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화.
하데스 루버몬트는 의심이 아주 많 은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지만, 권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연한 변화였다.
“아벨의 비밀을 알고 있더군. 무속성 핵석의 존재와 그 위치까지.”
“친모니 당연히 알고 있겠죠.”
여전히 서툰 솜씨로 손수건에 수를 놓던 아이샤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별거 아니라는 듯, 웃으며 덧붙였다.
“제가 말했잖아요. 아무리 간이 크 다 해도, 증거 하나 없이 가짜를 데려와서 친모라고 우기겠어요? 그건 아 닐 거예요.”
“조사를 해봐도 여자의 과거 행적 이 전혀 나오지 않아. 철저히 숨기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했던 것처럼 말이야.”
“아직도 의심하나 보네요?”
“솔직히 내 자신이 잘 이해가 안 돼. 왜 처음 아벨을 데려왔을 때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는지. 당연히 친모 가 있었을 텐데 나중에 이런 일이 생 길지도 예상 못 하고…….”
“으음, 그거 당신 잘못 아니예요. 아벨을 맡긴 건 제누스였잖아요. 저요. 뭐, 겉으로야 부탁을 했겠지만, 당신이 순순히 들어주지 않을 게 걱 정되니 세뇌라도 걸지 않았을까 싶은 데…….”
“…….”
“대충……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아벨을 데려가서 사랑해 달라고 세뇌 걸지 않았을까요? 그게 아니었으면 이렇게 의심 많은 당신이 고작 아벨 이 무속성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후계자로 들일 리는…….”
“내가 세뇌당해서 아벨을 사랑한 다는 거야?”
“아…….”
아이샤가 멈칫하고는 고개 저었다.
“아뇨, 아뇨. 그런 뜻은 아니예요. 난 그냥 당신 잘못 없다고 말하고 싶 었던 건데.”
“나도 그대를 탓하는 건 아냐. 그렇지만 내가 아벨을 사랑하는 건 진심 이야. 그리고 아벨에게 진심인 이유는…….”
말끝을 흐리던 하데스가 눈을 빛냈다.
그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아이샤의 말에는 동의했다.
아무리 배짱 두둑한 놈이라도 설마, 가짜를 데려와 아벨의 친모라고 우기 기는 힘들 테다. ‘그’ 루버몬트 공작의 앞에서 말이다.
또 세레나라는 여자는 아벨의 친모 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비밀도 알고 있고…….
하지만 그가 아직까지 의심을 거두 지 못하는 이유는, 가이오니아와의 마지막 전투에서 그가 보여준 이상한 미래 때문이었다.
그게 미래인지, 자신이 모르는 어떤 세계에서 벌어진 일인지.
확신할 수도 없고 가이오니아를 믿 지도 않지만, 하데스는 어렴풋이 느 끼는 바가 있었다.
“……이유는?”
아이샤가 잘린 뒷말을 물었고 하데스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내 친아들이어서가 아닐까?”
“네? 하하, 그게 뭐예요.”
장난인 줄 알고 웃던 아이샤의 표정 이 일순 굳었다.
“……진짜?”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단 말이지.”
턱을 쓰다듬으며 말도 안 되는 고민을 하는 하데스의 앞에 아이샤가 불 쑥 얼굴을 들이 밀었다.
“그럼 14년 전에 일친 적이 있단 말 이네?”
“뭐?”
“하긴…… 소설에서는 고아였던 아벨을 주워왔다고만 되어있지, 당신이 과거에 얼마나 방탕한 삶을 살았는지는 안 나와 있었죠. 설마 친모의 얼굴을 보니까 떠올랐어요?”
“뭔 소리야. 그 뜻이 아니고…….”
“그 뜻이 아니면 뭔데요?! 나한테 옛날에 뭐랬더리? 뭐? 아벨의 어머니와 관련해서는 떳떳하다고? 세상에……. 했으면 당연히 애가 생길 수도 있는 건데, 떳떳하긴 뭘 떳떳해?”
“그런 말까지 다 기억하고 있어?”
“당신 말은 다 기억한다니까?”
“아냐. 처음 보는 여자야.”
“거짓말. 당신이랑 처음 잤을 때부 터 눈치채야 했어요. 초보의 솜씨가 아니었다구.”
“거참,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리고 내가 의심하는 아벨의 친모는 그때 아벨을 맡겼던 당신이야.”
“어머? 설마 14년 전에 나랑 했어 요?”
“아니, 그게 아니고…….”
제 가슴을 두 팔로 가리 며 아이샤가 질겁했다.
하데스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걸 뭐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답답했다.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아 닌가.
기억에도 없는 아벨이 친자인지 아 닌지 확신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당장 하데스, 그만 하더라도 어렴풋 이 의심만 할 뿐이었으니.
뭔가 확인할 방법이 있다면 좋을 텐 데…….
“후…….”
눈을 가늘게 뜬 채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샤를 번쩍 안아든 하데스가 말했다.
