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1화.
민망한 애정행각을 들킨 부부가 아 들과 다시 만난 건, 저녁 식사를 앞둔 식당에서였다.
무슨 꿍꿍이인지 오르쥬 소백작과 세레나를 초대해달라고 한 미하일의 부탁을 들어주었으니, 곧 식당에는 그들도 도착할 터였다.
아직은 아무도 오지 않아 휑한 식당안에 모인 세 가족.
그들은 민망한 마음에 서로 눈치만 보며 한참을 침묵했다.
“아벨.”
“네, 어머니.”
아이샤의 입술을 힐끔거리던 아벨 이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어색하게 웃으며 아이샤가 물었다.
“내, 내 얼굴에 뭐 묻었니?”
“아, 아뇨. 그냥…… 정말로 시퍼렇 게 퉁퉁 부르를 정도로 맞으셨구나, 싶어서…….”
“뭐?”
“헉! 아, 아니예요. 마, 말이 잘못 나왔어요!”
아벨이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방금까지 아벨의 시선이 제 입술에 닿아있었음을 상기한 아이샤가 본능 적으로 입가에 손을 가져갔다.
확실히…… 아벨이 나가고 난 이후 하데스가 열심히 물고 빨아댄 통에 제 입술은 퉁퉁 불어 있었다.
민망함을 감출 수 없어 결국 아이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폭 한숨을 내쉬었다.
서로 민망해하는 아이샤와 아벨의 모습을 바라보던 하데스가 참지 못하 고 웃었다.
아이샤가 눈을 세모꼴로 하고 버럭 소리 질렀다.
“웃겨요?”
“아니, 하하……. 아, 미치겠네. 진짜…….”
가만히 이마를 문지르며 생각하던 하데스가 아벨에게 말했다.
“네가 생일선물로 동생 갖고 싶다 고 했잖아. 노력 중이야. 그러니까 앞 으로는 그렇게 문 벌컥벌컥 열고 들 어오지 마라.”
“아, 네. 죄송해요.”
“알면 됐고.”
“그리고 동생…… 말인데요.”
아벨이 망설이다 입을 열자, 의아한 아이샤와 하데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도, 동생이 생기면 아버지의 후계 자로 삼아주세요. 저…… 더 이상 아버지가 오해받고 어머니가 힘들어하는 거 못 보겠어요.”
“갑자기 뭔 소리야. 아까 그 말 하 려고 찾아온 거냐?”
“아벨, 그건 엄마랑 아빠가 알아서 할게. 너는 걱정하지마.”
못마땅한 듯 하데스가 눈을 날카롭 게 떴고 아이샤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아벨을 달랬다.
가만히 둘을 바라보던 아벨이 고개 저었다.
“그 말 하려고 찾아간 건 아니었어요. 그냥 어머니께 걱정하지마시라 고, 사랑한다고 말하려고요.”
“응?”
“저를 낳아준 친어머니나 친아버지는 궁금하지 않아요. 저한테 진짜 부모님은 두 분뿐이에요. 저를 포기하 지 않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포기라니. 무슨 말이 그래?”
하데스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 지었다.
입술을 삐죽이며 아벨이 울먹거렸다.
“있잖아요, 아버지. 부탁이 있어요. 제가, 제가 사생아가 아닌 게 밝혀져 도 말이에요. 밝혀져도…… 아버지 랑, 어머니의 아들로 남을 수 있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저는 여기서, 두 분이랑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싶어요.”
“아벨.”
그의 말에 아이샤가 못 참고 울먹거 렸다. 훌쩍이던 아벨도 끝내 눈물을 보였다.
하데스는, 그런 둘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무시무시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던 아벨과 아이샤를 심란하게 만드는 두 종자들을 대체 어떻게…….
‘그냥…… 죽여버릴까.’
솜씨 좋은 살수를 고용하면 힘들 일도 아니었지만, 당연히 루버몬트에서 손을 썼을 거라는 뒷말이 나올 터라 참는 거였다.
하지만 아벨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아이샤가 온 이후 나름대로 온화해졌을 뿐이지, 원래의 하데스 루버몬트는 피도 눈물도 없는 선택을 주저 없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전하, 대신관과 세례를 도와줄 사제, 오르쥬 소백작과 세레나 양이 도 착했습니다.”
식당 문을 가볍 게 노크한 집사가 손님 방문을 알렸다.
하데스가 왼편에 앉은 아벨을 향해 손을 뻗어 그의 눈에 고인 눈물을 살 짝 훔쳐냈다.
