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화.
오르쥬 소백작, 말콤 오르쥬는 오비투스 옆에 있는 작은 영지 오르쥬의 영주 대리였다.
병환 중인 부친을 대신해 소백작으 로 불리며 몇 년째 영주 행세를 해오 고 있는 그에게는, 크나큰 야망이 있 었다.
바로 변변찮은 작은 영지의 주인이 아니라 제도의 거물급 귀족으로, 정 확히는 대공작 가문 루버몬트의 최측 근으로 자리매김하는 것.
그 인생 목표를 위해 말콤은 벌써 몇 년을 투자해왔다.
루버몬트의 후계자 아벨 루버몬트의 뒤를 캐고, 그쪽에서 함부로 움직 일 수 없도록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조용히 소문을 흘려왔다.
힘없는 귀족인 부친에게 물려받은 것 중 쓸 만한 거라곤 잔꾀 굴리는 머리뿐이었던 말콤은, 자신의 계획이 성공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루버몬트 성에 보냈던 서신이 딱, 세 시간 만에 답장이 왔구나.”
루버몬트 영지의 작은 여관에서 묵 고 있던 말콤은, 방으로 들어와 겉옷 안에서 서신을 꺼내며 히죽 웃었다.
여관방 안에는 낡은 옷차림을 한 깡 마른 여자 하나가 두려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세레나.
말콤이 꾸민 희대의 사기극을 빛내 줄 주연이었다.
“몸이 꽤나 달았겠지.”
루버몬트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코끝에 가져간 말콤이 깊게 숨을 들이 켜며 또 히죽 웃었다.
조심스럽게 봉투를 연 말콤이 서신을 꺼내 펼쳤다.
왜인지 그의 눈이 대번에 놀란 토끼처럼 휘둥그레졌다.
“루버몬트 공작부인?”
입성하라는 공작의 전언을 집사 정 도 되는 자가 대신 휘갈겨 보냈을 거 라 예상했는데 웬걸.
고아한 귀부인의 글씨체로 쓰인 답신은, 성녀라는 루버몬트 공작부인의 친필 서신이었다.
[친애하는 오르쥬 소백작, 아이샤 루버몬트입니다.
먼 곳까지 걸음해준 소백작에게 진 심으로 감사합니다. 나눌 이야기가 많겠지요.
환대하는 마음으로 소백작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편한 때에 언제든 방문하세요.
첫 만남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아이샤 루버몬트.]
짧은 서신이었지만, 안달이 난 공작 부인의 속내가 엿보이는 듯해 말콤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말콤이 루버몬트에 보낸 서신에는 아벨의 얘기가 조금도 쓰여 있지 않 았지만, 제도에 올라와 머문 이후로 차곡차곡 퍼진 소문을 그들이 모를 리 없었다.
“이거, 이거…… 공작부인께는 무 척 죄송하게 되었지.”
말콤이 히죽 웃으며 세레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쓸데없는 죄책감은 갖지 말렴. 일을 그르치면 너만 죽는 게 아니야. 알지?”
“여, 영주님. 사실이 바, 밝혀지면영주님도 무사하지 못하실 거예요. 제, 제발 지금이라도…….”
덜덜 떨던 세레나가 숨을 삼켰다.
미친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얼굴을 바짝 들이민 말콤 때문이 었다.
흰자가 번뜩이는 눈으로 말콤은 조 용히 속삭였다.
“사실? 무슨 사실이 밝혀져?”
“…….”
“세레나. 이상한 소리 하지마라. 나는 공작을 상대로 사기를 치려는 게 아냐. 너는 루버몬트 공자의 친모고, 나는 그런 너를 가여워해 거둔 은 인이야.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사실이 바로 진실이란다.”
“영주님…….”
“그 진실에 반박할 증거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어. 알겠니?”
말콤의 눈이 초승달처럼 야비하게 기울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10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오비투스.
그곳에서 말콤은 하데스 루버몬트를 처음 보았다.
분명 마수 토벌을 나왔던 그는, 뜬 금없이 오비투스 출신의 아벨을 루버몬트로 데려가 후계자로 삼았다.
그 행보를 의심한 것이, 원대한 계 획의 시작이었다.
처음부터 사생아를 찾기 위해 오비투스에 온 게 아니라, 우연히 자신의 사생아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 지.’
말콤은 한 차례의 토벌로 폐허가 되 어버린 오비투스에서 살아남은 아이 하나를 오르쥬로 데 려왔다.
그는 아벨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던 유일한 친구였다.
