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3화.
“어머니!”
놀란 아벨이 쓰러진 아이샤를 먼저 안았다.
그녀를 충격으로 기절시킨 장본인 인 하데스는 차마 손도 뻗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아벨에게 말했다.
“네 어머니를 방으로 옮기고 의원을 불러 상태를 봐라.”
“아버지는요?”
“난 여기 일을 마무리 짓고 가야 지.”
무심한 표정의 하데스에 아벨은 헛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어머니가 쓰러진 와중에도 아버지는 한결같이 ‘루버몬트 공작’의 의무가 우선이었다.
그는 변한 게 아니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을 뿐이다.
기사를 불러 함께 쓰러진 아이샤를 수습한 아벨이 록사의 집무실을 나서 고, 하데스는 힘없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잔뜩 당황하고 있던 록사가 무슨 일 인지 물었지만, 하데스는 대답 대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시몬이라고 했나?”
“예, 예. 전하…….”
“그래, 날 찾은 이유가 뭐라고?”
“아, 저, 그…….”
시몬은 왜인지 전과 달리 긴장한 얼굴이었다. 아마 마도구의 쓰임을 제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일 터.
얼버무리는 시몬 대신 여자가 말했다.
“전 루버몬트 사람이 아니라 그란델 영지 사람이에요. 그란델로 여행 왔던 저 사람을 1년 반쯤 전에 만났 고 그때 아이를 가졌어요.”
“야, 야!”
“계속 말해보게.”
“……경솔했다는 건 알지만 그땐 저도 어려서 생각이 없었나 봐요. 결혼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니, 돈을 벌 어 돌아오겠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 어요.”
그때는 어 렸다, 라고 하기에…… 여자는 지금도 충분히 어렸다. 아이샤 보다도 더 어려 보이는 얼굴이었다.
반대로 시몬은 하데스보다도 나이 가 더 들어 보였고.
“아이가 생긴 걸 알았어도 연락할 방법이 없었어요. 저이가 루버몬트 출신이라는 것 말곤 아는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아이를 낳고 나서 어쩔 수 없이 맨몸으로 여길 찾아왔지만, 저 사람은 이미 결혼을 약속한 여자 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 이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끔 찍하군. 시몬이라고 했나?”
“조, 존경하는 공작 전하. 저 여자 가 어디서 뭘 하던 여자인지 제가 어 떻게 압니까? 여행하던 곳에서 잠깐 만났을 뿐이고 솔직히 그때는 술 취 해서 했는지 안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나요. 저는 억울합니다.”
시몬은 대뜸 하데스의 팔을 붙잡으 며 호소했다.
“전하께서는 제 억울한 심정을 이 해할 수 있으시죠? 얼굴 한 번 본 게 다인 여자가 갑자기 찾아와 저게 내 자식이라고 하는데, 그럼 저는 어떻 게 해야 합니까? 그래, 내 자식이구 나, 하고 책임져야 해요? 예?”
“당연히 그럴 필은 없지. 그래서 내 똑똑한 마법사가 좋은 마도구를 만들 어주지 않았나.”
“자, 잠깐만요. 전하.”
마도구를 들이미는 하데스 앞에서 시몬이 벌벌 떨었다.
일순 하데스의 눈이 무섭게 빛났다.
“시간 끌지 마라. 나는 당장 이 일을 처리하고 내 아내에게 가봐야 하 거든.”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머리통을 불태울 기세였다.
결국 시몬은 떨리는 손을 마도구 위로 가져갔고,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푸른 빛으로 반응하는 마도구를 보 며 하데스는 감흥 없이 여자에게 말 했다.
“사정은 이해했어. 내 영지민이 아 주 부끄러운 짓거리를 했군. 아이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제가 키울 거예요. 소란 피워 죄송 해요.”
“그래. 갓난아기를 데리고 루버몬트까지 와서 겪은 수모에 보답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가 무사히 자랄 때까지 재물을 부족함 없이 지원하지. 그란델 자작에게 직접 연락하 겠어.”
“네, 네? 아, 아뇨. 그, 그러실 필요 까지는…….”
“네?!”
부담스러워하는 여자와 달리 시몬의 눈은 번뜩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시몬이 갑자기 포대기에 싸 인 아이를 안고는 울기 시작했다.
“하, 이게…… 이게 내 애라니.”
여자와 하데스, 록사의 시선이 물끄러미 그에게로 향했다.
시몬은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다가 다시 훌쩍거 렸다.
“이, 이렇게 확인을 받으니 마음이 편합니다. 아기도 못난 아빠가 야속 했을 텐데, 사죄하는 마음으로 평생 봉사하며 살겠습니다. 혹…….”
아주 잠깐 정적이 흘렀고 하데스가 여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미 한 번 애를 외면하고 엄마를 모함까지 하려던 자에게 아빠 자격 따윈 없지. 그래도 아이에게 아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선택은 자유지만…….”
