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크레센타 제국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다.’
그것은 인재와 마법사들의 나라, 크레센타의 황권을 조롱하는 문장이었다.
대공작가 루버몬트의 위세가 날로 높아지면서 황실의 권위는 나날이 바닥을 쳤는데, 그 결정적인 권력 반전의 계기는 4년 전에 일어난 끔찍한 재난이었다.
‘세계 대재앙’이라고 이름 붙여진 재난은 크레센타 제국을 포함해, 용신 가이오니아가 만들었다는 이 세계를 전부 집어삼킬 만큼 거대한 타격이었다.
하늘에서는 불이 비가 되어 내렸고 짐승들은 미쳐 날뛰었으며 갈라진 땅 은 용암 속으로 인간들을 삼켰다.
가히 세계의 종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끔찍한 그 재앙 속에서 나타 난 것은, 절망에 빠진 인간들을 구원한 한 줄기 빛.
그 빛은 세계의 끝에서 모두를 구원했다.
죽었던 존재들이 살아나고 무한한 생명력이 흐르게 된 아름다운 광경을 목격한 인간들은, 그를 ‘기적’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적을 일으킨 인간이 크레센타의 대공작가 루버몬트의 공작 부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제국 민들은 놀랐다.
루버몬트 공작가는 용신 가이오니아의 존재를 부정하는 대표적인 무신론자들의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용신 가이오니아가 버린 이 세계를 루버몬트가 되살렸다.」
세계 대재앙을 구원한 루버몬트 공작부인 아이샤 루버몬트는 그 이후 ‘성녀’로 추앙받기 시작했고, 아주 당 연하게도 루버몬트라는 이름은 제국의, 아니, 세계의 정상에 우뚝 아로새 겨졌다.
아마 4년 전의 그 확연한 권력 반전 이 있은 후로 가장 덕을 본 자라 면…….
“아니, 미친 거 아니가?! 어데 겁도 없이 우리 데보라 사제를 납치할라 카는데? 늬들은 이제 우리 공작 전하 께 잡혀서 갈기갈기 찢어질 일만 남 았지라?”
소파 위로 늘어지게 누워 책장을 팔 랑이는 이 남자.
록사 트리볼트.
머리카락 색 때문에 ‘하얀 마법 사’라 불리던 그는 원래 제국의 유명 한 지 명수배자였는데, 루버몬트 공작의 최측근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 신 세가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록사 트리볼트의 지명수배를 거두고 제국에서 살 수 있게 해주시오. 그는 내 사람이니 루버몬트 공작성에 서 지낼 것이고, 제국 질서를 어지럽 히는 일을 하려 한다면 내 기준에서 판단해 차단하겠소.」
범죄자의 꼬리표를 떼어주는 건 물론, 루버몬트의 소속으로 들여 날개까지 달아주겠다는 말에 황실 인사들 은 당황했지만…….
별수 있나.
그 협박이나 다름없는 요구를 한 자는 황제보다 높이 떠 있다는 태양, 하데스 루버몬트이니 말이다.
아무튼 록사 트리볼트는 그렇게 루버몬트로 왔고, 현재는 하데스의 명에 따라 제국의 능력자들을 모아 만 든 ‘루버몬트 마법 재단’의 수장으로 활약하는 중이었다.
그야말로 인생 역전의 대명사랄까.
물론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던 시절의 버릇을 버리지 못해, 이렇게 호화 로운 연구실에서 농땡이 피우는 게 일상이었지민.
쾅!
“오마낫!!!”
기척도 없이 방문이 벌컥 열리자 늘어져라 누워있던 록사가 화들짝 놀라 바로 앉았다.
“저, 전하?”
잔뜩 성이 나 보이는 하데스에 록사 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일이지?
의아했던 록사는, 하데스 뒤에 숨어 있는 익숙한 얼굴에 비로소 깨달았다.
칼튼 로하스.
요새 루버몬트 마법 재단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는 어린 인재로, 학구열 이 대단해 매일같이 배우고 싶다며록사를 괴롭히는 얄미운 14살 사내 아이였다.
“또 농땡이 냐?”
“농땡이라니요, 전하…….”