「아벨이요? 걔는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던데요. 엄마 얼굴도 당연히 몰랐죠. 와……. 걔가 루버몬트 공작님의 아들이었다니. 부러워 죽겠다.」
「특이한 점이요? 글쎄요……. 아, 맞다! 걔, 핵석이 여기, 왼쪽 가슴 쪽에 달려있었는데, 저는 그런 색은 처음 봤어요. 아니지, 그걸 색이라고 해 야 하나? 아무 색도 없이 그냥 투명 한 유리처럼 보이는 핵석이었거든요.」
아벨이 공작의 친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
그것은 곧, 공작이 왜 거짓말까지 해가며 그를 후계자로 세우려 하는지 궁금하게 만들었다.
답은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평범한 제국인들과 다르다는 이상 한 핵석.
말콤은 그 핵석에 정확히 어떤 가치 가 있는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공작이 자신과 피도 섞이지 않은 아이를 후계자로만들 생각을 하게 할 정도로, 아벨 루버몬트에게 어떤 특 별함이 있다는 것.
“루버몬트 공자는 친모의 얼굴을 몰라. 아마 핏덩이일 때 버려졌겠지. 너의 존재를 의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세레나.”
말콤은 기쁜 듯 팔을 쫙 펼치고 깊 게 숨을 들이마셨다.
절대로 자신을 배신할 수 없는 불쌍 한 세레나를 주연으로 세운 이 연극 은, 분명 성공할 것이다.
***
북부, 크레센타 제국 신전.
4년 전 ‘세계 대재앙’ 이후 가이오니아를 믿지 않는 제국인들이 늘어나 며, 신을 모시는 신전의 입지도 예전 같지는 않았다.
다만 성녀로 알려진 아이샤 루버몬트가 재앙을 구원할 때에 대신관 미하일 라이가르트가 힘을 보탰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오히려 그를 믿고 따르는 신전의 일원은 늘어나게 되었다.
“대신관님, 안녕하세요.”
“네, 사제님. 오늘도 신의 축복 아 래 행복하시길.”
신전의 하얀색 대리석 복도를 지나는 미하일의 뒤로, 견습 사제들이 보 내는 선망의 눈빛이 따라붙었다.
천사가 강림한 듯 선한 눈빛과 그 특유의 다정한 표정.
미하일 라이가르트 대신관.
신전의 줄어든 입지와는 상관없이, 그의 아름다운 모습만 좇아 신관이 되기를 원하는 백속성 제국인들도 더 러 있었다.
긴 신전 복도를 지나 작은 기도실에 도착한 미하일이, 문을 열고는 멈칫 했다.
어두운 기도실 안에는 촛불 하나를 켜둔 채 기도 중이던 누군가가 있었다.
말수가 줄고 조금은 어두워진 표정, 어깨까지 자란 보랏빛 머리카락을 한 쪽으로 묶은 열 살의 어린 사제는 데보라였다.
“데보라 사제, 무슨 일이에요? 기도 실에 다 오고.”
“기도드릴 일이 있어서요.”
물론 그녀가 기도드리는 대상은 가이오니아가 아닌 또 다른 신이었다.
미하일은 언젠가, 간절히 바라는 일 이 있어 누군가에게 기도하고 싶을 때에는 자신의 오랜 형제를 떠올리면 된다고 데보라에게 가르쳤었다.
미하일이 빙긋 웃으며 데보라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녀의 곁에 앉았다.
“무슨 일이죠?”
“…….”
“음, 제가 맞혀볼게요. 지금 제도에 도는 소문 때문이겠죠? 루버몬트 공자님이 상처받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빌고 있었으려나요?”
바로 맞힌 미하일이 신기한지, 데보라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미하일이 쿡쿡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그 일로 데보라 사제에게 할 말이 있었어요. 루버몬트에서 있을 정기 세례일까지는 아직 조금 남았지만, 가보려고 하거든요.”
“저, 정말요?”
신전에서는 세례를 명목으로 한 달에 한 번 루버몬트 영지를 방문했다.
4년 전 그 일 이후로 눈에 띄게 분 위기가 어두워진 데보라가 유일하게생기 넘치는 건, 아이샤와 아벨을 보 러 가는 그때뿐이었다.
아직 정기 세례까지는 보름이나 남 았으므로, 미하일의 제안은 확실히 데보라를 기쁘게 할 만했다.
“가봐야지요.”
루버몬트 공자의 친모가 나타났다는 소문과, 그 소문이 몇 년 전부터 중남부에서 퍽 계획적으로 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직후 미하일은 곧장 루버몬트로 향할 채비를 했다.
높은 권좌에 앉은 이들일수록 작은 소문과 선동에 쉽게 흠집이 나는 법.
