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엄마가 되어버렸다 특별 외전-28화 (217/221)

특별 외전 2. 개와 고양이의 나날2—3화.

“여, 여보……. 이거 진짜 아파. 그 만해요.”

“아니, 억, 윽……. 나는 괜찮으니 까, 어…….”

시야가 하얗게 물들 정도로 혼미한 와중에도 하데스는 이를 악물고 흡수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그만하란다고 그만둘 사람도 아니었다. 아이샤는 포기하고 옆에 있던 작은 천을 말아 건넸다.

“그럼 이거라도 물고 있어요. 잘못 하다 혀 깨물어.”

몸을 배배 꼬던 하데스가 아이샤의 손에서 낚아채듯 천을 받아 제 입에 물었다.

“어윽…….”

“어떡해…….”

“마, 마님! 최대한 빨리 해산하셔 야 공작 전하도 한시름 놓으실 겁 니다! 조금 더 힘을 내 보세요!”

하데스의 상태를 눈치챈 의원이 다급히 말했다.

두 산파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예, 마님! 조금만 더 힘을 내세 요!”

“애기씨가 곧 나오십니다! 벌써 머리가 반쯤 보여요!”

“허윽…….”

부들부들 떠는 하데스를 안타깝게 쳐다보던 아이샤가 결의에 차 눈을 빛냈다.

“여보, 조금만 더 버텨! 내가 얼른 낳아볼게!”

“큭…….”

“마님, 머리만 나오면 돼요! 머리 만!”

“하나, 둘!”

“하나, 둘!”

“흐아아아아!!!”

양손을 불끈 쥔 아이샤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힘을 줬다.

하데스를 뒤따라 쪼르르 들어온 앤과 아벨, 데보라가 아이샤의 양쪽에 붙어 섰다.

“괜찮아요? 아가씨이이…….”

여전히 단둘이 있을 땐 옛날 호칭 이 익숙한 앤이 아이샤의 목을 끌 어안고 엉엉 울었다.

“아냐, 나는 이제 괜찮아. 저 사람 이 걱정인걸.”

“컥, 어윽…….”

“어머니, 그럼 이제 안 아프신 거 예요? 다행이다…….”

“다, 다행이다!”

아벨과 데보라가 눈물 자국 가득 한 얼굴로 안심하며 웃었다.

“아니, 아벨. 나는 괜찮은데 너희 아버지가 아프다니까?”

“커헉!”

“마, 마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힘을!”

거의 나온 아기를 보며 산파가 흥 분으로 소리쳤다.

“하나, 둘!”

“하나, 둘!”

“흐랴아아압!!!”

“으아아아악!!!”

아이샤가 힘껏 기합을 넣음과 동 시에 하데스가 고통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입에 꽉 물고 있던 천이 바닥으로 툭, 하릴없이 떨어지고야 말았다.

그리고.

“으아아아앙……!”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가 공작성을 쩌렁쩌렁 메웠다.

진통이 시작된 지 딱 한 시간 만의 순산이었다.

“우와! 아기 나왔어요!”

데보라가 흥분으로 눈을 빛내며 아기를 수습하는 두 산파의 곁으로 쪼르르 가 기웃거렸다.

“수고하셨어요. 정말 수고하셨어 요, 마님.”

의원은 감격으로 울먹거리며 모포를 더욱 단단히 아이샤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차마 들어오지는 못하고, 잠시 휴 전한 채로 문밖에서 눈만 흘깃거리 고 있던 아자르와 록사에게 아이샤 가 손짓했다.

냉큼 달려 들어온 둘의 관심사도 당연히 갓 태어난 아기였다.

“시, 시상에나……! 머가 이리 쭈 그렁방탱하지라? 전하도, 부인도 안 닮았는디?”

“멍청하긴. 갓 태어난 아기가 쭈글 쭈글한 게 당연하지.”

“얻다 대고 멍청하다여? 무식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놈한테 이딴 소리 들은께는 기분이 솔찬히 나빠 블지라.”

“둘 다 조용히 좀 하세요! 아기님 놀라잖아요!”

앤이 티격태격하는 아자르와 록사 에게 핀잔줬다.

