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9화.
“크레센타 제국의 신전에서 일하고 있는 신의 종, 대신관 미하일 라이가르트라고 합니다.”
자신에게도 반갑게 인사하는 미하일을 보며 세레나는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세, 세레나예요.”
“꼭…… 한번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되네요.”
“네?”
……나를?
“안 그래도 오늘 저녁에 세레나 양 과 오르쥬 소백작님을 함께 뵐 수 없을이지 전하께 여쭙고 오는 길이었는 데…….”
“제, 제가 함께요?”
“네. 정기 세례는 지났지만 식사하 면서 축복의 기운을 나눌 생각이랍니다. 저기 있는 데보라 사제와 함께요. 세레나 양에게도 신의 기운이 충만하 길 빌어드리고 싶어서…….”
미하일은 조금 안타까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얼마나 착잡한 심정이실지 압니다. 그래도…… 울지 마세요.”
미하일의 손이 천천히 올라와 세레나의 젖은 눈가를 훑었다.
하얗고 긴 손가락 위에 맺힌 눈물을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던 미하일은 지 그시 눈을 감으며 제 손끝 위에 입을 맞췄다.
세레나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듣도 보도 못했던 성스러운 위로였다.
“제가 큰 도움이 될 순 없겠지만 세레나 양의 마음은 누구보다 잘 헤아 리고 있습니다. 부디 아파하지마세요.”
“……네.”
세레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쥐어 짜내 대답했다.
사실 세레나는, 어쩔 수 없이 말콤의 계획에 동참하긴 했지만 냉정하고 이기적이었던지라 죄책감은 갖지 않 았다.
약간의 두려움도, 일만 잘 풀리면 비참한 인생이 역전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저만치 날아가버린 뒤였고 말이다.
다시 말해 혼란스러울 열네 살의 어린 공자님이나, 자신의 위치를 위협받고 있는 공작부인에게 미안한 마음이라곤 없었단 뜻이다.
한데 티 없이 맑아 보이는 미하일의 진심에, 세레나는 심장 한쪽이 찌르 르 울리는 걸 느꼈다.
양심의 가책이 분명했다.
***
무언가 말을 더 나누던 미하일은 세레나와 함께 성을 나섰고, 아벨은 정 원 구경을 시켜 달라는 데보라에게 이끌려 나왔다. 옆에는 칼튼도 함께였다.
정원 구경은 핑계였고 아무래도 데보라는 아벨을 위로해주고 싶었던 모양인지, 대뜸 손을 잡아왔다.
“사, 사, 사제님.”
당황한 아벨은 허둥거렸지만 데보라는 태연했다.
“괜찮으세요? 공자님 표정이 어두 워 보여서 마음이 안좋아요.”
“저는 괜찮아요.”
“거짓말. 대신관님이 아프면 아프 다고, 안 괜찮으면 안 괜찮다고 말하 랬어요. 그게 어린이의 특권이래요. 나중에 어른이 되면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면 안 되고, 안 괜찮아도 괜찮다 고 해야 할 때가 온댔거든요.”
열 살답지 않은 야무진 위로에 아벨 이 작게 웃었다.
“전 이제 어린이가 아닌데요.”
“아직 어린이예요.”
“아니예요. 사제님은 어린이지만.”
“저는 다 컸어요!”
“사제님이요? 키가 제 가슴에도 안 닿는데?”
“키만 아직 덜 자란 거예요!”
“둘 다 아직 어린이 맞으니까 의미 없는 대화는 그만하세요.”
칼튼이 중재하자 아벨이 킬킬 웃고 데보라는 뺨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토 라졌다.
“그나저나 대신관님은 그 여자분에게 굉장히 호의적이더군요. 만인에게 상냥한 분이란 건 알지만.”
칼튼이 의외라는 듯 말하자 데보라 가 고개 저 었다.
“겉으로만 그렇지, 별로 안좋아하 세요. 저도 싫고.”
노골적으로 싫다고 말하는 데보라에 아벨이 흠칫 놀랐다. 눈을 가늘게 뜬 데보라가 그런 아벨의 표정을 살 피다 말했다.
“왜요? 공자님은 그분이 마음에 드 세요?”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어린 공자님을 버린 사람 아니에 요? 설마, 그래도 엄마라니까 마음이 흔들리는 거예요?”