“일단 나중에 얘기하자.”
그의 눈이 식당으로 들어오는 오르 쥬 소백작 말콤과 세레나에게로 향했다.
살의가 형형한 눈빛이었지만 그걸 눈치챈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특히 한껏 들뜬 말콤은 하데스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상도 못 한 채로 즐거워했다.
루버몬트의 성을 가진 세 가족, 그리고 무려 대신관과 그의 최측근 사제가 함께하는 자리.
더없이 영광인 이곳에 발을 붙이고 있다는 사실은, 말콤을 흥분하게 했다.
여태껏 성에서 지내라고는 했어도 동석은 허락한 적 없던 하데스에게 서운해하고 있던 차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무려 대신관씩이나 되는 자가, 직접 세례까지 내려준다고 하는데…….
말콤은 제 옆에 있는 세레나를 힐끔보며 웃었다.
건방진 동료긴 해도 야망이 있고, 아주 잘해주고 있었다.
그녀나 자신이나 서로의 목숨줄을 쥐고 있으니 배신할 일도 없고.
잘만 하면 세레나는 하데스의 옆자리를 꿰차고, 그런 세레나를 마음으 로 돌봐준 자신은 원래의 바람보다 더 원대한 결과물을 얻게 될지도 모 른다.
‘흐흐……. 이거, 이거…… 목 좋은 영지 여러 개 쓸어 담은 다음에, 공작 위나 하나 내려달라고 할까? 황실의 허락 같은 거야 필요 없지. 그 루버몬트 공작이 결정한 일인데.’
말콤이 제멋대로 분홍빛 미래를 상 상하고 있던 차.
갑자기 세레나는 제게 권해진 자리 대신 비어있던 아벨의 옆자리를 향해 걸어가 앉았다.
아벨이 놀란 눈으로 옆에 앉은 세레나를 돌아보았다.
“여기 앉아도 될까?”
“…….”
당황한 아벨이 순간 맞은편의 아이샤를 바라봤고 그녀도 놀란 눈으로아벨을 마주봤다.
“그대의 자리는 저쪽이야.”
낮게 가라앉은 하데스의 목소리가 정적으로 휩싸인 식당을 메웠다.
하데스는 턱짓으로 멀리 보이는 말 콤의 옆자리를 가리켰지만, 세레나는 왜인지 입을 꾹 다물고 대꾸도 않았다.
“이봐.”
“너무하세요.”
세레나의 대답에 모두가 숨을 삼켰다. 동료인 말콤도 놀랄 정도였다.
“뭐라고?”
“제대로 아벨을 만나게 해주지도 않으시잖아요. 잠깐이라도 안 되는 건가요?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 있어 요?”
“뭐라고?”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저에게 거 짓으로 하룻밤 영원을 맹세하시고 떠 났을 때만 해도 전하를 이해하려고 했어요. 그렇지만 제게서 아벨을 빼 앗아가고 얼굴도 못 보게 하는 건 이 해할 수 없어요. 너무하세요.”
놀라 숨을 삼키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태연한 표정인 건 하데스뿐이었다.
“그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의 눈빛처럼 날카로운 하데스의 시선을 맞받아치 며, 세레나는 말콤의 말을 떠올렸다.
「루버몬트 공작은 절대, 공자의 진 실을 밝히지 않을 생각인 게 분명해. 우리야 진실을 밝혀도 그만, 안 밝혀 도 그만이고 공자의 목숨줄을 쥐고 있으니 조금 더 대담하게 굴어도 되 지, 뭐.」
물론 이 정도로 대담하게 굴라는 뜻은 아니 었을 테다. 한껏 당황한 말콤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세레나 또한 눈치 빠르고 선을 지킬 줄 아는 여자였으므로, 이런 대담한 상황을 만들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을 테다.
하나 지금 그녀는 정상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세상에.”
놀란 얼굴로 입을 틀어막고, 입을 틀어막은 손 아래로는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참지 못하는 미하일의 농간 때문에.
“진실이 궁금하니, 아벨?”
단호한 표정으로, 세레나는 말문을 잃은 아벨을 돌아보며 쐐기를 박았다.
“너는 나와 공작 전하의 아들이야.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거야. 신만은 아시겠지.”
증거 따윈 없다. 완전범죄가 될 터였다.
세레나는 속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나라고 언제까지 구질구질하게 살 란 법 있어?’