그들은 아기를 둥그렇게 에워싸 철벽처럼 가리고는 한참을 조잘거 렸다. 정작 부부는 아기의 발가락 하나 구경하질 못했는데.

“아아으으…….”

털썩.

백지장보다 더 창백해진 얼굴의 하데스가, 대자로 뻗어 누워 헉헉거 리며 숨을 골랐다.

남편을 걱정해주는 건 아내뿐이었다. 침대 밑에 널브러진 하데스를 내려다보며 아이샤가 안쓰러운 표 정으로 물었다.

“여보오, 괜찮아?”

“하아, 하아…….”

진이 다 빠진 하데스의 모습에 아이샤가 풉 웃음을 터뜨렸다.

“마님, 아기님을 안아보셔야지요!”

산파가 방해꾼들을 헤치고 따뜻한 요에 감싼 아기를 내보였다.

그러자 아이샤가 여전히 드러누운 하데스를 가리켰다.

“엄마 대신 아파 준 아빠한테 먼 저 안겨주면 고맙겠어요.”

“호호……. 그럴까요. 이것 보세요, 전하.”

산파가 아기를 건네자, 누워있던 하데스가 용수철처럼 벌떡 상체를 세웠다. 언제 아파 헐떡거렸냐는 듯그의 표정은 감동에 젖어있었다.

한참 울다 그새 얌전해진 아기를 받아든 하데스의 눈이 빠질 만큼 커져 흔들렸다.

“너무 예쁜 공녀님이세요.”

“…….”

산파의 말에, 하데스는 멍해진 채로 아직 눈도 못 뜬 아기의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기는 아주 작고, 또 따뜻했다. 이렇게 작은 생명체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퍽 신기하고 가 슴 벅차서 하데스는 말문을 잃고 한참 아기를 응시했다.

“어라라, 스을마 또 질질 짜실라는 거는 아니겄지라? 대악마 루버몬트 공작 이미지 다 죽어브렀네~”

“야, 이 촉새야. 너는 산통 좀 깨 지 마라.”

먹먹한 기분이 코끝을 찡하게 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하데스는 이내 뻣뻣한 몸을 일으켜 아이샤에게 다 가가 아기를 건넸다.

“여, 여보? 진짜 우는 거 아니지?”

“아니야…….”

말과는 달리 휙 뒤돌아 고개를 허 공으로 젖힌 모습이 수상했다.

한달음에 그의 옆으로 달려간 록사가 방정맞게 킬킬거리며 놀렸다.

“에베, 에베~ 울지라? 울지라? 눈물 나오는 것 같은데예?”

“저리 가라…….”

“운다? 운다? 눈물 나온다?”

“이게, 진짜!”

“악!!!”

결국, 기어코 정수리를 한 대 얻어 맞은 록사가 입을 댓 발 내밀고 투 덜거렸다. 그 모습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

시냐 루버몬트.

태어나자마자 보니, 아빠는 제국 최고 실세에 엄마는 전 세계적으로 추앙받는 성녀.

차기 루버몬트 공작인 오라버니와 풍속성 최대 개방 능력자 군단장 삼촌, 창조 능력자 삼촌 등을 보유.

탄생 기념으로 아버지에게서는 시 가 100억 상당의 다이아몬드 광산을, 황실로부터는 노른자 국유지였 던 땅문서 5개를 선물 받아 크레센타 제국에서 보유 자산이 가장 많 은 미성년 귀족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으며…….

본인은 마력 예상 수치 판독기(록사 트리볼트의 21번째 발명품)에 의거한 화속성 최대 개방 예정 능력자였다.

그녀의 나이 1개월.

그야말로 ‘너무 잘나서 피곤한’ 인 생의 시작이었다.

“뭔 도떼기시장도 아니고 꼭두새 벽부터 옘~병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겄지라!”

이곳은 루버몬트 공작성의 꼭대기 충, ‘하얀 마법사’, 록사 트리볼트의 연구실.

창밖을 슬쩍 내다본 록사가 절레 절레 고개를 저었다.

성은 아침부터 방문객들로 발 디 딜 틈 없이 북적거렸는데, 오늘이 루버몬트 공녀의 탄일 기념 연회, 그 첫째 날이기 때문이었다.

