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完).
하데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강 하게 끌어안았다.
몰아치는 불덩이 아래에서도 마지 막까지 나와 아벨을 지키겠다는 듯, 꿋꿋이 안은 팔이 단단했다.
“고마워요.”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어땠을까?
영영 형벌의 굴레에 갇혀 비극적인 삶을 반복했겠지.
“내 삶의 유일한 기적은 당신이었 어요.”
내 고백에, 나를 끌어안은 하데스의 팔에 더 힘이 들어갔다.
“약속 지켜요. 다음 생에도, 또 다 음 생에도 나를 사랑해주세요. 나도, 당신이 어떤 모습이든, 어떤 사람이 든 사랑할게요.”
“당연, 하지.”
최후가 다가오는 것이 괴로운 듯,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만 괴롭혀야지. 이러다 우리 전하 께서 울기라도 하면 어떡하려나.
“그런데 말이에요, 전하.”
“응…….”
“우리는 이번 생에도 행복할 수 있을 거예요. 다 함께.”
말을 마치고, 나는 하데스를 살짝 밀어냈다.
그가 의아해할 새도 없이 도망치듯 몇 걸음 뒤로 물러나고는 말했다.
“사랑한다는 말 한 번 듣기 정말 힘 들었네.”
비로소 그는, 아니, 나의 기적은 나를 구원했고, 괴롭던 나의 운명은 구 원받았다.
이제 내게 남은 비극이란 없다.
나를 안타까워한 내 형제가 남긴 또 다른 ‘기적’은, 비로소 우리를 자유롭 게 할 수 있을 테니까…….
세상의 끝에서 나는 가만히 하데스를 마주 보았다.
천천히 눈을 감는 순간에도 두려움 은 없었다.
눈을 뜨고 나면 그가 사라져있을지 도 모른다는 걱정 따우], 이제는 더 할필요가 없었으니까.
가슴 안쪽에서 뜨겁게 일렁이는 생 소한 마력의 흐름이, 당장이라도 뛰 쳐나갈 것처럼 날뛰었다.
마치 알고 있는 듯했다.
지금이 바로, 기적을 실현시킬 때라는 걸.
“행복해요, 우리.”
나는, 몇 번 나 자신에게 걸곤 했던 세뇌도 함께 속삭였다.
그 순간.
매섭게 주변을 휘감고 있던 파괴의 소음들이 하나의 가느다란 이명으로 묶여 귓가에 맴돌았다.
내게서 뻗어 나온 따뜻한 마력이 내 몸을 집어삼키고, 더욱 크게 번져 모 든 공간을 잠식했다.
한 번도 다뤄본 적 없는 힘이었지만, 어렵지 않았다.
기적이라는 게 무어 별것일까?
그저 내가 원하는 아름다운 상상을 하기만 하면 되었다.
나만의 기적, 하데스가 살아있고.
내 사랑하는 아들, 아벨이 웃고 있 고.
하데스의 말대로, 우리는 가족이 되 어있는…….
눈 쌓인 정경도 나쁘지 않지만, 당장은 봄이었으면 좋겠다.
예쁜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우리는 더 이상 울지도, 슬퍼하지도 않을 거야.
아마 우리의 삶에서 처음 맞는 봄일 테니까.
‘고마워.’
마지막으로는 나의 작가님께 조금 늦은 감사 인사를 하고,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는 한 줌의 빈틈도 없는 백색 빛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점차 그 아득한 빛줄기에 시야가 적응될 때쯤, 나는 익숙한 곳에 서 있었다.
루버몬트 공작성.
언제나처럼 크고 위용이 넘치는 공작성 건물이 보였고, 그 뒤로는 설산 대신 푸른 생기가 넘치는 풍경이 있 었다.
그리고 눈앞에는, 얼떨떨한 표정의 하데스와 아벨이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모두가 그곳에서 꼭닮은 얼굴들로 서 있었다.
그 아무도 다치거나 죽지 않고, 슬 프지 않고, 존재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와따매! 꼼짝없이 뒤져부는 줄 알 고 마지막으로 전하께 욕이나 신나게 박을까 했더니만, 꾹 참은 보람이 있 지 않겠어라?!”