어색하게 웃던 록사가 몰래 눈을 세 모꼴로 하며 칼튼을 노려보았다.
칼튼이 흠칫 놀라며 하데스의 뒤로 바짝 더 숨어들었다.
마법재단 소속의 마법사 1인 주제에 루버몬트 공작에게 직접 재단 수 장의 농땡이를 발고한 모습이 놀라웠 지만, 그럴 만한 이유는 있었다.
칼튼 로하스는 루버몬트의 후계자아벨 루버몬트와 절친한 동갑내기 친 구였고, 그 때문에 루버몬트 공작 내 외의 편애를 제대로 받고 있는 숨은 실세였으니까.
“뭘 애를 째려봐?”
“하이고, 째려보다니요? 제가 째려볼 눈이 어디 있지라? 잘 떠지지도 않는구만…….”
“하여튼 입만 살았지. 다시 지명수 배자신세로 돌아가고 싶나? 오늘 오 후에 하기로 했다던 토속성 마법 수 업은 어떻게 된 거야? 왜 안 하고 여 기서 늘어져라 누워있어?”
“금방 갈라고 했지라…….”
변명하는 록사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며 끌끌 혀를 차던 하데스가, 그의 옆구리에 낀 책 한 권을 보곤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럼 그렇지. 딴짓 하고 있었군.”
하데스의 시선을 따라 제 손에 들린 책을 내 려다본 록사가 화들짝 놀라며 그것을 뒤로 숨겼다.
“아녀라! 아녀라! 금방 갈 거여라! 야, 칼튼! 수업 준비혀라!”
왜인지 식은땀을 흘리며 허둥거리는 록사의 반응에, 하데스가 눈을 가 늘게 좁혔다.
“뭐야?”
“뭐, 뭐긴예……. 어, 얼른 나가봐야지라.”
여전히 등 뒤에 책을 숨긴 채, 어색 한 걸음걸이로 연구실을 나서려던 록사를 하데스가 붙잡았다.
“숨긴 거 내놔봐.”
“수, 숨기다니예?”
시치미 떼려는 록사를 향해 하데스 가 방긋 웃었다.
순간 록사가 아끼는 결 좋은 머리카락 끝에 작은 불이 붙더니 화륵 타올 랐다.
록사가 책을 떨어뜨리고 소리 질렀다.
“아아아악!!! 아, 알겠어라! 이거! 이거 꺼주셔라!”
“진작 그럴 것이지.”
코웃음 친 하데스가 불을 끄곤 떨어 진 책을 주워들었다.
“이게 뭐야?”
평범한 책의 표지에는 뜻 모를 단어 가 쓰여 있었다.
〈페르소나—외전 증보판〉
“지, 지가 쓴 거 아니어라.”
“누가 네놈이 썼대? 왜 이렇게 벌벌 떨어? 이게 뭔데?”
물으면서 하데스는 놀랐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가는 록사의 실 눈이 뜨여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가는 게 보였다.
웬만해선 저런 표정 짓는 놈이 아닌 데.
“그, 그냥 요즘 제도에서 유행하는 연애 소설이지라. 하도 알음알음 유 명하다기에 저도 얻어다가 읽고 있었는디…….”
“연애 소설? 네 나이가 몇인데 농땡이까지 피우면서 이런 걸 읽나?”
“지도 그냥 맛만 볼라고 했는디, 하 도 재밌어가 시간 가는 줄을 몰랐지 라…….”
록사도 그 자신이 놀라운지 혀를 내 둘렀다.
흥미가 생긴 하데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래? 뭔 내용인데?”
“크으……. 루버몬트 공작과 제국 유일한 성녀의 세기의 사랑!”
“……뭐?”
놀란 하데스가 곧 웃음 지 었다.
루버몬트 공작은 자기고, 현재 제국에서 성녀로 추앙받는 유명인은 아이샤가 아닌가.
제도의 평민 무명작가들이 귀족들의 일상을 나름대로 상상하며 지어내는 통속소설들은 전부터 심심찮게 있 어왔다.
루버몬트의 위세가 날로 높아지다 보니, 이런 소설책이 나오는 것도 특 별할 일은 아니었다.
