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화.
하데스는 당황한 얼굴로 한참 나를 바라보더니, 곧 입을 꾹 다물며 고개를 돌렸다.
가까이 다가간 내가 흐트러진 이불을 정리하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왜 왔어?”
“네? 왜 오다뇨?”
하데스가 이따금씩 토벌대를 꾸려 성을 비울 때 빼고, 우리가 4년 동안 따로 잠든 적이 있었던가?
그가 내 방으로 오거나, 내가 그의 방으로 가거 나.
그러니까 당연한 내 방문에 저런 물 음은 확실히 의아했다.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왜 그래요?”
곁에 앉으려는데 하데스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뒤돌아 침대 밖으로 내려갔다.
뒷모습을 보며 얼떨떨해하고 있으 니, 그가 말했다.
“먼저 자.”
“……네?”
아니, 오늘 아벨의 동생을 만들어주 기 위해 힘겹게 제도에서 공수한 속 옷까지 입고 왔는데?
차마 그 얘기는 못 하고 당황하는 사이, 하데스는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나는 오늘 새벽 훈련이 있어서.”
“뜬금없이 무슨 새벽 훈련? 내가 당신 일정을 다 아는데?”
“어, 방금 생겼어.”
“뭐라고요?”
황당해하는 사이, 하데스는 한마디 남겨놓고 바람같이 방을 빠져나갔다.
“쭉 있을 예정이야. 당분간은 따로자.”
세상에.
혼자 남겨진 나는 충격으로 말을 잃 고 한참 눈만 깜빡였다.
뜬금없이 새벽 훈련은 무슨 새벽 훈 련.
이건, 이건…….
명백한…….
각방 선언이었다.
***
이튿날 아침.
늦은 저녁에 방을 나간 하데스는 정말 새벽 내내 연무장을 지켰고, 아침 식사도 거른 채 잠을 청했다.
오늘은 정기적인 건강 검진이 있는 날이라, 나는 아침부터 찾아온 의원 과 멍하니 마주 앉아 있었다.
저명한 의원 벨라리모나드는 원래 황실에서 일하던 젊은 여성이었는데, 4년 전에 하데스가 나를 위해 그녀를 루버몬트로 데려왔다.
상당히 천문학적인 금액의 연봉 협 상을 거치고 데려온 내 담당 의원 벨 라가 요즘 가장 신경 쓰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달거리는…… 보름 전에 하셨다고 했지요?”
“응.”
……건강한 임신!
몇 분쯤 내 상태를 체크하던 벨라는 살짝 뺨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부인, 지금이 가임기라 시기가 좋을 때랍니다. 일전에 공자님이 동생 갖고 싶다고 말하셨다면서요?”
“응, 그랬지.”
가임기 정도는 나도 어렵지 않게 계 산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바로 어제!
속옷까지 차려 입고 하데스에게 갔 던 게 아닌가.
대체 이유를 모르겠는 그의 변덕에 하늘도 못 보고 별도 못 따고 돌아오고 말았지만…….
왜인지 시무룩해진 내 표정에, 벨라 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세요?”
“문제? 으응, 문제…….”
의원에게 물어볼 말은 아니었지만, 도통 하데스의 속내를 알 수 없던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있잖아, 벨라.”
“네, 부인.”
“갑자기 남편이 각방 쓰자고 하는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네?!”
예상했던 대로, 벨라는 눈이 휘둥그 레져 말문을 잃었다.
어제 하데스의 반응은 다른 걸로는 해석이 안 됐다.
4년 동안 부부로 지내는 동안 우리 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어떨 때는 누군가가 삐지거나 다투기도 했지 만…….
나도, 하데스도 각방 선언을 한 적 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서로 서운한 마음이 있을 때도 같이 잠자리에 들고 나면 다음 날 쪽쪽거 리며 일어나는 게 일상이었는데!
“호, 혹시 전하께서 부인께 뭐 서운 한 점이라도 있으셨던 게 아닐까요? 두 분이 다투셨다거나…….”
“아니, 그런 거면 내가 제일 빨리 눈치챘겠지.”
당연히 제일 먼저 의심한 건 내가 뭐 잘못했나, 하는 거였는데 아니.
바로 어제 낮에 함께 점심을 먹을 때만 해도 하데스는 그보다 더 다정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대체 반나절 사이에 무슨 일이……?
아무리 이유를 찾아보려 해도 알 수 가 없어 답답했다.
나는 머리를 움켜쥐고 울먹였다.
“어제 하루만 그런 것도 아냐. 무려 ‘당분간’이래. 당분간 각방을 쓰자고 했단 말이야.”
“네에?”