나름 루버몬트의 상징으로 자리매 김한 ‘하얀 마법사’ 록사 트리볼트는 이런 날이면 항상 원치 않아도 불려 나가야 했다.

언제 입어도 적응되지 않는 제복 차림으로 거울 앞에 선 록사가 땅 이 꺼져라 푹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첫 조카, 시냐는 아주 귀여웠다.

쭈글쭈글했던 얼굴을 씻기고 나니 피부는 눈처럼 새하얬고 눈동자는 엄마를 닮아 반짝이는 푸른색이었다.

남의 딸도 이렇게 귀여워 미칠 지 경인데, 제 자식이 생기면 어떤 기 분일까?

‘나 장가갈 수 있을까…….’

그러나 하늘을 봐야 별을 따는 법. 결혼도 안 한 총각이 무슨 수로 자 식을 보겠나.

록사는 우울해졌다.

조카 시냐가 아이샤의 배 속에서 쑥쑥 크는 동안, 앤을 향한 록사의 마음도 쑥쑥 자라 짝사랑만 10개월 째였다.

그러나 무사히 엄마 배에서 나와 세상 빛을 본 시냐와 달리, 록사의 순정은 빛을 보기는커녕 시궁창에 처박힌 수준이었다.

좋아하는 여자가, 하필이면 세상에 서 제일 싫은 원수 아자르 놈에게 마음을 홀라당 뺏겨 상사병까지 걸 려 있다니…….

이보다 더 비참할 수 없었다.

“커흑!”

록사가 입을 틀어막고 울분을 삼 켰다.

그때였다.

똑똑, 단정한 노크 소리와 함께 앤의 목소리가 들렸다.

“록사 씨, 안에 계세요? 저 들어갈 게요.”

록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환청인가?

정말로 문을 열고 들어온 앤의 모습은 환상이고?

“왜, 왜, 뭐, 뭐, 무슨, 무슨 이, 일 로 오오오셨어라?”

“아, 별건 아니고요. 공작 전하께 서—”

앤이, 하데스를 따라 하려는지 눈에 힘을 주고 거만하게 턱을 세운 채 덧붙였다.

“—오늘은 그 거지 같고 정신 사나 운 머리털을 단정하게 하나로 묶지 않으면 기어 나올 생각 말라고 해.”

“…….”

“……라고 하셔서요.”

“아아, 예…….”

씁쓸하게 대답한 록사가, 제 머리를 대충 모아 잡으며 거울을 향해 뒤돌았다.

“제가 묶어드릴게요.”

“예?”

바구니를 뒤적여 빗을 꺼낸 앤이 그것을 들어 보이자 록사가 당황으 로 어버버거렸다.

“가만 있자, 의자가…….”

앤이 두리번거리며 의자를 찾는 듯하자—

딱!

—록사가 그 즉시 손가락을 한 번 퉁겨 작은 의자 하나를 만들어냈다.

아, 탄성을 터뜨린 앤이 방긋 웃으 며 거울 앞에 록사를 앉혔다.

‘꿈 아니여?’

록사는 멍하니 거울에 비치는 앤 과 자신의 모습을 응시했다.

앤은 퍽 다정한 손길로 머리를 빗 겨주기 시작했는데 그녀의 손이 움 직일 때마다 록사는 심장이 밖으로 뛰쳐나올 듯 쿵쾅거리는 것을 말리 려 가슴을 붙잡아야 했다.

쿵쿵쿵쿵.

아니, 이게 정말 심장 소리일까? 어디에서 지진이라도 난 게 아니 고?

“저, 록사 씨…….”

“예, 예!”

쿵.

쿵.

“아자르 경, 말인데요…….”

그 다음 순간 앤의 입에서 튀어나 오는 이름에, 빠르게 뛰던 록사의심장이 찬물 끼얹은 듯 굳었다.

입을 모로 꾹 다문 록사가 퉁명스 럽게 대꾸했다.

“그 불멧돼지가 와예.”

“왜 자꾸 아자르 경에게 시비 거 시나, 해서…….”

