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엄마가 되어버렸다 외전-18화 (207/221)

외전 18화.

“……뭐라고?”

“말 그대롭니다. 정확한 시기는 모 르겠지만 얼마 남지 않았을 거예요. 늙어 죽는 미래는 아니 었거든요.”

“미래를 봤다고?”

“암속성 능력자들은 미래를 보곤 하죠.”

“아니, 그게……. 하.”

미하일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갑자기 미래를 봤다니. 그것도 자신 이 죽는.

혼란스러워진 하데스가 이마를 문 지르며 생각하다 말했다.

“그대의 저주도 풀렸다고 하지 않 았어?”

“아뇨, 저주 때문에 죽는 미래가 아니예요. 그냥 전 제 죽음을 미리 봤을 뿐이죠.”

“그러니까 왜, 그대가? 저주까지 풀고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도 없는 데…….”

“미하일 라이가르트가 단명할 운명이었나 보죠?”

“젠장! 그러니까 그대의 형제는! 그 놈의 운명이라는 것도 뒤집을 수 있을 만큼 전능한 자 아니었나? 겨우 가이오니아를 죽여놨더 니 이게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이를 갈며 분노하는 하데스를, 미하일이 놀란 눈으로 빤히 바라봤다.

“이거 영광인걸요. 전하께서는 제 가 요절한다면 뭐 이런 경사가 다 있냐며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그걸 말이라고 해? 아이샤가 얼마 나 충격받겠어?”

“흐음……. 역시 공작부인 때문이 신 거죠?”

“그래! 그대가 빨리 죽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아이샤 때문이지!”

버럭 소리 지르며 미운 말을 하긴 했지민, 당황해하는 진심을 엿보지 못할 미하일이 아니 었다.

그는 하데스의 신선한 반응에 큭큭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왠지 전하께서 제 죽음을 슬퍼해주실 듯하니, 그리 의미 없는 삶은 아니 었다고 생각되는군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왜, 어떻게 죽는데? 지금 어디 아파?”

“아뇨, 잘 모르겠네요. 뭔가…….”

미하일은 미간을 살짝 좁힌 채, 어 렴풋이 보았던 미래를 떠올렸다.

“오색 불빛이 빵빵 터지던 밤하늘 아래였을까요. 거기서 그저 잠들듯 편안히 눈을 감았던 터라…….”

“돌겠군. 그대의 형제라는 자의 속 내는 도무지 알 수가 없어. 기껏 힘들 게 저주를 풀어놨더니…….”

주먹을 꽉 쥔 채 하데스가 부들부들 떨었다.

미하일도 프로크레아토르의 생각이 궁금했다. 하지만, 뭔가 이유가 있겠 거니 할 뿐이었다.

“아무튼 제 비밀은 꼭 지켜주십시 오. 두 분의 귀여운 둘째를 못 보고 떠나는 건 아쉽지만, 서둘러야겠습니다.”

“정말 떠나겠다고? 다시 생각해보는 게 어때? 데보라도 여기 맡기지 않았나. 옆에는 아무도 없는데, 혼자 타지에서 조용히 죽겠다고?”

“어쩔 수 없잖아요. 여기에서 죽었 다간 부인의 상심이 클 텐데. 혹시라 도 태어날 아기님께 해라도 끼치면 큰일이 잖습니까.”

안타까웠지만 미하일의 말은 틀리 지 않았다.

아마도 죽기 직전, 누구보다 가까운 형제인 아이샤가 곁에 있어 주는 것이 가장 행복하겠지만…….

그의 말마따나 아이샤나 배 속의 아이에게 크나큰 충격이 될 일은 만들 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제모습이 조금 이기적으로 느껴져서, 하데스는 괴로웠다.

***

세례를 마치고 잠깐 숨 돌리는 틈에, 하데스가 내 방을 찾아왔다.

“뭐 해?”

“태교 중!”

하데스는 내가 읽고 있던 책 표지를 슬쩍 들어 확인했다. 그의 잘생긴 미 간이 대번에 불만으로 좁혀졌다.

“이유해한 책으로 태교를 한다 고?”

“유해하다뇨.”

〈페르소나〉. 오랜만에 본 김에 다시 정주행했다가 지금은 프로크레아토르가 보내준 특별 외전을 읽는 중이었다.

내가 원했던 아벨과 데보라의 무해 한 사랑 이야기로만 가득한!

이만한 태교가 없었다.

“그대 일정은 내가 다 차단했어. 몸을 조심해야 하니까. 혹시 그래도 꾸 역꾸역 얼굴 보겠다고 찾아오는 놈들 있으면 말해.”

하데스가 내 앞에 앉으며 말했다.

음, 혹시 방문객이 있더라도 말하면 안 되겠다.

하데스의 표정을 보니 내게 인사한 번 하러 왔다가 황천길 건너게 생겼다.

“그렇게까지 과보호 안 해줘도 돼요. 의원 하는 말이, 제일 조심해야 할 건 당신이래.”

