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7화.
“……그게 뭔, 말, 이냐?”
멍하니 록사의 말을 이해하던 하데스가 물었다.
냉큼 일어난 록사가, 아직 아이샤의 마력이 남아 여전히 두 가지 빛을 내 보이는 마도구를 들이밀 었다.
“지가 이거 대단한 발명품이라 했 지라? 태중에 있는 아기님의 마력 수치까지 확인할 수 있다는 게, 이마도 구의 진짜 핵심이었다고예!”
“그러니까…….”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하데스가 천천히 다가와 마도구를 받아들었다.
반은 백색. 백속성인 아이샤의 마력반은 적색. 아이샤가 자식을 갖는다 면 우성인 화속성을 갖고 태어날 테 니, 만약 그녀에게 둘째가 생겼다면 화속성 능력자일 것이었다.
백속성 최종 개방 능력자인 아이샤의 백색 마력은 물론이고, 적색의 마력까지 투명도라곤 조금도 없이 진했다.
그러니까 아버지인 하데스만큼이나 강한 마력 수치를 가진 화속성의 아이가…….
아이샤의 배 속에 있다는 거다.
“내, 내가 임신했다는 거예요?”
놀란 아이샤가 묻자 록사가 코끝을 쓱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지라! 요거이 그 증거인께! 후딱 의원에게 가서 진찰 받아보셔 라!”
“마, 마, 말도 안 돼…….”
아이샤가 입을 틀어막고 놀랐다.
그래, 생각해보니…….
‘이번 달에 생리 안 했다!’
아이 생기길 고대하느라 매달 예민 하게 주의를 기울였던 그녀지만, 요 한 달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를 만큼 바빠서 잠깐 신경 쓰지 못했다.
사실 의원에게 내보이더라도, 생긴 지 한 달도 안 됐을 테니 임신을 확 진할 수는 없었을지도.
한데 ‘천재 마법사’가 만든 ‘임신 진 단 마도구’로는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 무엇보다 확실한, 임신 확진이었다.
“정말로……?”
영혼이 쏙 빠진 듯 멍한 얼굴로 하데스가 중얼거 렸다.
“아, 저 못 믿으심까?!”
“믿지. 내가 너 말고 누굴 믿겠어.”
냉큼 대답하는 하데스의 표정은 전에 없이 다정했다. 백팔십도 바뀐 반응에 록사가 혀를 내둘렀다.
가만히 마도구를 내려다보며 떨던 하데스가 천천히 아이샤를 돌아보았다. 그녀도 감격한 표정이었다.
“여, 여보…….”
“후…… 하…….”
하데스가 천천히 심호흡했다.
“젠장, 이거, 생각보다…….”
친자 감별 마도구 덕에, 아이샤와 자식을 가진 게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게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기억 은 없었다.
그러니까 처음으로 느껴보는 거였다.
사랑하는 여자의 배 속에, 사랑의 결실이 생겼을 때의 그 감동.
“후…….”
한참 감정을 갈무리하던 하데스는 어 째선 지 따끔따끔한 눈가를 큰 손으 로 덮었다.
“에에~ 운다~ 울어~”
록사가 히죽거리며 하데스의 옆에 서 기웃거렸다.
“와〜 그 누가 상상이라도 할까예? 그 루버몬트 공작이 이렇게 질질 짜 고 있는 거?”
“누가 질질 짜.”
평소라면 한 대 때려줬겠지만, 지금 은 록사가 누구보다 예쁘다. 하데스는 그를 살짝 밀어내고 말았다.
“아이샤…….”
“응…….”
그래도 바보처럼 엉엉 울 순 없어서 겨우 참고 손을 떼니, 아이샤의 얼굴 은 이미 눈물범 벅이 었다.
이내 하데스는 아이샤를 번쩍 안아 들고는, 록사처럼 성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젠장!!! 사랑해!!!”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난폭한 고백이었다.
“꺄악!”
번쩍 들린 아이샤가 우는지, 웃는지 모를 표정으로 하데스의 어깨를 팡팡 내리쳤다.
록사가 질 겁하며 말렸다.
“전하! 누가 임산부를 이렇게 위험 하게 번쩍번쩍 들지라? 얼마나 감동 이신지는 알겄는디 진정하셔예!”
“아, 이런! 괜찮아?”
록사의 말에 멈칫한 하데스가 조심 조심 아이샤를 내려놓았다.
“괜찮아요.”
수줍게 뺨을 붉히는 아이샤를 내려 다보는데 자꾸 입술이 말랐다.
마른 입술을 연신 달싹이는 하데스의 입꼬리는, 어찌할 바 모르고 씰룩거리고 있었다.