울컥한 록사가 앤을 휙 돌아보았다.

“그걸 지금 몰라서 물어보셔라?!”

“왜요?”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앤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 속 터져. 잔뜩 울상을 지은 록사가 몸을 휙 틀었다. 앤이 어색하 게 웃으며 다시 그의 머리를 만져 주기 시작했다.

“전하랑 마님께서 걱정이 이만저 만이 아니세요. 록사 씨랑 아자르 경이 이번 달에 깨 먹은 것들만 3 억 노르트라는데…….”

“루버몬트에서 남아돌다 못해 뻗 쳐부는 것이 돈인디 고것이 걱정되 가 하는 말은 아닐 거고, 와예? 불 멧돼지 고놈이 그라고 걱정되셔 라?”

“네?”

멈칫한 앤이 이내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했다.

“아아, 그런 거 아니예요. 저 이제 깔끔하게 마음 정리하기로 했거든 요?”

“사람 마음이 뭔, 방금 밭에서 뽑아가 온 무도 아이고예, 자를란다고 잘도 쓱 잘리겄지라~”

입을 삐죽 내민 록사가 어깨를 으 쓱하며 빈정거렸다.

앤이 발끈했다.

“정말이에요! 나도 나 싫다는 사람 됐다구!”

“억! 잠깐, 잠깐. 좀만 살살.”

저도 모르게 록사의 머리채를 꽉 틀어쥔 앤이 구시렁거리며 혼잣말했다.

“아니, 내가 얼마나 티를 많이 냈는데 전혀 몰랐다는 식으로 말할 수가 있지? 사람이 눈치가 없어도 그렇게 없을 수가 있나?”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지라! 이 눈 치는 밭에서 갓 뽑은 무랑 바꿔 먹 은 여자야!’

록사는 그렇게 외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아무튼, 저도 이제 저 좋다는 사람 만날 거예요.”

앤의 말에 록사의심장이 다시 뛰 기 시작했다.

쿵쿵쿵.

“……아마 평생 가도 없을 것 같 지만요.”

그리고 덧붙이는 앤의 말에 절로 힘이 빠졌다.

“자, 다 됐다! 와, 역시 록사 씨는, 꾸며 놓으면 최고잖아요! 너무 멋 져요!”

앤이 뿌듯한 표정으로 거울에 비 치는 록사를 살폈다.

단정하게 하나로 묶은 은발과 남 색 제복 차림이 놀라울 만큼 그와 잘 어울렸다.

이내 벌떡, 일어난 록사의 등에 시야가 가려진 앤이 멈칫했다.

‘몰랐는데 키가 꽤 크구나…….’

생각하는데, 빙글 몸을 튼 그가 별 안간 고개를 쑥 내려 꽤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예요?”

록사는 대답하지 않고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하며 뭔가 찾는 시늉을 했다.

“뭐 찾아요?”

“집 나간 아가씨 눈치예〜”

록사는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 었다. 그의 얼굴을 멍하니 들여다보 며 앤은 한참 눈만 깜빡였다.

***

시냐 루버몬트의 탄일 기념 연회, 그 첫째 날 저녁.

성의 방문객들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하얀 마법사’의 축하 퍼포먼스를 보기 위해 모여 있었다.

약 1년 전, 루버몬트 공자의 생일.

그때 처음 사람들에게 공개되었던 밤하늘의 아름다운 불꽃놀이는 엄 청난 화제가 되었고 록사는 그 이 후 황실 연회, 공작 부부의 탄일 연회와 결혼기념일 등등 각종 행사에 불려가 폭죽 퍼포먼스를 선보여 야만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까다 로운 공작 전하가 따님을 위해 친 히 주문한 멘트도 있었다.

“저기서부터 저기까지, 꽉꽉 채워 서 써라. 색깔은 최대한 알록달록하 게.”

“예, 예~”

시냐 루버몬트 탄생 1개월째.

그야말로 ‘딸 바보’의 표본이 되어 버린 하데스가 들뜬 얼굴로 한참 조잘거리다가 멈칫했다.

듣고 있긴 한 건지. 멍하니 서서 대충 대답하며 허공만 응시하는 록사 때문이었다.