놀란 목소리의 록사가 재빠르게 내게로 달려와 눈을 껌뻑였다.
“대체 요 능력은 뭐간디 다 죽어가 던 땅까지 살려내셔라? 부인께서 한 거 맞지라? 이거 완전 대박인디, 마력 나눔 좀 가능하셔 라?”
“호들갑 좀 떨지 마, 귀 아파.”
함께 다가온 아자르가 록사의 목을 과격하게 붙들며 말했다.
그렇게 말했지만, 아자르도 궁금한 눈치였다.
나는 그냥 한 번 웃어주곤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는 하데스에게 다가가 안겼다.
달려들며 안긴 나 때문에 휘청한 하데스가 얼떨떨한 목소리를 냈다.
“아이샤, 이게…….”
“기적이에요. 당신이 내게 보여준.”
“……뭐?”
“당신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에요. 나를, 나를 찾아줘서, 그리고 사랑해줘서, 포기하지 않아줘서 고마워요.”
하데스의 어깨 너머로, 데보라를 안 은 채 다가오는 미하일이 보였다.
그는 약간 지친 눈빛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나만큼이나 괴로워했던, 불쌍한 나의 형제.
그 또한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내가 슴을 벅차게 했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는디 눈 물겨운 가족 상봉의 현장에 방해꾼이 된 것 같지라? 지들은 어디 가 있을 까예?”
말과는 달리 록사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우리 주변을 맴돌며 덧붙였다.
“내는 아마〜 그대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을 거여~”
록사는 기적이 일어나기 전, 하데스의 마지막 고백을 다 들은 모양이었다.
장난치는 그의 목소리에 나를 안은 하데스가 움찔했다.
올려다보니 부끄러운지, 얼굴이 빨 개져 있었다.
“죽을래? 조용히 안 해?”
“그대를 위해서〜 살아갈 테니께에~”
“야!”
버럭 소리치는 하데스의 품에 있던 아벨이, 내 목을 붙잡아 안으며 울먹 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 어머니. 있잖아요. 이제 우리…….”
“응.”
그가 바라는 대답을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 아주 기 뻤다.
“이제 더 이상 슬프고 괴로울 일은 없을 거야. 다, 끝이 났어.”
정말로 끝이 났다.
아니, 더 이상 슬플 일이 없는 나와, 내 아들 아벨의 삶이 새롭게 시작되 었다.
“전하, 전에 내게 했던 말 기억해 요?”
웃으며 나와 아벨을 바라보고 있던 하데스가 갸웃했다.
“뭐?”
“가족을 갖고 싶다고 했잖아요.”
언젠가 내게, 절대 실패하지 않겠다 고 다짐하며 하데스는 말했다.
「내가 갖고 싶은 건 가족이야.」
「아벨이 내 아들이고, 그대가 내 사랑하는 아내인…….」
「그런, 가족.」
“그래. 그랬었지.”
“정말로 그렇게 됐어요. 약속 지켜 줘서 고마워요.”
“아니, 나야말로…….”
그는 웃는 얼굴로 나를 끌어안으며, 이마에 가볍게 입 맞췄다.
“끝까지 살아줘서, 결국은 이렇게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맙군.”
“이제 행복해요, 우리.”
하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더 꽉 끌어안았다.
나와 아벨은 그의 품 안에서 연신 울면서도 웃었다. 이토록 행복할 수 가 없는 순간이었다.
“아가씨~! 아니, 마님! 도련님! 공작 전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나는 화들짝 놀랐다.
소리가 나는 곳은 공작저 2층, 내 방의 테라스 쪽이었다.
올려다보니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 앤이 부루퉁한 표정으로 우리를 내려 다보고 있었다.
생사를 넘나들고 온 우리의 사정을 알 리 없을 그녀는, 퍽 걱정스러운 표 정으로 다 들리게끔 소리쳤다.
“날 좋다고 언제까지 밖에 계실 거 예요! 식사하러 들어오세요!”
