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화.
“제, 제 아들……. 한 번만, 한 번만 안아보게 해주세요.”
여자는 감정이 북받쳤는지 나를 제 치고 아벨에게로 다가가려 했다.
사실…….
아벨을 직접 낳은 그녀를 매몰차게 내칠 생각은 없었지만, 그 순간 나는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나와 아벨의 영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랜 시간 동안 얽혀있었다는 사실과는 관계없이, 피를 나눈 육체 가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끌린다는 걸 알고 있어서일까.
친모를 만나고 나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어떤 감정을 아벨이 느끼지 않 길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이었는지 도…….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여자가 아벨 에게 뻗은 손을 쳐내며 말했다.
“이게 무슨 무례한 행동이죠?”
“아…….”
놀란 여자는 금세 빨갛게 달아오른 손을 붙잡으며 울었다.
마치 사연 있는 모자의 사이를 가로 막은 못된 계모가 된 듯한 기분이라, 조금 뜨끔했다.
혹시 아벨은, 자길 낳아준 친엄마와 만나 변명이라도 듣고 싶은 기분 아 닐까.
불안한 마음에 아벨을 돌아보니, 그는 적잖이 당황한 얼굴로 계속 여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벨…….”
그를 부르자, 아벨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잠깐 나를 바라보더니 곧 뒤 돌아 도망치듯 달려가 버렸다.
“응접실로 가 있도록 하세요. 바리 알 경, 바쁘지 않으면 이분들을 성안으로 좀 안내해 줘요.”
“아! 예, 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이에 서 있 던 잭스가 말했고 나는 그대로 아벨을 뒤따라 달렸다.
얼마 안 가 우두커니 멈춘 뒷모습이 보였다. 또 도망갈세라 뒤에서 바짝 끌어안자 아벨이 움찔했다.
그는 곧 몸을 떨기 시작했다. 안은 내 손을 꽉 맞잡는 손까지도…….
“엄마…….”
한참 어리광을 부릴 나이에도 ‘엄마’ 말고 ‘어머니’를 고집했던 아벨이다.
조금 낯설었지만 듣기 좋았다. 나는 그의 어깨에 뺨을 붙이고는 대답했다.
“응.”
“사실 무서워요.”
“…….”
“나를 낳아준 친어머니라는데, 하나도 반갑지 않고 조금 밉기까지 해요. 나는 아버지랑, 어머니랑…… 행 복하게 잘 살고 있었는데. 잘 살 수 있었는데.”
“아벨…….”
“이런 생각 하는 제가 조금 놀라워요. 저는, 저는 이기적이고 나쁜 아이 였나 봐요.”
“아니야, 전혀.”
지금 이 순간, 친어머니가 밉고 싫 다는 아벨의 말에 마음이 놓이고 웃 음이 나는 나만큼이나 이기적이고 나 쁠까.
“그런 게 걱정되면 나만 나쁜 걸로 하자. 우리 아들, 나 말고 다른 사람 엄마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렇게 부 르지도 말기로 약속해.”
내 말에 움찔하던 아벨이 천천히 뒤 돌았다.
“네가 나쁜 거 아니야. 내가 욕심이 많아서 혼자만 네 엄마 하고 싶어서 그런 거야. 알겠지?”
그는 울 듯 말 듯 아슬아슬한 표정으로 입술을 떨다, 이내 내 품에 얼굴을 묻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응접실에 도착한 말콤의 얼굴에는 희열이 가득했다.
공작부인의 당황한 표정하며, 공자의 혼란스러운 얼굴까지…….
자꾸 약한 소리를 하기에 걱정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세레나는 훨씬 잘해주었다.
똑똑하고 눈치 빠른 그녀를 이용하 기로 한 건, 과연 회심의 한 수였다.
그는 격려하듯 세레나의 어깨를 툭툭 치며 히죽 웃었다.
“공자의 표정을 보았느냐? 볼만하 더구나. 혼란스럽기도 하겠지.”
“영주님.”
“응?”
