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엄마가 되어버렸다 외전-5화 (194/221)

외전 5화.

난생처음 느껴본 수치스러움에 손 발까지 오그라들었던 경험은 잠시뿐.

해가 저물어가는 오후까지 방에를 어박혀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 하데스 루버몬트는, 다시 완벽하게 콧대 높 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써도 써도 줄지 않는 체력을 탕진해 야 했지만 아이샤는 한계가 왔고, 결국 하데스는 연무장으로 나온 참이었다.

‘그래, 뭐. 아이샤 말대로 처음에 아벨 때문에 북부에 왔든 어쨌든, 지금 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암, 그렇지.

벌써 4년이나 몸을 부대끼며 살았 는데도 매일매일 잘생긴 자신의 모습 이 새롭고 설렌다는 아이샤만 있으면 그뿐 아닌가.

한층 자존감 높아진 얼굴로 하데스는 늦은 시간까지 훈련 중인 기사들을 하나하나 격 려했다.

“오, 우리 아들. 훈련 중이었나? 역 시 틈만 나면 농땡이 피우는 놈들이랑은 달라.”

연무장 한쪽 구석에서 아벨을 발견 한 하데스가 반갑게 다가갔다.

왜인지 무거운 표정으로 칼을 휘두 르고 있던 아벨이 꾸벅 고개 숙이며 웃었다.

“오셨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죽을상이야? 아자르 이놈의 자식이 또 정도를 모르 고 굴린 건 아니겠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아자르를 노려보며 하데스가 말했다.

아벨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 었다.

“아니예요, 아니예요. 그냥…… 오래 훈련해서 좀 피곤한가 봐요.”

“……그래?”

대답하며, 하데스는 아벨의 표정을 기민하게 살폈다.

정말 피곤해서인지 뭔가 다른 이유 가 있는지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데스는 모른 척하며 아벨의 어깨를 툭툭 쳤다.

“몸을 단련하는 것도 좋지만 너무 과하면 안 하느니만 못해. 오늘은 이 만 들어가서 쉬어라.”

“아아, 네에…….”

항상 열성적이었던 그답지 않게, 아벨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곤 연무장을 벗어났다.

터덜터덜 힘없는 걸음걸이로 들어 가는 아벨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하데스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저래.”

눈치 빠른 아자르는 어느새 하데스의 곁에 와 있었다.

아자르가 길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지금 북부까지 올라온 소문에 제도가 난리 난 거, 알고 계셨습니까?”

“소문?”

“예. 저도 급히 알아봤는데, 잠깐 반짝했다가 사라지는 그런 뜬소문은 아닌 모양이더라고요. 몇 년 전부터 중남부 쪽 영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고…….”

“왜 이렇게 사설이 길어? 그래서 뭔 소문인데?”

신경질적으로 돌아보며 하데스가 묻자, 하기 힘든 말을 꺼내는 사람처럼 머리를 긁적이며 망설이던 아자르 가 겨우 대답했다.

“공자님 친모가…… 북부에 있다던 데요.”

“……뭐?”

하데스는 당황으로 굳었다.

***

아벨 루버몬트는 친모의 얼굴을 기 억하지 못한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자신의 기억을지운 것처럼…….

그의 첫 기억은 다섯 살 때, 무법도 시라고 불렸던 오비투스에서 시작되 었다.

또래 고아들의 뒤를 쫓으며 퍽 비참 한 생활을 했던 기억이 선연하다.

살기 위해 음식물쓰레기도 삼켜보 았고, 텃세 부리는 또래들에게 죽을 만큼 맞기도 해봤다.

그러던 중 마수들의 출현으로 폐허 가 되어버린 오비투스에서 제누스라는 여자를 만났고, 후에 그게 아이샤의 영혼이었다는 사실은 알게 되었지만 그 얼굴만큼은 꼭 뿌연 안개가 낀 듯 떠오르지 않았다.

「나를 만나기 전까지 너는 항상 행 복했어. 다정한 부모가 있는 삶, 친한 형제가 있는 삶, 사랑하는 연인이 있는 삶을 살곤 했지. 그래서 얼마나 괴 로웠는지 몰라. 나는 항상 나 없이도 행복하던 너를 죽여야 했으니까.」

「그렇지만 이제 그 괴롭던 시간은 다 끝났어, 아벨.」

괴로운 기억이 잠잠해질 때쯤, 아이샤는 아벨을 앉혀두고 오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그녀의 말이 맞는다면, 제게는 분명 이번 생의 자신을 낳은 친모와 친부 가 존재할 터였다.

우연찮게 듣게 된 친모의 존재가 궁 금하거나 그리운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에게는 아무런 기억도 남아있지 않으므로.

그렇지만…….