‘어차피 지금 이제국에서 진실을 확인할 방법은 하나도 없어. 소백작의 말대로, 그냥 내가 믿는 게 진실이 되는거야.’
‘나는 루버몬트 공자의 엄마가 될 거야.’
***
진실을 확인할 방법이, 정말 없을 까?
칼튼 로하스는 그 고민으로 며칠을 매달렸다.
같은 시각, 그는 스승 록사의 방을 찾아와 있었다.
노크를 해봤자 들려오는 답은 없었 지만 칼튼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역시나 록사는 언제나처럼 소파에 누워 코를 골며 단잠에 빠져있었다.
루버몬트 사람들이 다들 한 마음 한 뜻으로 아벨을 걱정하고 있는데, 스승이라는 이 사람은 어찌 이리도 태 평한지…….
칼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록사는 칼튼이 인정하는 몇 안 되는 능력자였고, 지금 이 부탁을 할 만한 사람도 그밖에는 없었다.
“저, 스승님.”
“오마나, 깜짝아!!!”
조용히 불렀는데도 깜짝 놀랐는지 록사가 허둥거리며 바닥으로 쿵 떨어 졌다.
입가에 홍건한 침을 쓱 닦은 록사가 인상을 썼다.
“갑자기 뭔데, 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안에 계신 거 알았는데 노크해도 답이 없으셔 서…….”
“답 없으면 나중에 와야지!”
“어차피 바쁜 것도 아니고 주무시 고 계셨잖아요.”
“이익……. 그래서 왜!”
“이것 좀 봐주시 겠어요?”
칼튼은 기다렸다는 듯 제가 가져온 두꺼운 종이 뭉치를 록사에게 내밀었다.
복잡한 수식이 빼곡하게 적힌 종이는 어림잡아도 열 장은 거뜬히 넘어 보였다.
대충 홅던 록사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뭐여…….”
“각자 속성을 갖고 있는 제국인들에 한해 친자 확인을 할 수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줄발한 최신 마도구 구상 보고서 입 니다.”
“지랄을 허네, 지랄을…….”
“기본적으로 자식은 부모의 속성을 받아 태어나게 되지 않습니까? 그렇 다면 당연히 속성에 따른 마력에도 유전 형질이 포함되어 있을 거예요.”
영 관심 없어 보이는 록사였지만, 칼튼은 눈을 반짝 빛내며 열심히 말 했다.
“같은 속성이라도 피가 섞인 친자 관계라면 지문처럼 개인 신원을 확보할 수 있는 유전적 수식이 마력에도 새겨져 있을 겁니다. 그 형질과 수식을 실재화할 수 있다면 친자 확인 마 도구의 창조도 가능할 거라고 저는 확신해요.”
“니 지금 공자님 때문에 이러냐? 뭐, 이번에 나타났다는 친모가, 공자 님의 진짜 친모가 아니기라도 할까 봐?”
“꼭 그렇다기보다는, 상당히 획기 적인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국 귀족들이 사생아로 인해 이런저런 고충을 겪기도 하고…….”
“만약 친모가 맞으면 어쩔 건데? 누구보다 공작 전하가 사실을 알고 계 시지 않겄냐? 이게 뭔 필요여?”
“아……. 무, 물론 그렇겠지만, 그 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아벨이 하데스의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렇기에 친모의 얼굴도 하데스가 확인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칼튼은 당황했다.
생각해 보면, 아벨이 안타까워 밤낮으로 이마도구를 연구하긴 했지만, 록사가 이 걸 만들어 줘도 문제다.
친모가 사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 하는지 알아낼 수 있음과 동시에, 하데스가 아벨의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 도 밝혀질 수 있는 거니까.
‘너무하나만생각했나.’
칼튼은 금세 풀이 죽어 한숨을 내쉬 었다.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록사에게 꾸벅 고개 숙였다.
“죄송합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괜 한 일을……. 피곤하셨을 텐데 더 주 무세요.”
“앞으로 이렇게 불쑥불쑥 들어오지말그라!”
“예에…….”
고개를 푹 수그린 뒷모습을 보이며 칼튼이 방을 나가고, 다시 잠을 청하는 듯 록사가 소파 위에 벌러덩 누웠다.
그리고 한참 후.
벌떡 일어난 록사가 소파 옆 테이블에 남아있는 칼튼의 보고서를 다시 홅기 시작했다.
“이 새끼…….”
보기 드물게 긴장한 표정으로 꿀꺽 마른침을 삼키던 록사가 중얼거렸다.
“……천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