“일단 난 그 여자 안 믿어. 조금 더 알아본 뒤에, 뭐라도 하나 걸리면 그 냥…….”
“그 여자를 안 믿는다느니, 아벨이 당신 친아들일 거라느니, 보니까 되 게 집착 심하네요. 그렇게 아벨이 진짜 아들이었으면 좋겠어요? 아니, 그 게 뭐가 중요한가? 사랑으로 키웠으 면 충분히 친부모로 불릴 자격이 있 어요. 그런 거에 집착하지마요.”
“당신은 별 상관없어 보이네.”
“네, 뭐.”
하데스를 마주 안은 아이샤가 작게 웃고 말했다.
“아벨이 나만 엄마라고 생각해준다 고 했거든요. 그거면 됐죠, 뭐.”
***
아벨의 친모인 세레나와 그녀를 데려온 오르쥬 소백작이 루버몬트 성에 머문 지 사흘이 흘렀다.
그동안 아벨은 세레나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혹시나 자길 만나려 하면 어떻게 하나 고민이 많았던 아벨이 거의 칩거 수준으로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기 때 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갑자기 연락이 온 신 전에서 성을 방문하는 날이었고, 아벨은 오랜만에 연무장에 나가 몸을 푼 뒤 씻고 손님들을 맞을 예정이었다.
연무장에서 돌아오는 길, 아벨의 옆 에는 그의 친구인 칼튼 로하스가 있 었다.
루버몬트 마법 재단 소속.
아벨과 같은 나이의 칼튼은 똑똑하 고 눈치 빠르며 걱정이 많은 성격이 었다.
“마음은 안 바뀌었어요?”
아벨의 방으로 향하며 칼튼이 못마 땅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응. 계속 그 사람을…… 성에서 어머니와 같이 지내게 할 순 없잖아. 아버지도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두는 걸 테고. 이건 시간이 약이고, 뭐 그런 문제가 아니야. 아버지가 밝히지 않 으면 나라도 밝혀야 해. 내가 사생아가 아닌 거.”
“공작 전하도 다 생각이 있으시겠 죠. 독단적으로 행동하지마세요.”
“걱정하지마. 후계자 자리만 내려 놓을 뿐이지, 계속성에서 지낼 수는 있을 거야.”
칼튼은 아벨의 비밀을 알고 있는 유 일한 친구였다.
사람을 쉽게 믿는 아벨이 처음 비밀을 털어놓았을 때 칼튼은 심하게 화를 내고 앞으로는 꼭 입을 조심하라 며 다그쳤다.
한없이 무르고 바보처럼 착한 아벨이, 칼튼은 항상 걱정스러웠다.
“저도 멀리서 공자님 친모의 얼굴을 보긴 했는데요.”
“응.”
“확실히 공자님의 친모가 맞긴 할까요? 닮은 구석이 전혀 없던데. 전이해가 안 돼요. 그에 반해 갈수록 공작 전하랑은 닮아가고.”
“내가 아버지랑 그렇게 닮았어?”
“그걸 말이라고 해요? 그리고 보통 그 정도로 닮은 경우는 우연이라기보 다 유전 형질에 기반했다고 봐야 하 죠. 요즘 제가 연구하고 있는 게 있는 데 좀 보실래요?”
칼튼이 눈을 빛내며 품 안에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아벨에게 내밀었다.
뭔가 복잡한 수식이 빼곡하게 들어 차 있었다.
아벨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읽히지도 않는 그걸 한참 들여다보았고 칼튼은 곁에서 조잘거렸다.
“친부나 친모 중에 우성 형질을 가 진 속성을 따라 자식이 나오는 건 아 시죠? 저는 이걸 육체에 기록된 유전 형질의 발현이라고 봐요. 부모와 자식이 닮은 것도 같은 맥락이고요.”
“어, 음, 그래…….”
“마법을 사용했을 때 방출되는 마력을 창조 마법으로 가시화할 수 있는 것처럼, 만약 육체에 내재된 유전 형질도 같은 방식으로 확인할 수 있 다면…….”
“흐아아……. 아, 미안.”
지루한지 입을 벌리며 하품을 하는 아벨의 앞에서 칼튼이 말을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오랜만에 훈련했으니 피곤하기도 하시겠네요. 씻고 나오세요. 오늘은 그렇게 기다리시던 사제님이 오는 날 이잖아요.”
칼튼이 데보라 얘기를 꺼내자 아벨 이 황급히 고개 저었다.
“기다리다니? 기다린 적 없는데?”
“글쎄요. 친어머니 만나기 싫다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사제님 오신 단 소리에 후다닥 튀어나온 것만 봐 도…….”
“시, 신전은 중요한 손님이니까.”
“네, 네. 알겠습니다.”
당황하는 아벨이 귀여워 웃던 칼튼 이 멈칫했다.
아벨의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레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칼튼의 놀란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 린 아벨이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고는 한 발자국 물러섰다.
“아…….”