“왜 이렇게 정신이 나가 있어?”

“하아……. 저기예, 전하.”

“뭐.”

“공작 부인이랑 처음 만나셨을 때 말이어라. 부인이 전하한테 첫눈에 반해가지고 졸졸졸 따라다니셨다 했지라?”

록사의 질문에 하데스가 흠칫 굳 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단신으로 북부까지 내려왔던 아이샤의 눈물겨운 의지는 자신이 아닌 아벨을 향한 것이었지만…….

하데스는 모른 척 헛기침했다.

“뭐, 그게 왜.”

“그때 전하는 부인께 암 마음도 없으셨을 건디 용케 받아주셨어라. 부담스럽거나 뭐, 싫지는 않았어 예?”

뜬금없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뭘까. 의아해하던 하데스는 곧 록사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곳을 한 번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 끝에는, 곧 시작될 불꽃 놀이를 기다리며 아이샤와 나란히앉아 조잘거리는 앤이 있었다.

록사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준 하데스가 말했다.

“싫진 않았지. 그리고 싫다는 사람 붙들고 괴롭히는 것만 아니라면 표 현은 해 봐야지 않겠나. 직접 말로 안 하면 모르는 둔한 사람들도 꽤…….”

말하던 하데스가 입술을 물었다.

그게 바로 나예요.

“……있거든.”

결혼하고 무려 5년 동안이나 진실을 모르고 살았던 둔한 공작 전하는, 다시 한번 록사의 어깨를 두드 려 달랬다.

“힘내라.”

“…….”

묵묵히 하데스의 말을 듣고 있던 록사는, 멀리 보이는 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직접 말로 안 하면 모르는 둔한사람들도 꽤 있거든.”

하데스의 조언은 록사의 용기를 북돋는 데 꽤 도움이 되었다.

“자, 이제 우리 따님에게 보내는 이 아버지의 사랑 고백이 만천하에 공개될 시간이군.”

입꼬리가 귀에 걸린 하데스가 팔을 쫙 펼치며 록사에게 신호했다.

막 불꽃놀이가 시작되려는 걸 알 았는지, 성에 모인 방문객들 틈에서는 들뜬 웅성거림이 쏟아졌다.

모두가, 검은 도화지 같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루버몬트 공녀의 탄 생을 축하했다.

록사는 멍한 얼굴로 계속 앤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도 이제 저 좋다는 사람 만날거예요.”

“와, 역시 록사 씨는, 꾸며 놓으면최고잖아요! 너무 멋져요!”

꿀꺽.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고 입술은 바짝바짝 말랐다.

“후우, 후우…….”

절로 가빠지는 숨을 겨우 고른 록사가 결의에 찬 눈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딱!

이내 그가 손가락을 퉁겨 하늘 위 로 색색의 불꽃을 수놓았다.

“햐…….”

“멋지다!”

사람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 왔다. 모두가 아름다운 불꽃의 향연에 감탄하기 바빴다.

형형색색으로 수놓아진 불꽃이, 뜬 금없는 멘트를 만들어내기 전까지는.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제국 최고의 미녀 앤 브론테 양 ♡.

“으응? 저게 무슨 말이야?”

“공녀님 이름이 앤이었어?”

“아냐, 공녀님 얘기가 아닌 것 같 은데?”

당황한 좌중이 웅성거렸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하데스의 입은 천천히 충격으로 벌어졌다.

♡지가 많이 좋아하고 있지라♡.

“로, 로, 록사 트리볼트…….”

하데스가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살기가 느껴지지도 않는지 록사는 긴장한 눈으로 앤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역시나, 앤도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부끄러워 흠칫 시선을 피한 록사 가 다시 한번 밤하늘 위에 불꽃을 그렸다.

♡♡함 만나 주이소!!! ♡♡.

“우와, 뭔지는 모르겠지만 멋진 걸…….”

“어쨌든 불꽃은 예쁘다.”

다행히 사람들은 행복해했지만—

“이, 이, 이 자식……. 로옥사아아아!!!”

—단단히 뒤통수 맞은 하데스의 포효는 꽤 오랫동안 성을 메웠다.

