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외전 1. 그녀의 비밀1—2화.
철민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실수? 실수우?
분노가 머리끝까지 오른 철민은 버럭 내지르려 했지만, 대수는 그럴 틈도 주지 않고 휙 몸을 틀어 식당을 나섰다.
유유히 사라지는 대수의 뒷모습을 그저 부들부들 떨며 멍청하게 지켜보던 철민이, 이내 시선을 느끼고는 흠칫했다.
설을 포함한 20학번 여자 후배들 이 전부 제 우스운 꼴을 지켜보고 있었다.
뜬금없는 음식물 세례를 맞은 옷 에서는 스멀스멀 냄새가 올라왔다.
이런 상태로 어찌, 예쁜 여자 후배 와 카페에서 하하호호 딸기 스무디를 마시겠는가.
“이, 이…….”
입술을 꽉 깨문 철민이 시뻘게진 얼굴로 쾅, 쾅 발소리를 내며 식당을 나섰다.
***
점심시간에 학생식당에서 있었던 소란으로 강의실이 시끄러웠다.
설을 중심으로 모인 여학생들은 한참 조잘거리고 있었다.
“하대수, 설이 너 도와주려고 한 거 맞지?”
“와, 내 속이 다시원하더라.”
“솔직히 진짜 또라인데 껍데기는 죄가 없다. 잘생기긴 했잖아. 아까 나 설렐 뻔했어.”
“에이, 그건 안 돼. 참아. 그런 말 들으면 하대수 자의식 과잉 또 발 동할라.”
동기들의 수다를 들으며 설은 식 당에서의 대수를 떠올렸다.
‘도와주려고 그랬던 거 맞겠지?’
싸가지, 자의식 과잉 등 온갖 안좋은 별명은 다 달고 다니는 대수였지만 이유 없이 남에게 시비 거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난데없이 철민을 몰아붙 여 식판까지 끼얹은 건 분명히 난 처해하는 설을 도우려는 행동이었을 테다.
‘날 왜 도와줘?’
설은 의아했다.
대학교 친구들은 잘 모르겠지만, 설과 대수는 악연에 가까웠다.
고등학교 졸업식을 이를 앞둔 날.
계단에서 넘어질 뻔한 설을 도와준 이후로 대수는 설이 자길 좋아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아마 그 빌어먹을 착각은 지금까지 유효 할 거다.
같은 대학, 같은 과에 입학하고 나 서도 설을 대하는 대수의 반응은 한결같았으니까.
“내가 뭐, 먹을 거에 넘어가는 놈으로 보이나……. 유치하게.”
“응, 아니야. 다들 나눠줬어. 너만준 거 아니야.”
MT 때 과 대표를 도와 간식을 나 눠주는데, 코웃음 치며 설에게 한단 소리가 저것이었고—
“이거 받아. 러브레터 아니고 기업답사 신청서야. 갈 거면 사인해서과대한테 내.”
“……피곤한데. 내가 꼭 갔으면 좋겠냐?”
“대체 뭐래? 네가 가든 말든 나랑은 전혀 상관없거든?”
“그래. 그렇다고 치자.”
뭔가 건네기만 하면 러브레터로 오해해서 대화가 안 된다며 난처해하는 부과대 여학생 대신, 설이 답 사 신청서를 주러 갔을 때 반응이 저것이었다.
‘미친놈…….’
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야, 야. 하대수 왔다. 쉿.”
“아씨, 잘생겨서 더 어이없다.”
“그런 말 좀 하지 말라니까?”
여느 때처럼 거만한 표정으로 강 의실에 입성해 맨 뒷자리에 척, 앉는 대수를 모두가 힐끔거렸다.
설이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팔짱을 끼고 긴 다리를 꼰 채 무 심한 표정으로 앉은 대수가 보였다.
인정하긴 싫지만…….
충격적으로 잘난 놈은 맞다. 세상 모든 여자가 자길 좋아할 거라 착 각하는 게 납득이 되는 얼굴이랄까.
멍하니 대수를 움쳐보는데, 문득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린 그와 설의 눈이 마주쳤다.
설이 화들짝 놀라 몸을 틀었다.
‘아우씨, 쟤 또 오해하는 거 아니 야?’
안 하면 섭섭하지. 역시나 뒤에서 가소롭다는 듯 피식, 하는 웃음소리 가 들려왔다.
지그시 눈을 감은 설이 부들부들 떨며 한숨을 내쉬었다.
“설아, 혹시 주말에 시간 돼?”
그때 옆자리의 친한 동기 세미가 물었다.
“주말? 시간은 되는데, 왜?”
“나 방탄복소년단 오빠들 앨범 사 러 갈 건데 같이 안 갈래?”
세미가 들뜬 표정으로 말하자, 설의 반대편 옆자리에 앉아 있던 지 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너 아직도 방탄 덕질해? 덕질은 학생 때 다 떼고 왔어야지. 이제 어른이면서.”
“뭐래? 덕질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어휴, 유치뽕짝. 좋아할 거면 혼 자 좋아하고 영업은 하지마라. 우리 설이 착해빠져서, 세미 너 주접 떠는 거 끊지도 못하고 들어줄 게 눈에 훤하다, 훤해…….”
“어이없네. 자기도 세 달 전까지는 아주 방탄, 방탄 노래를 불렀으면 서.”
고등학교 동창인 세미와 지연은 방탄복소년단의 열성 팬이었으나 대학교에 들어온 이후로는 노선을 달리했다.
세미는 여전히 덕질에 진심이었고, 지연은 이제 유치한 덕질은 그만 졸업하겠다고 선언했다.
“설아, 우리 오빠들 이번 신곡 뮤 비 한번 봐봐. 내가 왜 이렇게 진 심인지 알게 될 거야. 보고 같이 덕질하자.”