“뭐?”

“풉. 임신 초기에는 되도록 하지 말 라더라고요. 아쉽지만 당분간 따로자요, 우리.”

“그래? 그런데 안 하면 안 하는 거 지, 따로 자는 게 어디 있어?”

의자를 쓱 옮겨온 하데스가 내 옆에 바짝 붙었다. 허리에 팔을 두르고 배를 느른히 쓰다듬는 손길에 사심이 가득했다.

“이 짐승.”

“이제 알았어?”

놀란 눈으로 장난치는 하데스를 보 며 나는 웃어버렸다.

“아벨 생일에 짠, 말해주면 정말 좋 아하겠죠?”

“그러겠지. 그런데 아이샤, 그, 대신관 말이야…….”

“이그니스? 왜요?”

하데스는 왜인지 망설이는 표정으 로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 저었다.

“아무것도 아냐.”

“뭐야, 싱겁게. 아, 맞다. 이번에 내가〈페르소나〉대필해 준 작가한테 도 초대장 보냈어요.”

영문도 모른 채 하데스에게 소환당 하고 내게 포옹당한 그 작가.

내 말에 하데스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자는 또 왜?”

“하하……. 외전도 써준 고마운 사람인데 맛있는 거 많이 먹고 가라고요.”

“별…….”

그리고혹시나 또 꿈에서 프로크레아토르를 만나지는 않았을지, 저 쪽 세계에서 그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이지, 안부를 물을 생각이기도 했다.

너도 잘 지낼까.

나는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는데.

***

작가는 그날 오후에 성에 도착했다.

호화롭게 차려진 티타임 테이블에 눈이 휘둥그레진 작가는, 필명이 뭐냐는 내 질문에 부끄러워하며 대답했다.

“시, 실버라이트입니다. 공작부인. 크홈!”

“풉! 어, 어머. 미안해요. 굉장히 멋 진 이름이네요.”

내 차명인 더글라스 후라네에 필적할 만큼 촌스러운 그의 필명에 나는 마시 던 차를 뿜을 뻔했다.

작명 센스가 너무나 안타깝다. 차라리 한국어 패치라도 시켰으면 좋을 텐데.

은빛? 너무 평범하고 직관적인가.

그러면 한자 써서 은채? 그런 게 좋을이지도…….

아무튼, 실버라이트 작가도 자기 필 명 촌스러운 건 아는 모양인지 부끄 러워하는 얼굴로 찻잔을 기울였다.

실버라이트 씨는 비싼 차를 맛보고 대번에 얼굴이 밝아졌다.

“차 맛이 괜찮나요?”

“네, 부인! 이렇게 초대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처음에 공작 전하께 불려갔을 땐 죽었구나, 싶었는데 지금은 그 책 낸 게 얼마나 다행이다 싶은지…….”

“너무 재미있게 읽었어요. 고마워요.”

“아유, 아닙니다. 덕분에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이렇게 부인께 초대도 받고……. 영광이죠.”

“후후……. 이제 유명한 작가가 됐 으니 차기작도 써야죠?”

또 뭐 꿈이라도 꾼 게 없나, 은근히운을 떼자 실버라이트 씨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제 운은 그 책 내는 데 다 쓰지 않 았나 싶습니다. 여태껏 전 아무리 열 심히 써도 졸작만 만들었거든요. 뭐, 그 책도 따지고 보면 꿈속의 남자가 도와준 거였고.”

금세 풀이 죽는 실버라이트 씨의 얼굴이 왜인지 안타까웠다.

나는 그를 위로했다.

“아니예요. 뭔가 재능이 있으니 그 꿈속의 남자도 실버라이트 씨를 찾았 겠죠.”

“글쎄요. 차기작이라고 해도…… 딱히 대중들이 재밌어할 만한 소재도 안 떠오르고…….”

“음, 그러면 내 이야기를 좀 해줄까 요?”

“네? 공작부인의 이야기요?”

저쪽 세계에서〈페르소나〉읽다가 차에 치인 비운의 덕후는 죽어서 그 책 속 조연 1로 빙의하지.

그리고 최애 캐릭터인 남주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그 남주의 아버님께 딱 걸리고 만다. 이러쿵저러쿵 하다가 결국 그 아버님과 결혼하고 남주의 엄마가 되는……!

‘홈, 내 인생은 나름 재미있었는데 소설로 쓰면 안 팔리려나.’

고민하는 나를 실버라이트 씨가 재 촉했다.

“무슨 이야긴가요?”

“제가 언젠가 꿨던 꿈 이야긴데, 나 름 재미있었어요. 들려줄까요?”

“영광입니다!”

“맨입으론 안 되고…….”

내 말에 실버라이트 씨가 고개를 갸 웃했다.

“혹시 꿈속에 나왔던 그 남자, 그 이후로는 만나지 못했나요?”

“아…….”