기적으로 다시 만든 이 세계는 꼭 내가 상상했던 것처럼 평화로웠다.
“응!”
다정한 앤의 목소리를 향해 활짝 웃 어준 나는, 그녀의 등장에 다시 얼떨 떨한 표정으로 돌아간 하데스에게 쪽 입 맞췄다.
멈칫하던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피 식 웃었고, 나는 마주 웃은 다음 다시 앤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지금 바로 갈게!”
드디어 바라던 대로, 봄이었다.
에필로그.
[희대의 역작! 〈페르소나〉작가 프로크레아토르 ‘이신’ 팬 사인회]
대한민국, 서울.
강남의 대형 서점에서 열린, 필명 프로크레아토르, 작가 이신의 사인회는 연예인 팬미팅을 방불케 할 규모를 자랑했다.
“자, 작가님……. 너, 너무 잘생기 셨어요. 저 오늘부터 아벨이랑 작가 님 같이 덕질하려고요.”
“하하……. 감사합니다.”
교복 차림의 여고생이 수줍은 표정으로 책〈페르소나〉를 내밀자, 신이 활짝 웃으며 사인했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작가가 20대 초중반의 훈훈한 남성이었다는 사실 은 꽤 충격적이면서도 신선했다.
파격적인 하늘색 염색 머리칼이 잘 어울리는 신의 얼굴을 힐끔힐끔 훔쳐보던 여고생이 말했다.
“저……. 어제 SNS에 올려주신 새로운 설정 있잖아요. 그것도 진짜 대박이었어요. 백속성에 히든 스킬도 있었다니…….”
“기적! 멋있는 설정이죠.”
신이 빙긋 웃으며 사인을 마친 책을 내밀었다.
“네! 그런데 본편에서는 안 나와서 좀 아쉬워요. 외전 생각하고 풀어주 신 설정 맞죠? 데보라가 ‘기적’ 쓰는 스토리도 써주시려는 거죠?”
“하하, 글쎄요…….”
“작가님, 진짜 이대로 끝나면 아쉬 워요. 천년만년 연재해 주세요.”
“가능하다면 저도 그러고 싶네요.
그렇지만 외전 계획은 있어요.”
“정말요?!”
잔뜩 기대하는 소녀의 표정을 보며 신이 다정하게 웃었다.
“네. 꼭, 쓰고 싶어요. 행복해진 그 아이들의 뒷이야기를.”
“기, 기다릴게요, 작가님!”
“감사합니다.”
성황리에 마무리된 이신의 팬 사인 회는 그의 외전 발언으로 또 팬들에게 진득한 여운을 남겼다.
사인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까지팬들의 걸음이 따라붙어 퍽 고초를 겪고 나서야, 신은 차에 오를 수 있었다.
인기 작가의 담당이 된 죄로 함께 고생한 담당자는 하루 새 퀭해진 얼굴로 시동을 걸며 물었다.
“작가님, 집으로 가세요?”
“아뇨. 병원으로요.”
“아…….”
담당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어머니는 아직…… 차도가 없으신 가 봐요?”
“예, 그러네요.”
휙휙 스쳐가는 차창 밖을 무심히 내 다보며 신이 대답했다.
그에게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아픈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담당자는, 괜히 미안해진 표정으로 조용히 차를 몰았다.
‘어머니.’
병상 위에서 메말라가고 있는 익숙 한 얼굴을 떠올리며 신은 힘없이 피 식 웃었다.
이 세계를 창조했을 때, 그는 놀랐다.
그가 만들지 않은 유일한 존재가,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우리 아들! 글 쓰느라 힘들지? 먹 고 해, 먹고…….」
「그거 알지? 엄마는 우리 아들만 있으면 돼.」
자신이 만들지도 않은 어머니가 존재한다는 걸 알았을 때, 신은 당황했 고 곧 깨달았다.