“……네?”
데보라의 눈빛은 왜인지 차가워져 있었다.
“낳아줬다고 엄마는 아니죠. 공자 님의 어머니는 공작부인이세요.”
“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마음이 흔들린 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요?”
“오히려 그 반대예요. 그래도 나를 낳아준 사람이라는데 아무 생각이 안 드는 제 자신도 이상하고, 그 사람 때 문에 아버지랑 어머니가 신경 쓰고 계시니 죄송하고, 갑자기 나타난 그 사람이 밉기도 하고…….”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공자님.”
데보라가 아벨의 손을 꽉 쥐고 말했다.
“사랑받아본 적이 없잖아요. 아무 생각이 안 드는 게 당연해요. 사실 공자님께 오기 전에 공작 전하와 공작 부인을 뵙고 왔는데, 저는 공작부인 이 불안해하시는 것 같았어요.”
“어머니가요?”
아벨은 놀라며 아이샤를 떠올렸다.
그래, 데보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갑자기 나타난 친모의 존재에 혼란스러워하는 건 자신뿐만은 아니었다. 아이샤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녀가 불안해하는 이유는, 친모의 존재로 인한 사람들의 시선이 나 루버몬트의 평판을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오직 하나. 아벨 자신 때문이었다.
친모를 만나 혼란스러운 그를 향한 걱정.
혹시나 친모에게 더 정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걱정.
또는 무사히 후계위를 지킬 수 있을 까, 하는 걱정.
걱정, 걱정, 걱정…….
“하아…….”
얼굴을 가린 아벨의 입술 사이로 긴한숨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나타난 새엄마가 좋아진 게 아니라면 공작부인에게 매일 그랬 던 것처럼 사랑한다고 해주세요. 벌써 며칠째 자기 전에 하는 뽀뽀도, 사랑한다는 말도 안 해주셨다면서요. 공자님 나빠요.”
“어,어머니가 그런 말도 했어요?”
“서운하실 만도 하네. 생각해 보니 전에는 부인과 거의 하루 종일 붙어지내지 않으셨어요?”
칼튼이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기지개를 쫙 켰다.
“전 슬슬 스승님 좀 뵈러 가봐야겠 어요. 공자님은 부인께 가서 진하게 뽀뽀나 한번 해드리세요.”
“맞아요. 그리고 이따가 저랑 같이 간식 먹어요.”
칼튼과 데보라가 아벨을 떠밀었고, 그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데보라의 말대로 여전히 어머니를 사랑한다는 고백은 해야 할 듯했다.
그녀의 얼굴을 보기 미안해 의식적으로 피해온 날이 벌써 꽤 되었으니 까.
***
망설이듯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아벨이 아이샤의 방에 도착했을 때였다.
안에 하데스도 있는 모양인지 들려오는 목소리가 둘이었다.
“당신은 왜 항상 이런 식이에요?”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왜인지 분위기가 험악했고 아벨은 미처 문을 열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서 귀만 세웠다.
벌써 오랫동안 다툰 듯, 두 사람 다 목소리가 한껏 격앙돼 있었다.
“나는 상관없어요. 당신이랑 아벨 생각을 먼저 해요.”
“난 충분히 이기적으로 나만 생각 하고 있어. 정말 그 여자가 아벨의 친모라면, 아벨의 말대로 사실을 밝히는 게 맞아.”
“안 된다니까요? 사실을 밝히면 당장 가신들부터 우리 아벨을 못 잡아먹어 안달일 거라고요.”
“목숨이 아깝지 않으면 그러라고 해. 머리통을 다 태워주지, 뭐.”
“왜 이렇게 애처럼 굴어요?”
“당신이야말로 왜 이렇게 무르게 굴지?”
그들이 다투고 있는 이유를 알 듯도 했다.
하데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성에 들여놓고 있는 세레나의 존재를 한 빨리 처리하고 싶은 모양이 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아벨이 실은 친자가 아님을 공표하고 후계자의 지위를 박탈하는 것이다.
하지만 들어보건대, 하데스는 사실을 밝히기는 하되 여전히 아벨을 루버몬트의 후계자로 남겨둘 생각인 듯했다.
‘아버지는 정말 그게…… 말이 된다 고 생각하시는 건가?’
