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엄마가 되어버렸다 외전-12화 (201/221)

외전 12화.

창조 마법의 기본은 ‘상상’이다.

복잡하고 조종이 어려운 물건을 창 조해내려면 구체적인 상상이 필요했 기에, 길게는 일 년 넘게 걸리기도 하는 일이다.

하지만 록사 트리볼트는 ‘그것’을 한 시간 만에 만들어낼 수 있었다.

칼튼의 보고서에는 구체적이고 완벽한 수식이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루버몬트의 세 가족이 세레나의 충격적인 발언으로 곤욕을 겪고 있던 그 시각.

록사는 몰래 성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로브 안에 큼지막한 무언가를 숨긴 채, 아주 은밀하게.

‘이걸 시험해봐야할건디…….’

홈잡을 데 없는 칼튼의 보고서를 토 대로 ‘친자 감별 마도구’를 만들긴 했 지만, 당장 시험해 볼 이가 성 안에는 없었다.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신이 생긴 뒤에 내놓아야 하니, 하데스와 아벨에게 부탁해볼 수도 없고…….

결국 성 밖의 영지민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려는 생각이었다.

“잉? 저게 뭐지라?”

로브를 뒤집어쓰고 걸음을 재촉하 던 록사가 멈칫했다.

횃불이 오른 어두운 성문 앞을 지키는 기사가, 웬 남녀와 실랑이 중이었다.

“이 여자가 내 앞길을 망치려고 작정했다고! 재판을 기다릴 시간이 없 어요! 나는 결혼해야 한다고!”

“누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어요? 나 도 책임감 없는 당신 발목 붙잡을 생 각 없어요. 결혼 준비하고 있는지도 몰랐어요. 알았으면 안 찾아왔을 거 예요.”

“시끄러! 뭘 몰라! 아주 작정하고 찾아온 거잖아, 이 미친 여자! 그간 어디서 누구랑 뒹굴었는지도 모르는 데, 뭐? 내 애? 너는 이제 우리 공작 전하께 벌받을 일만 남았어. 어디서 사기를 치려고 해?”

옥신각신하는 남녀 사이에서 기사 가 피곤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화를 들어보니 무슨 일인지 대충 감이 잡혔다.

눈썹을 쓱 올리며 양손을 맞잡아 비 빈 록사가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거, 이거……. 마침 따악 좋은 연구 표본을 만났지라!”

***

나는 하데스를 믿는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세레나의 충격적인 발언은 ‘혹시……?’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했다.

옛날보다야 많이 온화해졌다고는 하지만, ‘그’루버몬트 공작이다.

악명이 얼마나 높았으면, 처음 만났을 때 하데스 앞에서 죽을 각오까지 했잖은가.

그와 사이가 안좋은 귀족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실종되었다는 소문, 루버몬트의 후계자인 아벨을 위협하려 고 곳곳에서 보내왔던 살수들의 머리를 성문 밖에 걸어놓았다는 소문, 전 쟁 중 퇴각하던 적군들을 시체도 찾 지 못하도록 잿더미로만들었다는…….

아, 마지막은 소문은 아니지.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화속성 최종 개방 능력자인 하데스뿐이니.

아무튼 ‘잘못 걸리면 죽는다! ’는 이 미지가 만연한 루버몬트 공작 앞에서 대놓고 거짓을 말할 수 있는 이는 몇이나 될까?

그런고로, 나와 아벨은 하데스를 의심하고 싶지 않아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거다.

세레나가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약 15년 전 당신과 일을 친 게 나예 요! ’라는 발언을 하데스와 아벨 앞에 서 대놓고 할 리 없잖은가.

“여보…….”

“아버지, 대답 좀 해주세요.”

식사 내내 침묵하던 하데스는 날이 선 걸음걸이로 식당을 나섰고, 나와 아벨은 그의 뒤를 졸졸 따라붙었다.

“그, 그분이…… 거짓말하신 게 맞 죠?”

아벨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따지고 보면 그는 5살 이전의 기억이 없으니, 세레나가 작정하고 속이 려면 속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아벨은 하데스의 친자가 아니라고 하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닮 아 있었고, 아무 이유 없이 그를 무조 건 후계자로 세우려는 하데스의 고집 도 의아했으니까 말이다.

불쌍한 내 아들은 지금 그러니까, ‘내가 정말 아버지의 친아들이었다 고? ’라는 혼란에 휩싸여있었다.

닭 쫓던 병아리처럼 하데스의 뒤를 따르던 우리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휙 뒤돌아보는 그에 흠칫했다.

까드득.

“히익…….”

하데스의 이 가는 소리가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어서, 나는 놀라 입을를 어막았다.

그의 반응으로만 보자면 세레나의 말은 거짓일 테다.