“뭘까? 분명 무슨 이유가 있겠지? 설마 내가 어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찾아갔던 걸 눈치챘나? 아니, 눈치채 면 뭐? 싫어? 싫은…….”
말을 하다 나는 멈칫했다.
“설마 애를 갖기 싫은가?”
아벨이 생일선물로 동생을 갖고 싶 다고 했을 때 하데스의 반응이 어땠 더라?
생각해보니 별로 적극적이지는 않 았던 것 같기도…….
“그건 아닐 거예요.”
벨라는 단호히 말했다.
“제가 처음 여기에 온 이유, 기억 안 나세요?”
기억난다.
모든 상황이 정리되고 겨우 한숨 돌리려 했을 때, 하데스는 뜬금없이 잘 나가는 황실 출신 천재 의원이라며 벨라를 성으로 데려왔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부인께서 임신하신 게 아닌지 무 척 궁금해하셨죠. 기억나세요?”
“응, 그랬지.”
그때는 정말로 뜬금없었다.
뭐라도 있는 사람처럼, 벨라에게 내 상태를 살피라고 하며 정말 임신한 게 아니냐고 한 서른 번쯤 물었다.
나는 그를 보고 생각했었지.
‘아, 이 사람 애 갖고 싶나 봐!’
그런데 뭐,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 인가.
그 이후로 나는 매달 생리 주기를 체크하는 등 신경을 썼지만, 정작 하데스는 별생각 없어 보였다.
그렇게 4년…….
나는 하데스 말고도 마음을 쓰이게 하는 다른 걱정에 또 테이블 위로 길 게 늘어지며 한숨지었다.
“그런데 왜 소식이 없을까? 정말 이 보다 더 노력할 수가 없는데…….”
우울해진 내 표정에 벨라가 안타까운 듯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무 상심하지마세요, 부인. 아기 님이 오는 건 다 때가 있는 걸요. 부인 도 건강하시고, 전하도 문제없으시니 머지않았을 거예요.”
“그래. 고마워, 벨라.”
“뭘요. 그나저나 전하께서 왜 그런 말을 하셨을까요? 직접 여쭤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렇지.”
나는 벨라의 말에 동의했다.
백날 혼자 고민해봐야 이유를 모르 겠으니 직접 물어봐야지.
대체 아무 문제없던 부부 사이, 4 년 만에 각방 선언을 한 이유가 무엇 인지 말이다.
***
고작 3시간 자고 다시 연무장에 나 갔다는 집사의 보고를 접수한 뒤, 나는 참지 못하고 하데스에게 갔다.
연무장에서는 기사들의 훈련이 한 창이었다.
멀리 하데스가 보였고, 그곳에는 아벨도 있었다.
“어머니!!!”
나를 발견한 아벨은 한참 휘두르던 칼을 내동댕이치고 달려왔다.
“아들, 열심히 하고 있었어?”
“네!”
작년이었을까. 갑자기 훌쩍 커버린 아벨은 14살이 된 지금 나보다 머리 통 하나는 커 있었다.
아직 많은 나이가 아닌데도 퍽 듬직 해진 모습 때문에 이제는 품에 안아 주기도 힘들 정도.
“어쩐 일이세요?”
“아, 전하에게 할 말이 있어서.”
“아버지요? 아버지 저기…….”
아벨이 뒤돌아 하데스를 찾기 위해 기웃거렸고, 나도 그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응? 어디 가셨지?”
“뭐야? 방금까지 있지 않았어?”
“네. 방금까지 계셨는데…….”
나도 분명히 봤다. 한데 무슨 조화 인지, 아벨과 인사를 나누는 그 얼마되지도 않는 시간에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다.
이건…….
‘설마 나 피해?!’
백 퍼센트다.
“음……. 무슨 말씀 하시려고요? 오 시면 전해드릴까요?”
“아, 아니. 아냐…….”
궁금해하는 아벨에게 고개를 젓고 있을 때, 근처에 있던 토벌대 기사들 이 다가왔다.
“부인! 여긴 웬일이십니까?”
부단장 잭스가 친근하게 물었다.
나는 잭스와, 그의 옆에 있던 아자르에게 눈으로 인사하곤 대답했다.
“전하를 보러 왔는데…….”
“아, 여기……. 어라? 어디 가셨 지?”
“그러게. 그새 어디로 갔지?”
잭스와 아자르도 의아해하는데 나는 부루퉁해진 마음을 감출 수가 없 었다.
“그나저나 대장, 오늘 퇴근하지 말 고 제발 같이 술 좀 마셔주라. 응?”
“아, 싫다고!”
잭스가 안 어울리게 우는 시늉을 하며 매달리자 아자르가 질겁하며 그를 밀어냈다.