아벨은 하데스의 사생아로 알려져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하데스는 아벨을 위해 그 사실을 정정할 생각따위 없을 것이다.

‘그럼 어머니는 어떻게 되는 거지?’

마침 그녀를 떠올리던 와중, 멀리 복도에서 아이샤와 앤이 다정히 조잘거리며 다가왔다.

“아니, 왜 전하는 식사도 안 챙겨주 고 괴롭히신대요?!”

“아냐, 아냐. 배고프냐고 물었어. 내가 진이 빠져서 거른 거지.”

“어휴, 그래도요. 얼른 가서 식사하 세요. 수프 따끈하게 끓여놨어요.”

“어머, 아벨!”

피곤해 보이던 아이샤가 아벨을 발 견하곤 반갑게 달려왔다.

“훈련 마치고 들어온 거야?”

다정하게 자길 끌어안는 아이샤를 마주 안으며 아벨이 대답했다.

“네…….”

“피곤하겠다. 식사는?”

“저녁 먹고 훈련 나간 거예요.”

“그래도 몸 쓰고 왔는데 배고프지 않아? 엄마 지금 저녁 먹으러 갈 건 데 같이 수프라도 한 술 더 뜨자.”

배시시 웃으며 아이샤가 아벨의 뺨에 쪽 입을 맞췄다.

동시에 정순한 백속성의 기운이 홀러 쌓여있던 피로가 단숨에 가셨다.

이제는 익숙해진 이런 애정표현은 항상 아벨을 기쁘게 만들었지만, 지금은 마냥 마주 웃어줄 수가 없었다.

아벨은 가만히 아이샤의 얼굴을 내 려다보며 생각했다.

‘아버지가 내 친어머니를 모른 척 내친다고 해도 문제고, 혹시나 성으 로 들이게 되어도 문제겠지. 어머니는 내가 사생아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세상 사람들은 모르니 까.’

하데스는 자신을 위해, 그리고 루버몬트를 주시하는 수많은 눈들 때문에 라도 친모를 인정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아이샤의 모습은 아주 우 스워지겠지.

“아들?”

“아, 네…….”

“표정이 안좋이네? 무슨 일 있어?”

“어머니, 저…….”

“아벨!”

그때 헐레벌떡 뛰어온 하데스가 아벨과 아이샤 앞에 멈춰 숨을 골랐다.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웬만해 선 숨차 하는 법이 없는 그답지 않았다.

“나, 나랑 얘기 좀 하자.”

“네. 저도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뭐야? 무슨 일인데 이렇게 급하게 달려와요?”

“아무것도 아니야. 일단 아벨, 자리를 좀 옮겨서…….”

“아버지.”

아벨이 진중한 표정으로 하데스를 부르자, 그는 놀라 대뜸 아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둘을 지켜보고 있던 아이샤와 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애 입을 막고 그래요?”

“무, 무슨 말 할지 알겠으니까 일단 따로. 옹?”

하데스가 눈치 주며 아벨의 입에서 손을 떼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제가 사생아가 아니라는 거. 아버지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공표해주세요.”

그의 말에 한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히이이익!”

그 사실을 몰랐던 앤만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하데스는 낭패라는 표정이었고, 아이샤는 당황했다.

아벨이 쉬지 않고 말했다.

“제 출신이 알려지고 나서 벌어지는 일들은 제가 감당할게요. 가신들 이 후계자의 작위를 내려놓으라고 요 구한다면 그렇게 할 거예요. 그러니 까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진실을 밝혀주세요, 아버지.”

“아벨, 갑자기 왜 이 러는 거야?”

아이샤가 웃으며 달래듯 물었다.

아벨은 잠시 서글픈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곧 하데스를 향해 말 했다.

“제발 부탁드려요, 아버지.”

***

나는 입맛이 뚝 떨어진 채 방으로 돌아왔다. 하데스는 뭔가 알아보고 오겠다며 자리를 떴다가 한참 후에야 피곤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다짜고짜 물어보자 그는 이마를 짚 고 앉아 한숨만 푹푹 내쉬 었다.

땅이 안 꺼지는 게 이상할 정도였지만, 왠지 하데스에게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듯해 나는 묵묵히 기다렸다.

그는 한참 만에 말했다.

“아벨의 친모가 나타났다고 하더 군.”

“……네?”

“이미 중남부 쪽에서는 알음알음 조용히 소문이 나 있었다고 해. 이번에 제도에까지 퍼진 이유는 그 친모 가 북부에 왔기 때문이고.”

“뭐, 뭐라고요?”

“나도 더 알아봐야 하겠지만 일단 제도에 소문이 퍼진 지는 얼마 안 된 모양이야. 남부 오르쥬 영지 출신의 여자고, 오르쥬 소백작이 그녀를 제도에 데려온 것 같더군.”