“내가 무슨 말을 한들…… 네가 믿을 수 있겠냐?”

“…….”

“애초에 그 여자 말을 믿으니 내게대답을 요구하는 거 아냐.”

“이렇게…… 이렇게 닮을 수가 있 나요? 제가 진짜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면?”

“아, 아벨. 조금 진정해.”

사이에 선 나는 아벨을 말렸지만, 그는 어떻게든 진실을 듣고 싶은지 계속 하데스를 추궁했다.

“솔직히 매일 거울 볼 때마다 저도 놀라요. 생각해 보면 이상하죠. 갑자 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제가, 어떻게 증거도 없이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루버몬트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겠어요?”

“…….”

“가신들은 다 저를 싫어했지만 단 한 번도 아버지와 제 관계를 의심한 적은 없었어요. 친자라는 증거가 없 다면서 절 파문하려고 들었으면 일이 훨씬 쉬웠을 텐데, 그 방법은 엄두도 못 냈던 이유.”

그냥 생긴 게 증거였으니까.

그 누구도 아벨이 하데스의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둘이 너무 닮아서.

어렸을 때에도 그랬지만, 열네 살이 된 아벨은 하데스를 그대로 잘라 붙 여놓은 듯했다.

“혹시 그분 말이 사실이라면 저는 아버지께 실망할 거예요. 저와 그분을 처음에 버렸던 것도 아버지, 어머니를 기만한 것도 아버지, 거짓말을 한 것도 아버지 니까요.”

“아벨, 너 왜 그래? 왜 말을 그렇게 해?”

“전 지금까지 아버지의 친아들이었 으면 좋겠다고 빌어왔지만, 이제는 모르겠어요. 차라리 아니었으면 좋겠 어요. 아버지가 저를 버린 게, 아무것도 모르는 어머니를 속인 게, 아니었 으면 좋겠다는 뜻이에요.”

“여보, 얘 지금 생각이 많아서 말이 심해요. 신경 쓰지 마요.”

하데스는 가만히 아벨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표정은 무심했지만, 눈빛 너머의 씁쓸함은 잘 읽혔다. 상처받은 게 분명했다.

“여보!”

불쌍한 마음에 나는 하데스를 와락 끌어안고 말했다.

“난 믿어. 난 당신 믿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아, 진짜…….”

하데스는 나를 안으려고 하다가 말 았다. 대신 그 손으로 자기 눈을 덮으 며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마법사님이 미친 게 분명해! 이거 전하께 걸리면 우린 다 죽음이야!”

“지금 집무실에 계시지? 얼른…….”

그때, 다급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 며 중앙 계단을 타고 오르던 기사 둘 이 우리를 발견하곤 땡 얼어붙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사고를 낸 뉘앙스였다.

“웬 소란이냐?”

“저, 저, 전하…….”

“웬 소란이냐고.”

“죄, 죄송합니다. 마법사님께서 외 부인을 마음대로 성에 들이셨는데, 저, 저희는 말리려고 했습니다 만…….”

“록사가? 또 뒈지고 싶어서 작정을 했나 보군. 일 치지 말고 조용히 지내 라고 했더니.”

“여보!”

하데스는 나를 뿌리치고 곧바로 걸 음을 옮겼다.

록사가 무슨 사고를 쳤든 지금은 우리 이야기가 먼저였지만, 하데스는 왠지 이 자리를 피하고 싶은 모양이 었다.

“아버지! 기다리세요!”

“아벨, 제발 좀…….”

아벨은 집요하게도 하데스를 괴롭 혔고 나는 그를 말렸다.

진실을 밝히는 게 아벨에게 무엇보 다 중요한 줄은 알지만, 하데스도 얼 마나 황당하고 혼란스럽 겠는가.

우리는 다시 닭 쫓던 병아리처럼 하데스를 따랐고 우리의 뒤로는 잔뜩 겁먹은 문지기 기사들이 붙었다.

기차놀이도 아니고 그 우스운 꼴로 우리는 금세 록사의 집무실에 당도했다.

쾅!

화풀이라도 하려는 듯 하데스가 집무실 문을 발로 박차 열었다.

“너 대체 뭐 하는 놈이야?”

그곳에는 흠칫 놀란 표정의 록사와 낯선 얼굴의 사내 하나, 아기를 포대 기에 감싸 안은 여인 하나가 있었다.

“고, 공작 전하! 뵙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루버몬트 사람, 시 몬 브라운이라고 합니다. 억울한 사 정이 있어 직접 전하를 뵙고자…….”

“여어, 아재요, 혹시나 해서 말하는 디 진짜 억울한 게 아니믄 주둥이 신 중히 놀리셔라.”