프로크레아토르, 자신 또한 가이오니아가 만든 존재였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했다 하더라도 그의 형벌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슬프구나.」
「나는 너를 믿었건만…….」
「너는 언젠가 나를 배신하고 죽인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부모를 죽이게 될 때마다 네 앞에서 피 흘리던 나를 떠올릴 것이다.」
가이오니아가 퍼부은 마지막 저주를 신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게 이런 식으로 펼쳐질 거라고는 생각 못했지만…….
“작가님,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푹쉬세요.”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담당자를 보내고 익숙한 입원실로 향하며 신은 피곤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언제쯤 벗 어날 수 있게 될까?
이미 그는 한 번의 실패를 겪은 하데스를 알고 있었다.
제누스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그녀의 비극을 전해 들었고, 결국은 홀로 가이오니아를 찾아간 용감한 사내.
“변하질 않는다니까.”
하데스가 아테우스였을 때의 첫 만 남을 떠올리며 신은 낮게 웃었다.
결국 그는 실패했지만, 신은 재창조 한 세계에 그의 영혼을 되살려 다시 금 시간을 흐르게 했다.
물론, 이미 하데스와의 사이에서 함 께 형벌의 굴레에 얽힌 자식 아벨을 낳은 제누스의 운명은 어찌할 수 없 었다.
한 번의 비극을 겪은 제누스는 괴로 워했다. 형제의 고통은 먼 이곳에서 도 여실히 전염되어 느껴졌다.
‘불쌍한 나의 제누스.’
다시금 흐르는 시간 속에서 하데스 가 또 가이오니아를 찾아갈 것을, 자신이 아벨을 죽이고 말 것을 알고 있 던 제누스가 무슨 선택을 할지는 뻔했다.
그렇기에 그녀의 기억을 지우고, 잠 시 이 세계로 데려와 두었던 것은 나 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제누스는 필사적으로 노력했을 테니까.
하데스에게 다시금 소중한 이가 되 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형벌의 굴레를 끊으려 그의 손에 죽기 위해서…….
‘우리는 언제쯤 자유로워질 수 있을 까.’
아마 다시금 제누스는 하데스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었을 것이고, 하데스는 또 그런 제누스를 위해 가이오니아를 찾아갈 테다.
그러나 그가 성공하리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만약, 이 형벌의 굴레를 풀지 못한 다면…….
“어머니, 저 왔어요.”
산소 호흡기를 단 채 죽은 것처럼누워있는 중년 여인의 모습은 이제 익숙했다.
3년 전, 알 수 없는 이유로 쓰러진 그녀는 뇌사 판정을 받았다.
저명한 의사들도 그 이유를 밝혀내 지 못했지만, 신은 알고 있었다.
끊지 못한 형벌의 굴레.
그 저주가 여전히 진행 중이기 때문임을.
신은 침대 곁에 앉아 메마른 여인의 손을 꼭 쥐 었다.
“오늘 첫 사인회가 있었어요. 어머니가 보셨으면 우리 아들 성공했다고엄청 좋아하셨겠죠.”
신은 장난꾸러기처럼 큭큭 웃으며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자신이 만들지 않은 ‘어머니’의 존재가 분명 나중에는 자신을 괴롭게 할 것을 알면서도, 신은 그녀에게 정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창조했던 아버지 신 가이오니아에게서는 느껴본 적 없던, 조금은 낯선 감정.
아마도 진정으로 그를 울고 웃게 만 든 부모라는 존재는, 이 세계에서의 어머니가 처음일 것이었다.
한참 들리지도 않을 이야기를 늘어 놓던 신의 어깨에, 누군가가 가볍게 손을 올려놓았다.
담당의. 그는 벌써 3년째, 신과 함 께 어머니를 돌보고 있는 남자였다.
“이신 보호자님, 잠깐 제 방으로 가 서 얘기 좀 나누시죠.”
어쩐지 그의 표정이 어두워 보였다. 고개를 끄덕인 신이 병실을 나서는 의사의 뒤를 따랐다.
진료실에 도착해 의사와 마주 앉고, 그가 내민 종이 한 장을 받고 나서야 신은 깨달았다.
오지 않길 바랐던 그때가 왔다.