“제가요? 정말 싫어요.”
여자는 단호했다.
“좋아, 잘 생각했군.”
“저, 전하? 자, 잠깐만요. 잠깐 만…….”
“이봐! 밖에 있나?”
“예, 전하!”
곧바로 기사 하나가 들어왔고 하데스는 벌레 보듯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시몬을 턱짓했다.
“끌고 나가.”
“저, 전하! 잠깐만요! 잠깐만!”
“우리 영지의 이름에 먹칠한 죄는 차차 물을 테니 기다리고.”
“저, 전하!!!”
한바탕 소란은 재빠르게 일단락되 었다.
그 길로 하데스는 바로 아이샤의 방으로 향했다. 이미 의원이 다녀간 후 인지 방에는 죽은 듯 기절한 아이샤 와, 곁을 지키는 아벨뿐이었다.
하데스가 온 기척을 느꼈는지, 아벨 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아버지는 진실을 말해주셔야 했어요. 적어도 어머니에게는.”
아벨은 배신감을 느꼈다.
하데스는 자식의 존재를 알면서도 5년 동안 모른 척했고, 필요에 의해 자신을 다시 찾은 거였다.
사실, 그마저도 괜찮았다. 대귀족 가문의 수장이니 어쩔 수 없는 선택 이 었다고 한다면.
그렇지만…….
“그렇지만 어머니에게는, 어머니에게는 사실대로 말하셨어야죠. 어머니는 정말로 아버지를 믿었고, 제가 사 생아라도 상관없다고 말하시는 분이 었는데.”
충격받아 그 자리에서 기절한 아이샤가 안쓰러웠다.
아벨은 눈물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 어났다.
돌아본 하데스의 표정은 무심했다. 그 와중에도 한결같은 그의 모습이, 아벨은 못내 서 러웠다.
“죄송해요. 아버지 얼굴을 못 보겠 어요.”
아벨이 그대로 방을 나섰고, 지그시 눈을 감은 하데스의 입에서는 긴 한 숨이 흘렀다.
***
이튿날, 파르넬리 공저.
말끔하게 차려입은 말콤과 세레나 가 화려한 공저로 들어섰다.
좌우로 기립한 기사들이 둘을 향해 깍듯이 인사했다. 어제 이후로, 손바 닥 뒤집듯 달라진 대우였다.
“이런 영광이 다 있니. 마법 재단 소속 마법사들은 평생 가도 얼굴 한번 보기 힘들다던데, 우리는 재단 발표식에 초대도 되고 말이야.”
“다 내 공인 줄이나 아세요.”
“그럼, 그럼.”
비정기적으로 열리는 마법 재단의 발표식은 아무나 참석할 수 없는 자리였는데, 말콤과 세레나는 초대받았다.
그것도 하데스가 친히 사람을 보내 참석을 명했으며, 값비싼 옷과 보석으로 치장까지 시켜주었다.
이건 전부, 어제 식사 자리에서 세레나가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결과였다.
안내된 자리에 앉은 말콤이 뿌듯한얼굴로 세레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솔직히 어제는 너무 과한 게 아닌 가 했는데……. 이렇게 된 걸 보면 네 가 아주 잘해줬다. 들어보니 공작부인은 앓아누웠다던데?”
“불쌍해라……. 공작도 참 잔인한 사람이에요. 끝까지 공자를 자기 친 아들로 남길 생각인 모양이죠? 이쯤 되면 공자의 그 투명한 핵석이 대체 뭔지 궁금해지네요.”
“뭔지는 몰라도 우리의 구명줄이었 던 건 분명하지.”
소리를 죽여 장난스럽게 킬킬 웃은 말콤이 공저를 둘러보았다.
그 능력이 하나같이 대단하여,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귀족 대우를 받는다는 마법 재단 소속의 마법사들이 한 데 모여 있었다.
그들뿐인가.
멀찍이 가장 화려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하데스와 아벨, 바로 그 옆에 앉 은 대신관…….
게다가 루버몬트 공작의 오른팔로 공공연히 알려진 붉은 머리카락의 군 단장도 그들 곁에 있었다.
‘세계 대재앙’이 일어났을 때 함께했다는 그 대단한 루버몬트의 측근들 이 한데 모인 것이다.
‘나도 저 옆으로 한 자리 빼주지. 왜 구석 탱이야.’
말콤이 속으로 서운해하는데 단상 위에 누군가가 올라왔다.
‘하얀 마법사!’
소문으로만 익히 들어왔던 대단한 남자!
“제국에 딱 두 명 있는 거 알지? 토 속성 최종 개방 능력자 말이야.”
“저게 그 사람이에요? 하얀 마법 사?”