특히나 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이름 없는 가문의 아가씨를 아내로 맞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세기의 사랑꾼’으로 이름 날리고 있는 그의 이야기라면 더더욱.
하데스가 괜히 코끝을 훔치며 웃었다.
“아니, 뭐 이런 걸 다…….”
으쓱해진 하데스의 표정을 본 록사 가 순간 사색이 되었다.
“아, 그, 그, 전하…….”
“왜.”
“한디 그…… 거기 나오는 루버몬트 공작이, 그…….”
“왜? 너무 멋있나?”
“아…….”
변명할 새도 없이, 하데스가 책으로 록사의 머리를 아프지 않게 딱 내려 쳤다.
“아무튼 이건 압수. 일이나 해라.”
“저, 전하! 그, 그 책은…… 어, 어 쩌실려고예?!”
록사가 연구실을 나서려는 하데스를 붙잡고 말했다.
그는 돌아보며 피 식 웃었다.
“나도 읽어봐야지. 내 얘기라는데.”
“아니!”
“괜한 애 잡지 말고, 일 열심히 해 라. 농땡이 피웠지만 책이 재미있었 다니 봐준다.”
대단히 기분 좋은 얼굴로, 하데스는 연구실을 나섰다.
남겨진 록사는 차마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
[사랑하는 나의 형제, 제누스에게이 책을 바칩니다.
제누스, 네가 바라던 꽁냥꽁냥 외전 이 추가된 외전증보판을 출간하게 되 었어. 꼭 읽어주길 바라. 사랑해.]
방으로 돌아와 책의 첫 장을 펼쳤을 때, 하데스는 놀라 바짝 굳었다.
흔한 저자의 인사말 속, ‘제누스’라는 이름을 알아볼 수 있는 이는 몇 안 될 것이다.
“이게…….”
하데스는 자신의 형제, 프로크레아토르의 이야기를 하던 아이샤의 목소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프로크레아토르는 지금…….」
「작가 하고 있어요.」
「거기서 책을 한 권 냈거든요. 이쪽 세계의 이야기를 소설인 척 엮어 낸 거였어요. 아마 제가 그걸 읽고 뭔 가 알아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 겠죠?」
「제가 그 책의 주인공이었 던…….」
“설마 이게…… 바로 아이샤가 나한테 처음 반하게 됐던 그 책인가.”
대체 프로크레아토르가 무슨 수를 써서 이 책을 제도에 풀어놓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하데스는 서둘러 책장을 넘기고 봤다.
활자만으로도 아이샤를 반하게 만 들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당장 읽어야 겠다고 생각하면서.
***
“홈홈.”
나는 오늘 만반의 준비를 했다.
며칠 남은 아벨의 생일을 앞두고 무 슨 선물을 갖고 싶냐 물었더니, 고민하나 없이 나온 그의 대답 때문이었다.
「동생이요.」
“어휴, 참…….”
사실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극성인 하데스 때문에 거의 하루걸러 하루 동생 만들기를 시도하고 있던 삶이었 지만…….
‘원래 아기 만들기가 이렇게 힘든 가?’
일부러 피임을 하지도 않는데 4년 이 지나도록 별 소식이 없는 건 지금 생각해보니 새삼 놀라웠다.
딱히 간절히 바라고 거사에 임하지 않아서인가?
아무튼 아벨의 생일선물 발언으로 나는 어느 정도 책임감을 느끼게 되 었고, 바로 지금.
하데스의 방 앞.
가운 아래 받쳐 입은 실내용 원피스 가슴께를 살짝 들춰보자, 제도에서 공수해 온 정열적인 컬러의 속옷이 보였다.
“홈홈, 준비 완료.”
익숙한데도 어째 오늘은 새삼스럽 게 긴장이 되어, 몇 번 심호흡을 한뒤 나는 남편의 방 문을 벌컥 열었다.
“여봉~”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나는…….
허공으로 높이 펄럭이는 하얀색 이불을 보았다.
누워있던 하데스의 발길질에 차인 듯한 가련한 이불 한 장은 위로 혹떠올랐다가 장렬하게 가라앉았다.
뭐지?
나는 왜인지 벌게진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는 하데스의 표정이 의아했다.
“……왜 뜬금없이 이불에 화풀이를 하고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