하데스야 걱정 없지만, 아직은 어린 아벨과 마냥 착해빠진 아이샤가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뻐근한 목을 붙잡고 몇 번 고개를 흔들던 미하일이, 푸른 눈동자를 번 뜩이며 말했다.
“공자님의 친모든 뭐든, 이제 겨우 행복해진 제 형제를 귀찮게 하는 날 파리가 있다면 뭐…….”
“…….”
“……제가 치워드려야지요.”
씩 웃는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공포스러웠지만, 데보라는 개의치 않고마주 웃었다.
상냥한 대신관의 진짜 얼굴을 아는 그녀에게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
부전자전인가.
우리 아벨은 그 이후로 이를 내내, 〈페르소나〉를 막 읽고 난 후의 하데스처럼 온종일 나를 피해 다녔다.
“정말 이러기야?!”
오늘은 담판을 짓겠다 결심하고 나온 날.
연무장 뒤편에서 겨우 아벨을 찾아 낸 나는, 당황한 그가 달아나지 못하 도록 팔부터 붙잡았다.
“대체 왜 그래? 설마 친엄마가 나타 났다니까 이제 나는 필요 없다는 거 야?”
“그, 그런 게 아닌 거 아시잖아요!”
“그럼 뭔데!”
씩씩거리던 아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잘생긴 입술이 삐죽거리는 모양새가 안쓰러 웠다.
지금 가장 혼란스러울 아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내가 아니었다.
“아들.”
나는 가만히 아벨을 끌어안고 말했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왜 이 렇게 겁먹고 있는 거야.”
“저 때문에 어머니가 상처받는 게 싫어요. 사람들이, 아버지를 안좋이게 보는 것도 싫어요.”
“내가 왜 상처를 받아? 전하가 진짜 로 젊은 날 사고 친 것도 아닌데. 나는 알고 있잖아.”
“다른 사람들은 모르잖아요. 아버지가 저를 계속 후계자로 두려고 하 시면, 그러면, 제 친어머니를 인정하 지 않을 수가 없을 텐데…….”
“…….”
“이건 이상해요, 진짜. 사람들은 어머니를 불쌍하다 생각할 거고 아버지를 욕할 거예요. 그리고 저는, 저는, 친어머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모 르겠고…….”
“엄마가 다 알아서 할게.”
“어머니가 뭘 어떻게요? 그래도 저를 낳아준 사람이라고 성에 들일 생각이세요?”
“확실히…… 네 친엄만데 매정하게 굴 순 없겠지.”
“대체 어머니는……!”
버럭 소리치던 아벨이 뒤에서 들려오는 기척에 멈칫했다.
“부인은 마침 이쪽에 계실 텐데요.”
잭스의 목소리였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벨의 어깨 너머로 잭스 말고 낯선 이가 두 명 더 있었다.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 하나와, 그의 옆에 선 깡마른 여자 하 나.
나도, 아벨도 그들이 누군지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앗, 부인! 집사가 방금 손님이라고 데려오신 분들인데, 부인의 초대를 받았다고 하더 라고요. 집사가 안에서 기다리게 하려는 거 제가 근처에 부인 계시다고 데려왔습니다요!”
아…….
눈치 없기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루버몬트 공작부인, 루버몬트 공자님. 오르쥬 소백작, 말콤 오르쥬라고 합니다.”
오르쥬 소백작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하지만 그의 옆에 있던 여자는, 인 사할 정신도 없는지 놀란 얼굴로 아벨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조심히 아벨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여자만큼이나 혼란스러운 표 정이었다.
“나도 반갑습니다, 소백작. 한데 자리가 좋지 않으니 우선…….”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내가 입을 여는 순간, 여자가 불쑥 한 걸음 다가왔다.
그녀는 그리움이 절절한 얼굴로 아벨을 향해 손을 뻗었고, 아벨은 떨며 한 걸음 뒤로 물렀다.
“이봐요.”
내가 끼어들자 여자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거뒀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그런데 너무, 너무…… 참을, 수가 없어서…….”
여자는 갑자기 입을 틀어막고 서럽 게 울기 시작했다. 오르쥬 소백작이 눈으로 내게 사과하며 그녀의 어깨를 쓸어 달랬다.
얼굴을 봐야겠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갑작스러운 만남을 바란 건 아 닌데…….
아직 혼란스러울 아벨을, 마음의 준 비도 없이 친모와 만나게 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떨고 있는 아벨을 돌아보며 말 했다.
“먼저 들어가 있어. 이따 엄마가…….”
“부인!”
순간, 여자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돌아보자 그녀는 빨갛게 달아오른 눈가를 거칠게 옷소매로 쓸며 말했다.
“제, 제 아들……. 한 번만, 한 번만 안아보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