“정말 공자가 루버몬트 공작의 친 아들이 아닌 거 맞아요?”
세레나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걱정했다.
그녀의 질문에, 말콤은 처음 본 아벨의 얼굴을 떠올리며 침음을 삼켰다.
확실히 친자가 아니라면 더 이상할 정도로 닮아 있는 얼굴이었다.
“아니야, 걱정하지마라. 공작은 10 년 전 오비투스 토벌 때 말고는 이쪽에 평생 발걸음도 하지 않았던 자야. 애는 혼자 만들겠니?”
“닮아도 너무 닮았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루버몬트나 되는 가문에서 사생아를 아무 증거도 없이 받아들였겠니? 괜히 떨지 말고 지금 처럼만 잘 하렴.”
무려 ‘그’ 루버몬트다. 이 판을 벌이 기 위해 말콤은 당연히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아벨이 막 태어났을 때 공작의 행적을 샅샅이 조사했음은 물론,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진짜’ 친모의 존재를 찾는다고 꽤나 고생하지 않았는가.
너무나도 닮은 부자의 얼굴이 마음에 걸렸지만, 말콤은 자신이 바친 몇 년의 시간을 무조건 신뢰했다.
“마음 약한 공자를 잘 꾀어서 친해져 봐라. 혹시 아느냐? 네가 공작의 눈에도 잘 들어서 사랑받을 수 있을 지.”
말콤은 세레나를 부추겼다.
“전 제 분수를 잘 알아요. 이 미친 짓에 동참하는 건 영주님이 인질로잡고 계신 제 동생 때문이지, 있지도 않은 야망 때문이 아니예요.”
“아니야. 나는 너를 잘 알아. 우리는 같은 부류란다. 내가 왜 너를 선택했는지 몰라서 그러니?”
히죽 웃는 말콤을 보며 세레나가 인 상을 찌푸렸다.
“용감하게도 네년이 내 방에서 도 둑질을 한 그날, 벌써 잊은 게야?”
“듣고 싶지 않아요.”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밀라에게 누명을 씌웠지. 오갈 데도 없는 불 쌍한 너를 내 성으로 데려와 먹고 살게 해준 그 은인을 말이야.”
말콤은 치밀했다. 한 배를 탈 인물 로 아무나 고른 건 아니었다.
아픈 여동생을 데리고 오르쥬 성의 하녀로 고용됐던 세레나는, 적당히 욕심도 있고 냉정하며 이기적인 성격이었다.
은인과도 같았던 동료 하녀에게 누 명을 씌우고, 매질당해 죽어가는 그 친구의 앞에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던…….
‘독한 년. 안 어울리게 약한 척은.’
말콤은 속으로 혀를 내두르면서도 겉으로는 세레나의심이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다정한 척 웃었다.
“아무튼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돌 이킬 수는 없단다. 성공이 아니면 죽 음뿐이야. 루버몬트 공작이 어떤 사람인지 익히 들어 알지 않니.”
“영주님이나 잘하세요.”
이제 제 역할이 중요하다는 걸 느낀 모양인지, 세레나는 전에 없이 건방 진 태도였다.
못마땅한 마음을 숨기고 말콤은 속으로 구시 렁 거 렸다.
이제 곧 만나게 될 공작은, 갑자기나타난 친모의 존재에 분명 당황하고 있을 것이다.
무조건 공자를 후계자로 세우고 싶을 테니, 공자의 비밀을 죽을 때까지 함구하도록 자신에게 거래를 요구해 오겠지.
“흐흐…….”
음흉하게 웃던 말콤의 표정이 한순 간에 얌전해졌다.
응접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등장한, 하데스 루버몬트, 그 때문이 었다.
큰 키와 다부진 몸, 누군가가 일부 러 조각해 놓은 듯한 얼굴 위에 약간은 차가운 인상까지…….
기껏해야 제국 전역에 퍼진 공작의 초상화나 조각상들만 본 적 있던 세레나는 하마터면 그 순간 숨이 멎을 뻔했다.
말콤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루버몬트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오르쥬 영지의…….”