“이거 미치겠네, 진짜…….”
뭔가 이 감동을 조금 더 표현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었다.
하데스가 대뜸, 아이샤 대신 옆에 있던 록사의 허리를 붙잡아 안으며 허공으로 띄웠다.
“아악!!!”
“너 이 자식! 수고했다!”
“아니, 지는 왜 껴안고 난리셔라! 남세스럽게!”
“안는 거 싫냐? 업어주랴?”
“됐어라! 됐어! 남자 둘이서 민망하 게 뭔 짓이여라!”
록사가 버둥거렸지만 하데스는 그를 놔주지 않았다.
들어서 띄우고, 껴안고, 돌리고 한참 난리를 피울 때까지 록사는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갖고 싶은 거 없냐? 원하는 게 있 으면 말만 해라. 황제 한번 해볼 테 냐?”
“우욱……! 토할 것 같아……. 애, 애먼 사람 입덧하게 만들지 마, 마시 고 제가 바라는 거는, 그만, 그 만……. 저를 내려놔…….”
“아, 여보. 그만해요. 그러다 정말 록사 씨 죽겠어요.”
하데스를 말리며 아이샤가 웃었고 그도 입이 귀에 걸린 채 마주 웃었다.
이제는 피곤함 따위 생각도 나지 않 았다.
***
씰룩, 씰룩.
아벨은 도무지 하데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아버지가 왜 저러시지?’
미하일과 고위급 신관들, 데보라까 지 함께하는 식사 자리.
예의와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임을 모르지도 않을 텐데…….
‘뭐가 저렇게 웃기신 거야, 대체?’
하데스는 식사 도중 자꾸 실없이 웃 었고, 아벨이 눈치를 주면 억지로 입 꼬리를 끌어내리느라 아주 웃긴 얼굴 이 되곤 했다.
불손한 생각이지만, 그는 좀…… 미 친 것 같았다.
“하하하……. 우리 공작 전하께서 뭔가, 즐거운 일이라도 있으신 모양입니다.”
신관들이 전부 하데스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었고 보다 못한 미하일이 어색하게 웃으며 한 마디 했다.
그가 참고 참다 눈치를 줬음은,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다 알았다.
아벨은 괜히 제 얼굴이 화끈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머니라도 말리시지.’
더 당황스러운 건, 아이샤도 그런 하데스를 말릴 생각 없이 같이 실실거리고 있단 사실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신관들 앞에서 연신 히죽거리는 부부는…….
쌍으로 미친 것 같았다.
“기분, 그래, 어……. 좋지! 우리 대신관 얼굴을 오랜만에 봤는데 어찌 좋지 않겠소.”
헤벌쭉 벌어지는 입을 차마 막을 수 없는지 하데스는 손을 들어 제 뺨을 꽉 쥐었다.
미하일이 가늘게 눈을 뜨고 그런 하데스를 빤히 바라봤다.
“아아, 영광이긴 합니다만 믿기지는 않는군요. 진심이신가요? 진심을 알려주시죠?”
하데스와 눈을 맞추며 미하일이 빙 긋 웃었다.
“하하, 아니. 내가 미쳤다고 지긋지 긋한 대신관 얼굴 보고 좋아서 이렇 게 웃겠나.”
헉.
너무나도 진심인 말이 튀어나와 버 렸다. 누군가가 놀라 탄성을 터뜨렸다.
순간 흠칫한 하데스가, 인상을 확 구기곤 미하일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미하일은 어 깨를 으쓱하며 다시 식사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부부만 행복한 식사가 다시 재개되 었다.
“왜 이렇게 깨작거려? 많이 먹어야 지.”
“입맛이 없어요.”
입술을 쭉 내밀며 아이샤가 투정 부 리듯 말하자, 하데스가 검지로 그녀의 입술을 톡 건드렸다.
“입맛이 왜 없어. 음식이 맛이 없는 거야? 아니면 먹고 싶은 게 없어?”
대놓고 다정한 하데스의 모습에 신 관들은 체할 듯한 기분이 되어 그들을 힐끔거렸다.
“그냥 다 별로……. 이따가 디저트 나 좀 먹을게요. 케이크나 푸딩, 그런 거 먹고 싶어.”
“디저트…….”
테이블 위를 휘 둘러보던 하데스가 인상을 확 구기고는, 딱 소리 나게 손 가락을 튕겼다.
식사를 돕기 위해 근처에 대기 중이 던 집사와 주방장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대체 왜 디저트가 없어? 케이크, 푸딩, 그리고 그, 내 아내가 좋아하는 거 있잖아. 그거 뭐야.”