잠시 생각하던 실버라이트 씨가 탄 성을 내뱉었다. 뭔가 있는 듯했다.

“만났어요?”

“그…… 사실, 이를 전에 또 꿈에 나오긴 했어요.”

“어머, 정말요? 뭐라고 하던가요? 혹시 제 얘긴 안 했어요?”

“네? 공작부인 얘기요?”

“아, 아니예요. 뭐라고 했는지 궁금해요. 어서 말해봐요.”

“급하게 찾아와선 편지를 한 통 전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옮겨 쓴 편지 안에 적힌 이름들이 대체 누 굴 가리키는지 몰라서…….”

“뭐라고 쓰여 있던가요? 누구에게 전해달라고 했어요?”

왜인지 실버라이트 씨는 말하기를 망설였다.

나는 차분히 기다렸고, 한참 눈치를 보던 실버라이트 씨가 옷 안쪽에서 두 번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신전의 대신관님께 전해달라고 하던데요. 그런데 저 같은 놈이 대신관 님을 어떻게 뵙겠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혹시, 부인께서…….”

“오! 잘 가져왔어요! 내가 전해줄 수 있어요!”

편지를 받아들려는데, 갑자기 실버 라이트 씨가 손을 휙 당겨 그것을 걷 어갔다.

“저…… 근데 내용이 너무너무 불 경해서……. 이거 절대 제가 쓴 거 아니고, 꿈속의 남자가 쓰란 대로 받아 적었을 뿐이거든요.”

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나는 걱정하는 실버라이트 씨가 안 심하도록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마요. 무슨 내용이든 실 버라이트 씨에게 피해 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래 주시면 감사합니다.”

마음이 놓였는지 실버라이트 씨가 내게 편지를 넘 겼다.

그다음 그는 재빨리 말했다.

“부인께서 재미있게 꾸셨다는 꿈 얘기, 해주실 거죠?”

“아, 그럼요. 대신…….”

일단은 내 이야기를 소설로 엮는 거 니, 제목은 좀 멋졌으면 좋겠다.

실버라이트 씨의 작명 센스가 약간 걱정됐던 나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제목 너무 유치하게 지으면 안 돼 요?”

“아이구, 그럼요! 고심에 고심을 거 듭해 짓도록 하겠습니다! 들려만 주 세요!”

그는 의욕이 넘치는 표정으로 불끈 주먹 쥐었다.

음, 조금 못 미더운데…….

***

[사랑하는 내 형제, 이그니스 보아 라.]

실버라이트 씨에게 받은 편지를 먼저 열어본 나는, 뿌옇게 흐려진 시야를 연신 훔치며 미하일의 방으로 향 하고 있었다.

전해주고 싶은 내용이 아닌데, 또전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편지였다.

[오랜만에 연락해 대뜸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얼른 좀 죽어줘야겠다.]

미하일, 아니, 이그니스는 간절히 바라고 있을 테니까.

사랑하는 연인과의 재회를.

[네 연인이 지금, 내 세계에 생겨났 단다. 아직 8개월이야. 아직 제대로만들어지지도 않았는데, 너를 보고 싶어 하는 영혼의 의지가 강하게 느 껴지더라.]

[아마 너는 그곳에서 더 행복을 만 끽하고 싶겠지만, 그러려면 또 오랜 세월을 기다려 만나야 할 테니……. 나는 지금 네가 와줬으면 해.]

벌컥 미하일의 방 문을 열자, 그는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인형처럼 의자에 앉아 책장을 넘기 고 있던 미하일이, 우는 내 모습에 당 황한 얼굴로 다가왔다.

“왜 그래? 왜 울어?”

[제누스는 그곳에서 조금 더 행복 하게 두자. 네가 끝까지 챙겨줄 수 없 음이 아쉽겠지만, 그 애를 사랑하고 아껴주고 지켜줄 이들은 많으니 너무 걱정하지마라.]

이 편지를 전해주면 미하일은 어떤 선택을 할까?

당장 기쁘게 죽으려고 하겠지?

“우, 우으…….”

“왜 그러냐니까? 설마 공작이 널 울 린 거야? 이 자식이 내 경고를 귓등으로 들었나…….”

울컥한 미하일이 하데스를 반 죽여 놓을 기세로 방을 나서려 했다.

나는 급히 그의 팔을 붙들어 말렸다.

“그런, 그런 거 아니고…….”

“아니면 뭔데?!”

[지금까지 정말 힘들었다. 고생 많 았어. 제누스가 그곳에서 자기 운명을 다 마치고 나면, 이곳으로 초대해도 좋겠지. 그럼 아마 다다음 생쯤에는 우리 형제들이 함께할 수 있을지 도몰라.]

그의 말은 사실일 테지. 그러니까 이게 영원한 끝이 아니라는 걸 알면 서도…….

나는 당장의 이별이 아쉬워 미하일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나는 그에게 프로크레아토르의 편지를 내밀며 물었다.

“……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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