“어, 앉게.”
손을 휘휘 저어 말콤의 인사를 끊은 하데스가 그들의 맞은편에 털썩 몸을 앉혔다.
곧바로 거만하게 다리를 꼬아 앉은 그는, 말콤이 아닌 세레나를 향해 빙 긋 웃어 보이며 친근하게 손을 흔들 었다.
“여어, 오랜만이야.”
……뭐지?
말콤과 세레나가 동시에 당황했다.
“내 얼굴, 기억하겠지? 그런데 나는 기억이 잘 안 나서 말이야. 얼굴 좀 제대로 들어보겠어?”
하데스가 웃으며 말했고 순간 당황 한 세레나는 오히려 어깨를 움츠러뜨 리며 고개를 숙였다.
“세레나.”
말콤이 떨고 있는 세레나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그의 재촉에 세레나는 겨우 고개를 들었지만, 차마 하데스와 눈까지는 맞추기 힘든지 시선은 비껴 있었다.
세레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하데스가 곧 말콤에게로 고개를 돌리 며 말했다.
“이상하네. 내 기억에는 전혀 없는 얼굴이라서. 그런데 뭐, 십 년 넘게 지났으니 기억 못 할 만도 하지. 그리고 또 워낙 내가…….”
“…….”
“……만났던 여자가 많아서, 일일 이 기억 못 해. 그러니 마음 상해하지 말도록.”
“아, 그…… 예, 예.”
말콤의 이마에서 식은땀 한 줄기가 쭉 흘렀다.
‘뭐야? 아마 순순히 인정하지 않을 모양인 게지? 공자가 자기 사생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침착하자. 말콤은 생각했다. 예상 못 했던 상황은 아니다.
말콤은 최대한 안타까운 표정을 지 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저희가 북부까지 와 루버몬트 성에 방문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고 계신 모양이니, 바로 말씀드 리겠습니다. 이쪽은 세레나라고 합니다. 루버몬트 공자님의 친모이지요.”
그의 말에, 씨익 웃은 하데스가 무 릎을 감싸고는 느슨히 몸을 당겨 앉 았다.
“그래, 그렇다고 하더군. 내가 같이 애까지 만든 여자의 얼굴을 기억 못 하는 건 상당히 놀라운 일이긴 하지 만.”
비꼬듯 말하는 하데스에 말콤은 홈칫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세게 나온다 이거지. 웃기고 있어. 나는 진실을 다 알고 있는데.’
“세레나는 제 성에서 하녀로 일하 고 있던 아입니다. 제가 세레나의 사 정을 알게 된 건, 몰래 울고 있던 모습을 본 이후고요. 아들이 있었다는 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헤어진 후 평 생 얼굴을 못 봤다고 하더군요.”
“피치 못할 사정이 뭔데?”
하데스가 묻자 이번에는 세레나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떨고 있었지만, 표정만은 용기를 냈는지 뚜렷했다.
“그 애를 혼자서라도 키우려고 했 어요. 그렇지만…… 아버지가 저주받은 아이라며 제가 잠든 사이 몰래 그 애를 내다버리고 말았죠. 설마 죽 으라고 오비투스에 버렸을 줄은 몰랐 어요. 그래도 어딘가에는 살아있을 거라고, 엉뚱한 곳만 찾고, 또 찾다 가…….”
“저주받았다고?”
“네. 그 애가 왼쪽 가슴에 달고 태 어난 핵석이…… 조금 이상했거든요. 무색투명한 유리 모양의 핵석이었어요.”
대수롭지 않은 척 말하며 세레나는 예리하게 하데스의 표정을 살폈다.
미묘하게 경직된 미간과, 끝이 잘게 떨리는 입술.
분명 동요하고 있다. 세레나는 확신했다.
“공작 전하, 저는 세레나의 아들을 찾아주고 싶었습니다. 그게 루버몬트 공자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땐, 세레나에게 그냥 잊고 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얘기한 적도 있습니다 만…….”
소백작은 짐짓 슬픈 표정을 짓더니 이어 말했다.