“딸기 들어간 타르트요.”
아이샤가 냉큼 말하자 하데스가 고 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 왜 하나도 안 올라와 있지?”
“아, 식사 순서가 지금은…….”
“집사?”
당황한 집사가 얼버무리자 하데스 가 험악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기 울였다.
“대체 순서가 무슨 상관이야? 내 아 내가 먹고 싶다는데?”
“괜찮아요, 여보. 기다렸다가 다 같 이 먹어야죠.”
아이샤가 하데스의 팔을 잡고 말렸 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집 사를 몰아붙였다.
“내 유능한 집사가 언제부터 이렇 게 눈치를 저세상으로 보냈지?”
집사, 테롯 경은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버릇처럼 외알 안경을 슬쩍 고 쳐 썼다.
식사 내내 지켜보았기 때문에 알고는 있었지만…….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하데스가 단단히 정신이 나가버린 모양이라고 그 또한 생각했다.
“당장 대령하겠습니다, 전하.”
옆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주방장이 집사 대신 냉큼 대답했고 하데스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날 점심에 아이샤는, 하데스가 손 수 입에 넣어주는 디저트를 배가 터질 정도로 먹었다.
***
세례를 준비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 고 있던 미하일은, 직접 방까지 찾아온 하데스를 맞았다.
방문이 열리자마자 하데스는 눈인 사도 없이 휘적휘적 들어왔다. 태연 하게 의자를 빼 다리를 착 꼬고 앉는 폼까지, 완벽하게 거만했다.
턱을 휙 치켜든 하데스가 바로 물었다.
“암속성 능력, 여전하지?”
“네? 그 저주받은 능력이 왜요? 가이오니아가 죽었을 때 사라진 힘 아니었던가요?”
“아니, 대놓고 나한테 세뇌를 걸어 놓고 발뺌하려 해?”
“하하하……. 먼저 거짓말을 한 건 전하셨잖습니까. 절 오랜만에 봐서 기쁘시다니. 그대로 듣고 있으려니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서요.”
“놀랍군. 능력이 여전하다니. 안 그 래도 싫었는데 더 싫어졌어.”
“걱정하지마세요. 꼭 필요한 곳에, 공익을 위해서만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공작부인께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그럴 생각이야. 가이오니아의 흔 적을 떠올리는 걸 아주 싫어하거든. 그대의 저주는, 제대로 풀린 게 맞 지?”
“그건 걱정하지마십시오. 이 능력 은…… 가이오니아가 남긴 흔적이라 기보다는, 제 형제가 유용하게 쓰라 고 제게 남겨준 마지막 선물이니까요.”
“선물은 무슨. 찝찝한 능력이구만.”
“그나저나 왜 이렇게 기분이 좋으 시죠? 궁금하네요.”
미하일이 하데스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물었다.
그의 질문에, 멈칫하던 하데스의 입 꼬리가 다시금 슬쩍 올라갔다.
하데스는 또 얼굴근육을 이상하게 움직이며 억지로 웃음을 참다가 고개 저었다.
“아무것도 아냐.”
“하하…….”
문득, 눈이 마주쳤다.
“궁금하네요. 말해보세요.”
“아이샤가 임신했어.”
“세상에. 그렇군요.”
세뇌에 걸려 냉큼 대답한 하데스가 정신을 차리곤 버럭 소리 질렀다.
“안 쓴다며! 그 재수 없는 능력!”
“공익을 위해서는 쓰고 있다고 말 씀드렸습니다만.”
빙긋 웃던 미하일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웃는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일단은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걱 정이군요.”
“뭐가?”
미하일은 잠깐, 전에 보았던 미래를 떠올렸다.
지금의 모습과 별다르지 않은 얼굴 로 자신은 죽었다.
남은 시간은 일 년? 그마저도 확신할수 없다.
임신 중에 형제의 죽음을 지켜봐야 한다면, 아이샤에게는 그보다 더한 충격이 없을 터.
“세례 원정을 떠난다고 하고, 외국으로 좀 나가 있어야겠어요.”
고민하던 미하일이 턱을 문지르며 혼잣말하자, 하데스가 인상을 확 찌 푸렸다.
“뭔 소리야?”
“아.”
하데스에게는 말해두는 편이, 아이샤에게 변명하기에도 수월할 테지.
미하일은 덤덤하게 말했다.
“저 곧 죽거든요.”
마치 오늘 날씨가 좋네요, 하는 형식적인 인사처럼 덤덤한 고백.
멍하니 그 고백을 곱씹으며 이해하 던 하데스는, 당황으로 굳었다.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