세레나는 아벨의 얼굴을 보자마자 당장이라도 눈물 흘릴 듯 안쓰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주춤하고 아벨이 물러서자 더 이상 다가오지는 않고, 세레나가 말했다.
“저기……. 여기까지 찾아와서 미 안해. 너를 보고 싶은데 만날 방법이 없어서…….”
“만나고 싶으셨다면 알현 신청을 하면 됐을 텐데요. 성에서 지내고 계 신다고 해서, 아무나 만날 수 있는 분 은 아니 거든요. 루버몬트 공자님이.”
조금 날카로운 말투로 칼튼이 둘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전에 얼핏 스치듯이 봤을 때도 느꼈 지만 칼튼은 왜인지 아벨의 친모라는 세레나에게 정이 안 갔다.
칼튼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레나는 말했다.
“사과를 하고 싶었어. 그리고 듣기싫겠지만, 변명도……. 아마 네게 나는, 핏덩이를 내버린 무정한 엄마일 테니까.”
“저기요.”
“미안해. 정말 미안해.”
세레나는 어린아이처럼 서럽게 울 기 시작했다.
못 먹은 듯 깡마른 몸, 낡은 옷차림을 한 채로 우는 그녀의 모습에 동정 심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몇 안 될 테다.
칼튼이 아벨을 돌아보았다. 과연 그는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널 버릴 생각 없었어. 널 잃어버린 거야. 그 뒤로 미친 듯이 너만 찾아다 녔어. 모두…… 넌 이미 죽었을 거라 며 말렸지만, 믿기 싫었어.”
세레나는 북받친 감정을 천천히 고 르며 계속 말했다.
“뺏겼다는 생각이 들었어. 감히 루버몬트 공작 전하께 이런 생각을 가 진다면 불경하겠지만……. 힘없는 나는 너를 찾을 수도 없었는데, 그분은 너무나도 쉽게 너를, 너를…….”
사실만 놓고 본다면, 세레나는 피해 자였다.
그녀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만약 정말 아벨을 일부러 버린 게 아니라면…….
원하지 않은 헤어짐 이후, 다시 만난 아들은 자기가 어찌할 수도 없는 권력자의 후계자가 되어있지 않은가.
“거, 걱정하지마. 나도 잘못한 거 알아. 이제 와서 네 엄마 노릇을 할 자격이 없는 것도 알고. 전하께도 말 씀드렸어. 그냥, 그냥 며칠만, 멀리서 라도 네 얼굴을 보다가 조용히 사라 지겠다고 했어. 지금 행복해 보이는 널 방해할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그 러니까 걱정하지마.”
정말일까?
욕심 따위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세레나의 말에, 아벨과 칼튼은 조금 동 요할 수밖에 없었다.
“짧은 시간이겠지만…… 안 될까? 평생에 다시없을 마지막인데…… 부 디 며칠만이라도, 며칠만이라도 네 얼굴을 보고 싶어. 부탁이야, 아벨. 제발…….”
세레나가 이름을 부르며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온 순간, 아벨은 벌벌 떨 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였다.
“공자님!”
밝은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세레나의 어깨 너머에서 달려온 누군가가 거의 그녀를 밀치다시피 하고 먼저 아벨에게 안겨들었다.
“데, 데, 데보라 사제님?”
갑자기 데보라가 왜 여기에……?
아니, 오늘 방문이 예정되어 있었으 니 특별할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아벨이 놀란 건, 친해졌어 도 절대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데보라의 친근함이었다.
제 허리를 끌어안고 배시시 웃는 데보라에 아벨이 놀라 허둥거렸다.
“버, 벌써 오셨군요. 그, 그런데 제 가 방금 훈련을 마치고 아, 아직 씻지를 못해서…….”
“괜찮아요. 공자님한테서는 항상 향기가 나요.”
“예, 예?!”
놀란 아벨이 데보라를 마주 안지도, 밀어내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대꾸했다.
세레나를 만나 혼란스러웠던 감정 은 어느새 사라진 뒤였다.
‘뭐야, 쟤는?’
당황한 세레나가 아벨을 끌어안은 데보라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 다음 순간, 세레나는 놀랐다.
살짝 뒤를 돈 데보라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피식 웃었다. 마치 자길 조롱하는 듯한 웃음이 었다.
‘저렇게 어린 애가…….’
……지을 수 있는 표정이 맞나?
황당함에 빤히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세레나는, 또 들려오는 기척에 뒤돌았다.
“공자님, 로하스 군. 보름 만인가 요?”
‘헉.’
세레나는 하데스를 처음 봤을 때만 큼이나 놀랐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 천사 같은 웃음.
금발의 남자는, 세레나를 똑바로 마 주 보며 빙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인간인지 신인지 헷갈리는 생김새를 가진 남자의 뒤로는, 마치 빛이 반 짝이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시간이 멈춘 느낌이릴까?
세레나는 남자에게 시선을 뺏긴 채로 한참,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