“그래, 못 만드는 게 없다지. 생각 해 봐라. 창조 마법만큼 강력한 무기 가 있겠니. 공작이 금이야 옥이야 아 끼겠지. 그래서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는다고 하더라. 많이 봐두렴.”
“어차피 이제 성에서 지내게 되면 질리도록 볼 수 있을 텐데요, 뭐.”
“아유, 그러시겠죠. 마님.”
잘 꾸며 진 채 초대받아 콧대 가 하늘까지 솟아오른 둘은 계속 조잘거렸다.
“아아, 루버몬트 마법 재단 수장, 록사 트리볼트지라~! 확성 마법 잘들어가고 있는감? 록사 트리볼트의 14번째 역작인 영상 기록구도 제대 로 돌아가고 있고잉?”
우스운 말투와 격식 없는 목소리였 지만, 재단 마법사들은 익숙한 듯 그의 말을 경청했다.
“우선 공부하랴, 연구하랴 바쁜 와 중에 발표식에 참석한 우리 마법 재 단 꿈나무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 니데이. 나가 요래 급작스럽게 발표 식을 준비한 이유는 뭐냐 하믄…….”
록사가 손짓했고 대기하던 기사 둘 이 무언가를 단상 위에 올렸다.
제법 큼직한 크기의 무색투명한 수 정 구슬.
“이번에 새로운 마도구를 발명해 서, 고거 발표회를 할라고. 요거로 말 할 것 같으면, 아〜주 고차원적인 발 명품이지라. 제작 원리는 거, 각자 나 눠준 보고서 참고하시고.”
재단 마법사들에게만 돌린 줄 알았 던 보고서는, 말콤과 세레나가 앉은 테이블에도 있었다.
세레나가 먼저 보고 있던 종이 위로 말콤이 힐끔 시선을 던졌다.
“이, 이게…….”
“왜? 뭔데 그러니?”
왜인지 세레나의 낯빛이 창백해져 있었다. 의아한 말콤이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을 빼앗아 훑었다.
‘친자 감별……마도구?’
말콤의 표정도 사색이 되었다.
“요 마도구는, 사생아 문제로 고초를 겪는 많은 제국 귀족들을 대상으 로 충분히 상업화를 시킬 수 있는 여 지가 있다〜 나는 이렇게 생각을 하 지라.”
그때까지만 해도 말콤과 세레나 쪽 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던 록사가, 돌연 그들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오늘 요 친자 감별 마도구의 시연을 도와주실 분은, 우리 공자님의 친모라고 주장하시는 세레나 양이지라. 다들 박수~!”
쾅!
순간적으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세레나가 테이블을 건드리자 큰 소리 가 났다.
그녀는 창백해진 얼굴로 천천히 뒷 걸음질했다.
콰당!
말콤은 더했다. 덩달아 급하게 일어나려던 몸이 중심을 못 잡고 의자와 함께 쓰러졌다.
우스운 둘의 모습을 향해, 공저에 모인 모두의 시선이 붙었다.
“이, 이, 이게 무슨…….”
세레나가 순간 몸을 틀었다. 그러나 거구의 누군가가 이미 달아날 수 없 도록 뒤를 막고 서 있었다.
널찍한 가슴팍에 얼굴이 콱 박힌 세레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하데스 곁에 있던 붉은 머리의 군단장!
“피곤하니까 반항하지 맙시다.”
그는 굉장히 무료한 표정으로, 양손에 말콤과 세레나의 팔을 한쪽씩를 어쥐었다. 성큼성큼 단상 위로 향하 자 둘은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저, 저기요. 잠깐만요.”
둘이 단상 위에 올라왔을 때에는 이 미 아벨이 있었다.
그는 이미 마도구 위에 손을 얹은 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자, 잠깐……. 전하!”
퍼렇게 질려 아무 말도 못 하고 벌 벌 떠는 말콤과 달리, 세레나는 용감하게 하데스를 향해 소리 질렀다.
“제가, 제가 전하와 공자님의 비밀을 아, 안다는 걸 잊으신 모양입니 다!”
그녀의 말에, 무심한 표정의 하데스 가 저벅저벅 단상 위로 올라왔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아벨의 손을 겹 쳐 잡았다.
마도구는 즉각 푸른빛으로 반응했다.
“딩동댕~!”
록사가 히죽 웃었다. 모르긴 몰라도 친자임이 확인된 반응인 모양이었다.
“……마, 말도 안 돼.”
휘둥그레진 세레나의 눈이 하릴없 이 흔들렸다.
그 다음 순간, 아자르가 세레나의 손목을 붙잡아 마도구로 가져 갔다.
“아, 안 돼! 기다려! 잠깐만요!”
완연한 힘의 차이에 반항은 부질없 었다.
아벨과 세레나의 마력에 감응한 마 도구는, 순식간에 빛을 잃고 무색투 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