아이샤가 답답해하는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됐다.
가신들은 노발대발하고, 루버몬트를 숭상했던 많은 제국민들은 뒤에서숙덕거릴 테다.
루버몬트의 피가 단 한 방울도 섞이 지 않은 루버몬트의 후계자라니.
‘말도 안 되잖아.’
아이샤도 아이샤였다.
그녀는 아벨이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무덤까지 가져가는 한이 있더라 도 아벨의 후계위를 지켜주려는 생각이었다.
대체…… 언젠가 태어날 동생에게 후계자를 물려준다는 선택지는 왜 없는 걸까?
아이샤와 하데스가 자길 끔찍이 아낀다는 사실은 눈물이 날 정도로 감 동이지만, 이런 상황은 부담스럽기만 할뿐이다.
아벨은 자책했다.
자신의 존재가 루버몬트를 시끄럽 게 만들고, 다정했던 부부 사이에 이 렇게 분란을 일으키는 상황이 괴로웠다.
“당신의 존재는 나나 아벨뿐만 아니라 이제 이제국에도 중요해. 이렇 게 시간 질질 끌면서 당신 꼴을 우습 게 만들고 싶지 않아.”
“안 우스워요. 난 아들 앞길 막는 엄마가 되고 싶진 않다고요. 제발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봐요. 나는,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 니까…….”
“또, 또, 또 맞을 소리 하네.”
돌연 하데스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몰래 듣고 있던 아벨이 숨을 삼 켰다.
“내 잘못이에요, 나는 쓸모없어요, 난 괜찮아요, 나는 신경 쓰지 마 요……. 진짜 지긋지긋하군.”
“…….”
“내가 말했지. 설사 그대가 진짜 잘못했더라도 그 누구도 감히 그대에게 잘못했다고 해선 안 돼. 쓸모없다고 그대 입으로 자책하는 것도 듣기 싫 어. 그대는 아벨만큼, 아니, 아벨보다 더 내게 중요한 존재야.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잠깐 날이 섰던 하데스의 목소리는 누그러졌지만 분위기는 더 험악해졌다.
둘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고, 한참 만에 하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아……. 안 되겠다. 이리 와. 맞 아야겠다. 교육이 덜 됐어.”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리, 말의 내용 은 험악했다.
아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알았어요. 이런 식으로 말 안 하기 로 했는데, 내가 또 실수했어요. 한 번만 봐줘요.”
“뭘 봐줘. 맞을 건 맞아야지. 지금까지 그냥 넘어갔던 적 있어?”
방문에 뺨을 붙이고 작아진 목소리 들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아벨이,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맞는다니?
지금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겠다는 말인가? 대체 무슨 ‘맞을 말’을 했 다고?
아니지, 설사 맞을 말을 했다고 쳐 도 폭력을?
작고 마른 아이샤와 거대한 하데스의 덩치 차이를 떠올리던 아벨이 황 당함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잘 들어보면,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정확히는 ‘때려왔다는’ 듯하다.
게다가 한 번만 봐달라 말하는 아이샤와, 그걸 냉정하게 거절하는 하데스라니…….
‘아버지가 대체 왜10년 동안 상상도 하지 못했던 하데스의 실체에 놀란 아벨은 저도 모 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어딜 슬슬 피해! 오라고! 맞게!”
하데스의 언성이 살짝 높아졌고 동 시에 아벨은 떨리는 손을 들어 문고리로 가져갔다.
지금 그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아, 지금 이 와중에 꼭 이래야겠어 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피곤하게 하 지 말고 빨리 이리 와. 딱 대. 오늘 아주 여기를 시퍼렇게 퉁퉁 부르트도록 때려줄 테니까.”
잔인한 경고.
“하읍!”
이어지는 아이샤의 외마디 비명은, 아마도 입이 틀어막히면서 내질러진 듯했다.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입을 막고 때리기라도 하려는 걸까.
분노한 아벨이 주저 없이 문을 열고 소리쳤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
그리고 아벨은…… 보고야 말았다.
침대까지 갈 여유도 없는지 테이블 위로 엎어진 둘.
서로를 바짝 끌어안고 더듬는 남세스러운 손, 난잡한 포즈.
정신없이 입을 맞추고 있는…… 뜨 거운 부부의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