“세상에, 그럼…….”

나는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생각도 안 해봤지만, 사실 아벨을 낳아준 친모가 있다는 건 당연한 얘 기였다.

내가 아벨의 생물학적 부모였던 적 은 첫 생을 빼곤 없으니.

“그럼 아벨이 갑자기 그런 말을 한 건…….”

“나와 당신이 걱정되기 때문이겠 지.”

맞다. 아벨이 루버몬트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데스의 친자 라는 사실, 그거 하나 때문이었으니 까.

제국을 대표한다는 명망 높은 루버몬트 가문이니, 루버몬트의 피라고는 조금도 흐르지 않는 아벨이 그 이름을 이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러니 하데스는 죽어도 아벨이 사 생아라는 거짓을 정정하지 않을 테 고, 그렇게 된다면…….

‘친모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겠 네.’

머리가 아팠다.

소설 〈페르소나〉의 내용대로라면 아벨이 다 자라고 공작이 될 때까지, 아니, 종막에 와서도 코빼기도 보인 적 없던 친모다.

뭐……. 이미 죽어야 했을 하데스도 살고, 죽다 살아난 나도 있으니 소설내용이 달라졌다고 크게 놀랄 건 아니었지만.

“일단 오르쥬 소백작과 아벨의 친모라는 여자가 여기까지 온 의도가 아주 불순하다는 건 알겠네요.”

“……어떤 부분에서?”

“당연하죠. 아벨의 친모라면 아벨 이 당신 사생아가 아니라는 걸 알 테 니까요. 피도 안 섞인 고아를 몇 년 동안 애지중지 키운 거야 눈이 있고 귀가 있으면 알 테고, 당신이 절대로 진실을 밝힐 생각은 없어 보이니 그 것 가지고 협박하려는 거죠. 설마 그어린 애를 오비투스에 내버린 여자가 아벨이 뒤늦게 그리워서 찾아왔겠어 요?”

“하아…….”

하데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며 또긴 한숨을 내쉬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위로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이니 하데스의 속이 어떨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당장은 아벨을 낳아준 친모라는데 내팽개칠 수도 없을 테고, 그렇다고얼굴도 모르는 그녀와의 관계를 해명하기 위해 아벨이 친자가 아니라고 밝힐 수도 없지 않은가.

“있잖아, 아이샤.”

“네.”

“그대가 옛날이야기 꺼내는 거 싫 어하는 줄은 알지만…….”

하데스는 뭔가 궁금해하는 듯했지 민, 바로 묻지 않고 한참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오비투스에서 아벨을 내게 맡겼을 때의 기억, 없어?”

“네?”

하데스가 말하는 제누스일 때의 기 억은……아마 프로크레아토르의 세계로 넘어가기 전의 일일 테다.

“음, 없어요.”

“……그래?”

“네. 그건 왜요? 아……. 아마 그때 라면 아벨 친어머니의 얼굴을, 제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니, 그것보다는…….”

“그것보다는?”

하데스는 눈을 찌푸리며 혼자 한참 뭔가 생각하다가, 곧 고개 저었다.

“아니야.”

그리고 그는 피곤한 몸짓으로 나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달래듯 머리를 쓰다듬자 그는 꼭 어린애처럼 내 품에서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있지. 가끔 나는, 아벨이 진짜 로…… 나와 당신의 결실이었으면 하 고 바라.”

“…….”

“물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나는 아벨을 사랑하지만, 그냥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 그대와 아벨의 오랜괴로움이 끝난…… 의미 있는 생이잖 아. 그래서 더…….”

“그래요. 그래도 아쉽지만, 우리가 가족인 건 변함없잖아요.”

“그래, 그렇지.”

아무래도 일이 복잡해질 듯해 그런 지, 하데스는 답지 않게 퍽 약해 보였다.

나는 그가 안쓰러워 한참 등을 쓰다 듬으며 달래주었다.

“너무 걱정 말아요.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 볼게요.”

“아냐. 그대가 뭘 해. 일단은 오르쥬 소백작을 따로만나서 얘기를 좀 해봐야겠어. 그리고…….”

말을 잇던 하데스는 착잡한지 또 한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는 또,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아벨이 정말로 나와 그대의 친아 들이었으면 좋겠어.”

그래, 그렇다면 이런 머리 아픈 일에 고민할 필요도 없겠지.

하데스의 말도 안 되는 바람이 귀여 워 나는 그런 분위기가 아닌 걸 알면 서도 웃음이 났다.

물론…….

조금 나중의 일이지만, 나는 이때를 회상하며 소설〈페르소나〉의 진실을 깨달았을 때만큼이나 소름 돋았다.

말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이룰 수 있는 작가님도 아니면서…….

이때 빈 하데스의 바람은, 꼭 현실 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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