왜인지 절박해 보이는 표정으로 잭스는 주변에 있던 다른 기사들까지 붙잡고 늘어졌다.
“나 오늘 진짜 집에 들어가기 싫다 고. 누구 나랑 새벽 내내 술 마셔줄 사람 없어? 내가 쏜다니까?”
“무슨 일 있어요? 왜 집에 가기 싫 어요?”
내가 묻자, 잭스 대신 아자르가 피 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누라 무섭다고 이럽니다.”
“……네? 싸웠어요?”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총각이었던 부단장 잭스는, 4년 전 오랜 소꿉친 구였다는 친구와 결혼에 성공했다.
한참 깨가 쏟아지던 신혼의 시기가 우리 부부와 비슷해선지, 매일같이 웃고 다니던 잭스의 기억이 여전했다.
“아뇨, 싸운 건 아니고…….”
“아니고?”
“에휴, 오늘 아침에 아내가 음흉한 눈빛으로 오늘 집에 빨리 들어오라는 거 아니겠어요.”
아.
뭐, 알 거 다 아는 우리는 그 말이 뭔 줄 알지.
그게 무슨 뜻인지 궁금해하는 표정의 아벨이 더 묻기 전에, 나는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런데 그게 왜요?”
“왜냐뇨. 좋겠어요?”
그럼, 싫어?
이해할 수 없어 눈을 깜빡깜빡하자, 잭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긁 적였다.
“좋은 것도 하루 이틀이지. 아니, 여편네가 체력이 저보다 좋아가지고 매일매일 기가 쪽쪽 빨리는데!”
“……야, 공자님 계신다.”
“아, 뭐! 공자님도 이제 다 컸지! 아 무튼 요즘 하루하루가 지옥이라고 요! 눈치를 줘도 못 알아듣고! 아 우!”
“지, 지옥? 그러니까 바리알 경 은…… 시, 싫은 거예요?”
“마누라가 싫은 게 아니라 그게! 그 게 싫어요! 나도 신혼 때는 몰랐지! 이게 싫어질 줄은!”
나는 충격으로 굳었다.
“그렇구나…….”
생각해 보니 사람이라면 한결같을 수는 없겠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설마, 그럼 설마…….
짠 하고 방에 찾아온 나를 본 하데스가 언짢은 표정이었던 것도, 갑자 기 각방 선언을 한 것도 전부……?
순간 휘청거리는 나를, 놀란 아자르 가 붙들었다.
“뭐예요? 왜 그러십니까?”
“아니예요. 그냥 좀, 피곤해서.”
도저히 태연한 표정으로 거기 있을 수가 없어서, 나는 황급히 아벨과 토벌대 기사들에게 인사하고 성으로 돌 아왔다.
***
하데스는 요리조리 나를 피해 다녔다. 식당에 오지 않는 건 물론이고 찾 아갈 때마다 방이고 집무실이고 비운 채 사라져 있었다.
필사적으로 그와 대화하려는 나와, 죽어도 나를 피하려는 하데스의 서로만 아는 술래잡기가 하루 종일 이어 졌다.
답답함에 하루 내 속만 끓이던 나는, 의외의 장소에서 하데스를 만날 수 있었다.
바로 아벨의 방.
아벨에게 굿나잇 키스를 해주고 나 오던 길에, 아마 그의 방으로 가려 했 던 모양인지 오고 있던 하데스와 복 도에서 딱 마주친 것이다.
“여보!”
하데스는 놀랐는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가만히 나를 보다가, 이 내 황급히 몸을 틀었다.
와, 이렇게 대놓고 피한다고?
“잠깐만요! 거기 서!”
내 목소리가 들렸을 텐데도 하데스는 빠른 걸음으로 거의 뛰다시피 도 망치기 시작했다.
황당한 마음에 그를 따라 달리는데, 왠지 내 모습이 처량했다.
‘진짜 너무하잖아.’
이유라도 말해주고 사람을 무시해 야지.
아니, 이유가 뭔지는 대충 알겠는 데, 정말 그 이유라면…….
‘사실대로 말하면 되지. 오늘은 피곤하다고 대충 얼버무려도 되는 거잖아. 사람을 왜 비참하게 해.’
탁오만 가지 생각과 함께 겨우 그의 팔을 잡았을 때, 여전히 돌아보지도 않는 반응에 나는 울컥했다.
“진짜 왜…….”
코끝이 시린 것 같더니 목소리까지 울음이 섞여 나왔다.
흠칫한 하데스가 겨우 돌아보았다. 그는 막 마주쳤을 때보다 더 놀란 얼굴이 되더니, 내 어깨를 와락 붙들었다.
“뭐야? 왜 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