록사의 깜짝 공개 고백으로 잠시 지연되었던 탄신 기념 연회 첫째 날의 피날레는, 그럭저럭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공개 고백을 받고 혼란에 빠진 앤의 대답은…….

“새, 생각해 볼게요!”

……였지만, 그녀와 오래 알아 왔던 아이샤는, 록사의 짝사랑이 머잖아 끝나게 되리라고 예견했다.

나쁘지 않은 밤이었다.

시끄러운 것 빼고.

“니놈만 없어지믄 앤 양이 고민하 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라! 제발 뒤져라아아!!!”

콰과과광—

쿵!

“개소리 집어치워! 곧 죽어도 너 같은 촉새 새끼 만나기 싫은 거지, 그게 왜 내 탓이야!”

콰광, 쾅!

“뒤져어어어!!!”

“너나 뒈져, 이 새끼야!”

우르릉—

쾅!

침대에 누워 잘 준비를 하던 하데스가 벌떡 몸을 일으키곤, 옆에 있 던 아이샤를 돌아보며 방긋 웃었다.

“먼저 자. 나는 저놈들 죽이고 올 테니까.”

“그냥 둬요. 자자.”

아이샤가 하데스의 팔을 당겨 다시 눕혔다.

“이렇게 시끄러운데 어떻게 자?”

“말려 봤자 그때뿐인걸. 그냥 둘 다 지칠 때까지 놔두는 게 제일 현 명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아이샤에, 하데스가 지그시 눈을 감으며 분노를 삼켰다.

“그나저나 우리 이렇게 오붓하게 자는 거 되게 오랜만이다. 그치, 여보?”

배시시 웃은 아이샤가 하데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냐가 태어난 후 한 달이 넘는 동안 딸의 옆에 딱 붙어 떨어질 줄 몰랐던 하데스다.

낮에는 일을 하고, 새벽에는 애를 보고. 24시간 중 수면 시간은 과감 히 포기했다.

피로가 누적되면 아이샤가 회복시켜주니, 하데스는 지쳐도 다시 일어 나 시냐의 방에서 쪽쪽이를 물리고 딸랑이를 흔들었다.

그만 하녀들에게 맡기고 새벽에는 눈 좀 붙이라며 아이샤가 수십 번 말해도 그는 단호했다. 대단한 부성 애였다.

“그런데 기쁜 날 왜 이렇게 우울 해 보이지?”

“응? 내가?”

코끝을 살짝 건드리며 묻는 하데스에 아이샤가 놀라 웃음을 터뜨렸다.

“예리하네. 으음, 사실 아까 불꽃 놀이 보는데 미하일 대신관이 생각 났어.”

“아하.”

“조카 태어난 거 알면 되게 예뻐해 줬을 텐데…….”

미하일을 떠올리며 씁쓸한 표정을 짓던 아이샤가 다시 환하게 웃고는 덧붙였다.

“지금쯤 미하일도 저쪽 세계에서 태어났겠지?”

“그랬겠지. 이번에는 연인보다 6개월 연하겠군.”

“하하하……. 그러네.”

“보고 싶나?”

“으음, 보고 싶지. 그치만 나는 지금 여기서도 행복하니까.”

“…….”

“그리고 다음 생에는 꼭 다 같이 태어나서 만나자고, 프로크레아토르 가 약속해줬어. 우리는 또다시 형제 로만나게 될 거야.”

그리움 가득해 보이는 아이샤의 얼굴에, 못내 서운해진 하데스가 입술 끝을 기울였다.

형제들의 유대야 잘 알고 있지 만……. 아이샤가 이곳에는 없는 그 들을 그리워할 때면, 꼭 그녀의 마음에서 밀리는 기분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하데스가 무슨 생 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아서, 살풋 웃은 아이샤가 그의 품으로 더 파 고들었다.

“그런데 좀 걱정돼.”

“뭐가?”

“다음 생에서 내가 당신을 못 알아보면 어떡하지? 다 기억한 채로 태어나면 좋겠지만…….”

아마 형제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프로크레아토르는, 아이샤가 전생을 기억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을 터다.