“야, 정세미. 설이가 유치하게 덕질 같은 걸 하겠어?”
핀잔주는 지연에, 세미가 시무룩해졌다.
“하긴……. 설이가 미쳐서 덕질하는 모습은 상상이 안 되긴 한다.”
“당연하지. 설이 너, 덕질이 뭔지 정확히 알긴 해?”
지연의 물음에 잠시 침묵하던 설 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아이돌 좋아하는 거 아 냐?”
“으음, 그냥 좋아하는 수준으론 덕질이라 할 수 없지. 덕질에 진심인 애들은 눈빛부터 달라요. 세미 봐, 세미.”
“내 눈빛이 뭐 어때서!”
“하하……. 그렇구나.”
티격태격하는 세미와 지연의 사이에서, 설은 긴장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 ‘그’ 이설에게 덕질이 뭔 줄 아느 냐고 묻다니…….
엄마 배 속에서부터 ‘우리 오빠 멋져! ’를 외치며 태어났을지도 모를, 20년 장인정신의 덕질 외길 인생 이설에게…….
그러나 현실과는 달리 설은 철저히 일코(*일반인 코스프레) 중이었다.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경영대 여신’ 이 된 이후, 이미지 관리에 신경 쓰느라 그녀는 차마 본능을 표출할 수 없었다.
“설이가 덕질 같은 걸 하겠어?”
그래, 이런 편견에 갇힌 시선 때문에 말이다.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설이 전공 책을 펼쳤다.
“교수님 오셨다. 강의 듣자.”
세미와 함께 마음껏 방탄복소년단 이야기를 못 하는 건 아쉬웠지만 그래도 설은 그럭저럭 견딜 수 있 었다.
왜냐고? 요즘은 방탄복소년단에 진심이던 마음이 조금 시들해졌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새로운 ‘오빠’가 생겼다.
“응? 하데스 루버? 이게 뭐야, 설 아?”
“어?”
무심코 펼쳐진 설의 전공 책을 들 여다보던 세미가 물었다.
설이 세미의 시선을 따라 제 책을 내려다보았다. 한쪽 귀퉁이에 언제 끼적였는지 모를 낙서가 쓰여 있었다.
하데스 루버몬트 존멋탱♡♡♡.
엉엉 오빠 날 가져요 ㅜㅜ.
화들짝 놀란 설이 다급히 펜을 들 어 낙서를 쓱쓱 지웠다.
그러고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 며 변명했다.
“어, 어제 집에서 공부하는데 작은 오빠가 자꾸 괴롭히더니 내 책에 낙서했나 봐.”
“아하, 그래? 그런데 방금 슬쩍 보 니까 오빠 어쩌구 쓰여 있던데? 너 희 작은오빠, 남자 아니니?”
“아아, 남자. 어, 오빤데 당연히 남자 맞지. 장난친 거야, 장난.”
얼버무리는 설을 보는 세미의 눈 이 가늘어졌다.
왜인지 황급히 지운 그 낙서에서는, 덕질 좀 해본 사람끼리만 느낄 수 있는 수상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
그날 저녁, 삼남매의 집.
데이트를 끝마치고 돌아온 둘째 이환이, 분주히 저녁을 차리고 있는 형 이신에게 물었다.
“돼지는?”
“방에. 너 밥 먹었어?”
“난 여친이랑 먹고 왔지.”
“그럼 들어가서 설이 좀 데리고 나와. 밥 먹여야지. 밖에서 말해선 절대 안 나오네.”
신이 절레절레 고개를 젓자, 환이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아오, 나 쟤 방 들어가기 싫단 말이야. 진짜 무슨 광신도 소굴 같다 고.”
“빨리.”
신이 재촉하자, 환은 하는 수 없이 여동생의 방으로 향했다.
그가 이렇게 질색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요즘 설이 한창 미쳐있는 새로운 ‘오빠’ 때문이었다.
여동생의 덕질 역사야 바로 옆에 서 20년을 지켜봐 왔으니 놀랄 것도 아니지만…….
이번에는 조금 심각했다. 새로이 ‘오빠’가 된 인물은, 지금까지 설의 역대 덕질 대상들과는 달리 특이점 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이라는 점.
“후우…….”
심호흡을 한번 한 환이 굳게 마음을 먹고 설의 방 문을 열었다.
“아이씨, 깜짝아.”
그러고는 바로 놀랐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등 신대 때문이었다.
검은 머리에 붉은 눈.
어디 과거 빅토리아 시대에나 입었을 법한 서양풍의 제복 차림.
턱을 세운 거만한 표정이 압권인 2D 그림체의 남성.
이놈이 바로, 설의 새로운 ‘오빠’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로판 소설 〈남주의 엄마가 되어버렸다〉의 남자 주인공 하데스 루버몬트였다.
‘진짜 가지가지…….’
환은 질색하는 얼굴로 설의 방문을 더 젖혀 열었다.
등신대만 보였던 시야가 넓어지자,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는 여동생 방의 풍경이 하나둘씩 더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책상을 빼곡하게 메운 자체제작 응원봉(H라고 쓰여 있고 버 튼을 누르면 불이 들어온다), 2등신 캐릭터 인형, 초상화가 그려진 팬 포스터…….
그뿐일까?
♡우윳빛깔 공작 전하♡.
[완벽], 그것은 오직 [하데스 루버몬트]를 표현하는 단어일 거야.
영〉하데스♡아이샤〈원.
당최 뭔 소린지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들이 적힌 플래카드들은 벽을 전부 에둘러 붙어 있었다.
환의 얼굴이 있는 대로 찌푸려졌다. 진심으로 혐오스럽다는 표정이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