대번에 기어와 하데스의 발치를 붙 잡고 우는 사내를, 록사가 말렸다.

하데스는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록사를 노려봤다.

“이게 뭔 짓거리야? 네 맘대로 외부인을 성에 데리고 들어온 거냐? 죽고싶어 환장했어?”

“진정하셔라, 전하. 실은 지가 획기 적인 마도구를 하나 만들었는디 실험할 대상이 꼬옥 필요해서예.”

록사는 아기를 안은 여자를 가리켰다.

포대기 안에는 아기 말고도 무언가 가 더 있었다.

투명한 원형의 수정 구슬.

아래에는 원목 받침대가 달려 있었 고 크기는 꽤 컸다. 타조알 정도.

구슬은 푸른 빛을 내고 있었는데, 록사가 여자에게서 그것을 받아들자금세 빛이 사라지고 무색투명하게 되 었다.

“제 수제자인 칼튼 로하스 제작 지 원! 제작은 요 록사 트리볼트! 그 희 대의 역작!”

록사는 뿌듯한 얼굴로 웃으며 덧붙였다.

“제국인 고유의 마력에서 기인한 유전 형질을 토대로 친자 관계를 수 식화한 다음에, 고거를 고대〜로 눈에 보이는 상태로 발현할 수 있도록 만든 실로 획기적인 발명품!”

말투나 표정은 무슨 옥장판 파는 사기꾼 같았지만, 록사는 대단한 마법 사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차오르는 불안감에 떨었다.

설마…….

“이름하야 ‘친자 감별 마도구’!”

“세상에.”

나는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친자 감별을 해주는 마도구라니.

내가 이해한 게 맞는다면, 이건 과 학이 발전한 저쪽 세계에서나 시도해 볼 수 있는 첨단 기술이다.

“방금 제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 인까지 마쳤다 아임까? 퍼런색 빛이 나는 거 보셨지예? 친자 관계인 제국 인 둘의 마력에 감응하면 반응하는 원리지라.”

“로, 록사 씨. 이걸, 이걸 갑자기 왜 만든…….”

대체 무슨 타이밍이 이래?

하필 이 시점에 친자 감별 마도구라 니, 이런 거짓말 같은 상황이 다 있 나.

“자, 공자님. 요로코롬 손을 가져다 대시고 마력을 주입하며는…….”

록사는 대뜸 아벨의 손과 제 손을 맞잡아 마도구 위에 올려둔 다음 마력을 운용했다.

무색투명한 마도구는 아무런 반응 이 없었다.

“한디 요로코롬 우리 전하의 손을 올려블믄…….”

록사는 아무 생각 없이 하데스의 손을 잡아 마도구 위에 올리려고 했다.

그는 둘이 친자 관계가 아님을 모르 기에, 당연히 마도구가 반응하리라 예상하는 모양이 었다.

놀란 하데스가 흠칫하며 록사의 손을 뿌리쳤다.

“전하?”

의아한지 록사가 고개를 갸웃했고, 아벨은 하데스의 반응에 더욱 의심이 짙어 졌는지 눈을 빛냈다.

“손 주세요, 아버지!”

“아벨, 그만해. 보는 눈이 많아.”

나는 아벨을 말렸지만, 그는 막무가 내였다.

하데스를 믿는다. 마도구는 아무런 반응이 없을 테다.

그렇지만 이 자리에서, 아무런 반응없는 마도구로 둘이 친자 관계가 아 님이 밝혀져도 문제 아닌가.

“일단 좀진정하고 나중에…….”

그때였다. 아벨이 거의 하데스에게 마도구를 떠안기다시피 가져다 붙였 고, 찰나의 순간에 마력을 주입했다.

“아벨, 너!”

전쟁터보다 더 소란스러운 그 상황.

그 속에서, 나는…….

보았다.

곧바로 푸른 빛을 내며 반응하는 마 도구를.

“아…….”

일순 우리의 주위로 정적이 내려앉 았고, 한참 만에 록사의 박수 소리가 터졌다.

“대〜단하지라! 록사 트리볼트 희대의 역작!”

우리의 속도 모르고…… 그는 해맑 은 목소리로 연신 박수쳤다.

공포.

경악.

단단히 상처받은 아벨의 표정.

우두커니 서서 푸른 빛이 일렁이는 마도구를 바라보는 하데스.

그리고…….

「난 믿어. 난 당신 믿어요. 그러니 까 걱정하지 말아요.」

하늘이 두 쪽 나도 하데스를 믿을 생각이었던 나.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어떻게 아벨이 친아들이야……?’

충격으로 눈앞이 안 보일 수도 있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 경험했다.

몸이 절로 휘청거렸고 그대로 까무룩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아이샤!”

내 마지막 시야에는, 놀란 하데스의 얼굴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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