수가 반사적으로 굳어진 몸을 물 렸다.

“뭐 해? 가까이 와.”

“…….”

망설이던 대수가 주춤거리며 얼굴을 내렸다. 둘 사이의 거리가 제법 가까웠다.

콩, 콩, 콩.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가 쥐 죽은 듯 고요한 사위를 메웠다.

“있잖아, 하대수.”

연고를 묻힌 검지를 대수의 눈가 상처에 조심스럽게 펴 바르던 설이,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 줘?”

“뭐?”

겨우 한 뺨 거리에서 둘의 시선이 빈틈없이 맞닿았다.

콩, 콩, 콩.

아까부터 들려오는 심장 뛰는 소리가 조금 더 커진 것도 같았다.

대수는 답이 없었다. 그저 빤히 설을 응시할 뿐이었다.

괜히 부끄러워진 설이 허둥거리며 밴드를 찾아 대수의 상처 위에 붙였다.

“아니, 뭐, 좀……. 신기해서. 여자 애들이 말만 걸면 사귈 맘 없다면 서 내빼는 애가, 어제는 또 나한테 사귀어주겠다느니 어쩐다느니 그래 서…….”

“왜…….”

밴드를 붙이고 떨어지려는 설의 손을 대수가 가볍게 붙들었다.

“……잘해 주는 것 같은데?”

“응?”

“내가 왜 너한테 잘해 주는 것 같 냐고.”

“모, 모르겠으니까 내가 물어봤잖 아.”

“…….”

쿵, 쿵, 쿵.

이제는 커진 심장 소리가 소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설은 그제야 이게 제 가슴에서 나는 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설레고 있다.

설은 뜬금없이 대수에게 뛰는 심 장이 그의 비현실적인 얼굴 때문인 지, 어제 읽은 책이 자꾸 마음에 걸려서인지 헷갈렸다.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꼭, 대수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

설은 긴장을 누르며 물었다.

“너 나……. 좋아해?”

“…….”

귀가 먹먹해졌다.

쿵쿵거리던 심장 소리도 더는 들 리지 않았고, 서로의 사이를 메우던 옅은 숨소리도 스러졌다.

시야도 뿌옇게 번졌다.

오직 눈앞에 있는 대수의 얼굴을 뺀 모든 것이 전부 흐릿해 보였다.

“……아마도.”

그의 입술이 조그맣게 움직여 대 답을 만들어 낸 순간.

다시 심장이 뛰고 빛바랜 시야가 색을 찾았다.

잠시 멍해 있던 설이 허둥거렸다.

“그, 그 애매한 대답은 뭔데?”

“…….”

작게 입술을 기울여 웃은 대수가 잡고 있던 설의 손을 놓고 바로 앉 았다.

놓칠세라 설이 더 바짝 붙어 앉으 며 물었다.

“대수 너, 그러면 나한테 하고 싶 은 말없어?”

“무슨?”

“자, 잘 생각해 봐. 날 좋아해서 잘해 줬던 거면……. 나랑 뭔가, 응, 그래, 하고 싶은 게 있을 거 아니야?”

슬쩍 설을 돌아본 대수의 눈이 가 늘어졌다.

이내 고민에 빠진 그의 목울대가 긴장으로 일렁거렸다.

“그래. 할 말 있어.”

“해, 해 봐!”

“사…….”

“응!”

“사귀…….”

“으응!”

잠시 입을 다문 대수가 고개를 돌 려 설과 딱 눈을 맞췄다.

“사귀어줄게.”

“…….”

정적이 내려앉았다.

“후”

곧,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긴 대수가 날카롭게 한숨을 터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그러고는 뒤늦게 나온 설의 대답에, 그대로 굳었다.

대수의 고개가 뻣뻣하게 설을 향해 내려갔다. 이내 마주 일어난 설을 따라 둘의 시선이 맞물렸다.

설이 방긋 웃고 말했다.

“사귀어 줘.”

“…….”

멍해 있는 대수의 빤한 시선이 부 끄러운지, 설은 고개를 비틀고 허둥거렸다.

그러다 결심한 얼굴로, 그녀는 다시 눈을 맞추고 말했다.

“좋은 여친이 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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