고통의 연속이었던 수천 번의 삶을, 다음 생부터는 비로소 전부 잊 게 되겠지.

프로크레아토르는 분명 아이샤의 행복을 위하여 모든 흔적을 지운 세계에 그녀를 태어나게 할 것이었다.

이 세계 자체였던〈페르소나〉라는 책도 없을 것이고…….

아벨을 사랑했던 기억도, 하데스를 만났던 기억도, 그들과 끝내는 기적을 이뤄냈던 기억까지도……. 모두 잊고 말겠지.

우울해진 아이샤가 하데스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어떻게 당신을 기억하면 좋 지? 내가 바보처럼 당신을 잊어버 릴까 봐 두려워…….”

“왜 그런 게 걱정이지? 난 당연히그대를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생 각하는데.”

“물론 그렇겠지만……. 혹시 또 모르잖아. 내가 당신을 다시 만났을 때 늙고 못생긴 모습이면 어떻게 해?”

“그대는 내가 늙고 못생긴 모습이 면 사랑하지 않을 건가?”

“당연히 아니지. 그렇지만 못 알아볼까 봐 걱정된다고요. 지금은 이렇 게 멋지고 잘났잖아.”

고민하던 아이샤가 말했다.

“기억을 잃고 겉모습이 변하더라도 내가 당신을 알아볼 수 있게, 하나 정도는 당신다운 흔적을 갖고 있어줘.”

“나다운 흔적?”

“응, 예를 들면…….”

속으로 혼자 생각하던 아이샤가 쿡쿡 웃었다.

“뭔데? 왜 웃어?”

“넘치는 자의식 과잉이라든가?”

하데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자의식 과잉 소리 그만하랬지. 아니, 진짜 이상한 여자야. 처음부 터 아벨을 따라다닌 거라고 사실대 로 말을 했으면……!”

“아냐, 당신은 그게 매력이었는 걸요. 한결같아 줘.”

하데스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난 질투가 아주 많으니까, 다시 태어나서 나 만나기 전까지는 절~ 대 다른 사람 만나지 마요. 결혼은 당연히 안 되고 연애도 하지마. ‘사귀자’는 소리 그 누구한테도 하면 안 돼. 물론 나도 그럴게.”

“당연한 소릴. 그런데 그대를 다시 만나면 고백해야 하잖아?”

“으음……. 그건 그런데, 왜인지 당신이 누구한테 사귀자고 매달리는 건 상상이 안 된단 말이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던 아이샤 가 방긋 웃고 말했다.

“아! 그럼 ‘사귀어주겠다’고 해!”

“뭐?”

“당신한테는 그런 고백이 어울려.”

“말도 안 돼. 이건 웬 미친놈이냐며 도망가지나 않으면 다행이겠군.”

“그러니까 다행이지. 혹시 당신이 잘못 짚어서 다른 사람한테 고백하더라도, 다들 ‘사귀어주겠다’는 이 상한 소리 들으면 도망갈 테니까. 나만 알아볼 거야.”

배시시 웃은 아이샤가 하데스의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황당해하던 하데스도 이내 웃으며 품 안의 아이샤를 더 꽉 끌어안았다.

그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부부의 목소리는 두런두런 침실을 메웠다.

“꼬옥, 다음 생에도 당신을 알아볼게……. 사랑해, 자기야아…….”

깊은 새벽. 졸린 눈을 감으며 중얼 거리는 아이샤의 이마 위로, 픽 웃은 하데스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나도.”

언제나처럼 기적 같은 하루가 또지나가고 있었다.

〈남주의 엄마가 되어버렸다 —개와 고양이의 나날〉完.

그리고, Behind story.

비로소 기적처럼 행복해진 그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을 맺지만, 필자 에게는 의문이 남는다.

이 행복을 쟁취하기까지 그들에게 주어졌던 오랜 시련은……. 정말 끝 이 났을까?

그 세계는 용신 ‘가이오니야’의 손 끝에서 만들어졌고, 형제들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안배를 했던 ‘프로크레아토르’ 또한 가이오니아의 피 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창조신 가이오니아는 정말 자식에게 패배하고 소멸했을까?

신의 죽음이라는 것이, 정말로 가 능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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