“천륜을 어찌 쉽게 끊을 수 있을까요. 세레나가 너무 가여워 이렇게 실 례를 무릅쓰고 북부까지 찾아오게 됐 습니다.”
“그래,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는 하데스를 보며 세레나는 긴장과 흥분으로 가슴 뛰었다.
공자와 너무 닮아 당황했지만, 말콤의 말대로 공자는 그의 친아들이 아 닌 게 분명했다.
정말 친아들이었다면 자신의 얼굴을 본 순간 거짓말을 눈치챘을 테지.
풍문으로 들었던 루버몬트 공작의 무시무시한 소문이 맞는다면, 자신과 말콤은 이 자리에서 재도 안 남고 타 죽었을 것이다.
공자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신의 발 언에 동요하면서도, 공작은 끝까지 공자가 제 친자가 아님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진실을 알고 있 다고 하더라도 하데스는 끝끝내 아들의 비밀을 지킬 생각인 거였다.
그렇다면…… 과연 말콤의 말대로 이 거래의 승자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정성이 갸륵해. 오르쥬 소백작이 라고 했던가.”
“예, 예!”
“뭐, 나한테 바라는 거라도 있나? 아벨의 어머니를 찾고 데려오기까지 해 줬으니 내가 뭔가 보답을 해야 하는 게 맞겠지?”
“아이고, 바라는 거라니요. 저는 그 저 공자님이 무사히 친모를 뵐 수 있 다면 그것만으로도…….”
“피차 알 거 다 아는 사이에,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뭘 원하지?”
“아! 크홈……. 저는 뭐, 큰 건 바라 지 않고…….”
“필요 없어요.”
그때, 세레나가 말했다.
그녀는 순간 자신을 휩싼 번뜩이는 야망에 매혹되었다.
여기까지 와서 말콤 좋은 일만 시킬 수는 없었다.
왠지 꾀어내기 쉬워 보였던, 어린 공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세레나는 말 했다.
“전 뭔가 바라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예요. 그저 제 아들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며칠만, 며칠만 그 애의 곁에서 머물게 해주 세요. 마음이 정리되고 나면 미련 없 이 돌아갈게요.”
도박판에서 크게 한탕 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건 패기.
인생역전의 열쇠는, 공작을 협박해 재물을 얻어내는 게 아니라 공자의 제대로 된 ‘진짜’ 친모가 되어주는 것이다.
세레나는 묘한 표정의 하데스를 보며, 속으로 웃었다.
“그, 그게 뭔…….”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세레나의 말에 말콤은 당황했지만 곧 태연한 척했다.
가만히 세레나를 마주 보던 하데스 가 빙긋 웃었다.
“그래, 북부까지 찾아온 손님을 성에 머물게 하는 거야 크게 어려운 일 은 아니지. 좋은 방을 내어줄 테니 아 쉬움 없이 묵고 가지. 자세한 이야기는 천천히 해도 될 거고…….”
하데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뒤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세레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잡으라는 듯 내민 손에 잠시 당황하 던 세레나는, 곧 얼굴을 붉히며 어색 하게 그 손을 맞잡고 일어났다.
“아……!”
순간 하데스의 몸이 기울었다. 꼭 뺨에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그의 입술이 가까워져 세레나는 놀랐다.
그러나 하데스는 입 맞추는 대신 세레나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곤 말했다.
“내 아내, 그리고 내 아들. 얼굴 봤지? 둘 중에…… 하나라도 눈물 뽑는 일이 있으면 가만 안 둬.”
다른 의미로 심장이 떨리는, 서늘하 고도 날카로운 목소리가 계속해서 귀 로 파고들었다.
“목숨이 안 아까운 게 아니라면, 감 당할 수 있는 짓거리만 하라는 뜻이 야.”
뭐지.
뭘까, 이 말뜻은.
당황으로 굳은 세레나의 앞에서, 몸을 뗀 하데스는 태연하게 고개를 기 울이며 웃었다.
표정만은 세상 누구보다 다정한 남자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