자신의 손으로 부모의 목숨을 끊게 되는, 그날이.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 습니다. 의료인인 제가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면 우스울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의사는 무거운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만약 사람에게 영혼이라는 게 있 다면, 어머님께서는 지금 많이 괴로 우실 거예요. 보호자님의심정은 이 해하지만, 이미 죽은 몸을 억지로 살려둔다면 보호자님도, 어머님도 힘들 뿐입니다.”
뇌사 상태.
신의 어머니는, 언제고 일어날지도 모를 기적을 바랄 수 있는 식물상태 인간도 아니었다.
어떠한 의학적인 조치로도 손을 쓸 수 없는, 삶보다는 죽음에 더 가까이 있는 인간.
시간이 지나면 필연적으로 심장이 멈추어 죽고 마는 상태.
그런 어머니를 억지로 살려둔 건, 비로소 가이오니아의 저주가 끝이 났을 때 그녀가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이, 신에게 있었기 때 문이다.
“지금까지 보호자님은 최선을 다하 셨습니다. 부디 이제는 어머니를 자 유롭게 보내드리세요.”
생명유지 장치 제거에 동의한다는 서류 한 장. 신은 동의서와 함께 내밀 어진 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어머니는 기계에 의지해 어떻게든 계속 뇌사 상태로 남아있을 것이다.
자신이 개입하지 않는 어머니의 죽음은, 절대 일어날 수 없을 테니까.
“하하…….”
힘없이 웃는 신의 눈에서 눈물이 뚝흘러내렸다.
의사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실로 잔인한 저주가 아닌가.
비겁하게 형제들을 버리고 도망쳐 온 벌인가?
형제들을 제외하고는 소중한 이 하나 없던 그에게, 이토록 손을 놓기 아쉬운 선물 같은 존재를 만들고…….
기어코 그 존재의 목숨을, 그의 손으로 직접 거두게 만드는 벌.
신이 천천히 펜을 잡았다.
의사는 비현실적이라고 말했지만, 우습게도 사실이 었다.
인간들에게는 영혼이 존재했고, 지금 어머니의 영혼은 죽지 못한 육체에 얽매여 오랫동안 고통받고 있으 니까.
가이오니아의 저주가 풀리기를 하 염없이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언제가 될지 모를 그때가 오기까지 무작정 버티는 것도, 어머니를 괴롭 게 만드는 일이니까.
“어머니는…… 이해하실 겁니다.”
의사의 마지막 위로와 함께, 신의 떨리는 손이 펜을 쥐고 움직이기 시 작했다.
사인회에서 많이도 적어 넣었던 제 이름이건만, 이번에는 그리도 어려웠다.
질끈 감은 신의 눈 아래로 다시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그때였다.
“서, 선생님!!!”
간호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노크도 없이 진료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호출을 하는 대신 이렇게 진료실로 달려온 모습이 희한했다.
“무슨 일이에요?”
의사와 신의 시선이 동시에 간호사 에게로 향했다.
그녀 또한 3년째, 중환자실에 있는 신의 어머니를 돌보고 있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래서일까?
꼭 제 일인 양, 간호사의 얼굴에는 희열이 가득했다.
눈물까지 어른거리는 얼굴로 간호 사가 벌벌 떨며 말했다.
“마,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한데, 저 도 이, 이게 꿈이 아닐까 싶긴, 한 데…….”
“김 간호사. 진정하고 얘기를 해보 세요. 무슨 일이에요?”
“이, 이신 보호자님! 흐으……. 어, 어머니가 지금, 지금 일어나셨어요!”
“네?!”
둘 모두 놀랐지만, 더 놀란 쪽은의 사였다.
간호사의 말마따나,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3년 전에 이미 뇌사 판정을 받은 환 자가 정신을 차렸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의사는 보호자인 신도 내버려 두고 다급히 진료실을 나섰다.
아…….
홀로 남은 신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하하하…….”
그는 곧 허공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
“고맙다.”
누구를 향한 인사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하나만은 확실했다.
“고마워. 이제…….”
이제 그 또한 이곳에서 행복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외롭지도, 슬프지도 않고.
“행복, 하자.”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