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죽어, 이 악마야.”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증오의 감정 이, 어느새 아이의 눈에 형형했다.
아니, 난생처음 느껴본 감정의 혼돈 이 아니었다면, 충분히 그 속내를 눈 치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무엇이, 이 아이가 거짓으로 내뱉는 호소를 믿게 하고 가이오니아를 나약하게 만들었던가.
“꼴좋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미하일이 팔을 뻗자, 데보라가 기다렸다는 듯 그 에게로 안겨들었다.
오르쿠스에 들어온 순간부터 가이오니아의 앞에 서게 된 지금까지, 그는 한결같았다.
입으로는 저주를 퍼부었고 눈으로는 증오를 드러냈다.
그것은 이그니스를 사랑해 마지않 았던 가이오니아를 슬프고 괴롭게 만 들었다.
다시는 사랑하는 자식들과 예전으 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 게 했다.
그래서…….
그래서였을까.
나만은 당신을 사랑해줄 거 라고, 외롭지 않게 할 거라고, 눈물로 호소하는 데보라의 얼굴에서 그 옛날의 제누스를 찾으려고 발악했던 이유는.
그래서였을까.
“왜? 바보처럼 이 애의 얼굴에서 옛 날의 제누스를 떠올리기라도 했어? 당신을 사랑한다던 그 가엾은 딸의 얼굴을?”
[이그니스……]
“물론 그 다정한 제누스는 진심이 었을 거야. 나도 한때는 그랬고.”
[…….]
“그런데 지금은 아니지. 모든 걸 망가뜨리고 우리를 변하게 한 게 무엇 인지 알아?”
[대체 왜…….]
“바로 당신이야.”
[…….]
“당신이 모든 걸 망쳤어. 그리고 그건, 그 대가야.”
미하일은 미련 없는 눈으로, 가이오니아의 굳어가는 심장을 바라보며 말 했다.
여전히 심장을 관통한 날붙이를 빼 낼 생각도, 여력도 없었다.
이미 마비되기 시작한 마력의 원천을 되돌릴 수 없다는 건, 가이오니야 가 제일 잘 알았다.
최후였다. 분명한.
[제누스…….]
식어버린 미하일의 눈동자를 마주하기가 괴로웠다.
가이오니아는 마지막으로, 그의 뒤에 선 아이샤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제발 그녀만은, 자신을 이해해주었 으면 하고 바랐다.
이 최후에 슬퍼 눈물 흘려주기를.
후회하고 서러워하기를.
사랑했노라고 말해주기를.
과연 다정했던 그 아이는, 놀란 눈으로 가까워지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가이오니아는 주저앉은 아이샤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녀 또한, 내민 손을 맞잡을 것처럼 손을 뻗어왔다.
지금 당장 소멸한다고 하더라도, 저 손을 잡을 수만 있다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을 듯했다.
가이오니아는 작게 웃었다.
그리고.
[아…….]
손끝이 닿기 전, 거두어진 매정한 손으로 아이샤는 안고 있던 하데스를 다시 끌어안았다.
눈물을 참는 그녀의 표정은 단호했다.
결코 당신을 용서할 수 없을 거라 고, 말하는 것 같았다.
온몸이 굳었다.
손끝부터 돌처럼 굳어간 가이오니아의 육체가 한낱 바람에 스러지기 시작했다.
한 줌의 재처럼, 그렇게 가이오니야 가 부서짐과 동시에 오르쿠스의 하늘 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척이 요동치고, 공간은 마치 유리 가 깨지듯 조각나기 시작했다.
***
“……가씨! 아가씨!”
“엄마야…….”
놀라 눈을 뜨자, 운전석에서 몸을 튼 택시 기사 아저씨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고 있었다.
“곤하게 자던데 뭔가 미안하네. 도 착했어요.”
“아…….”
맞다. 〈페르소나〉작가의 팬 사인 회에 가던 길이었지.
택시 안에서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죄송해요.”
“아니예요. 그나저나 여기서 뭐 하 나? 사람들이 엄청 많네.”
팬 사인회가 열리는 대형 서점 건물 1층 앞에는, 나보다도 먼저 도착한 팬들이 진을 치고 서 있었다.
택시 차창 밖으로 보이는 인파들에 나는 서둘러 계산을 마치고 내렸다.
“감사합니다.”
택시에서 내려 신호를 기다리며 핸 드폰을 열었다.
뭔가 잠든 새에 긴 꿈을 꾼 것 같은 데, 기억이 하나도 나질 않았다.
“뭔 꿈을 꿨더라…….”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열고〈페르소나〉작가의 에 들어가면서도 나는 머릿속으로 계속 꿈에 대해 생각 했다.
“우리 아벨이 나오는 꿈이었던 것 같은데…….”
덕후의 꿈이라면 뭐, 뻔하겠지.
“어! 작가님 글 올라왔다.”
어제 새벽에 업데이트된 SNS가 반 가웠다. 나야 뭐, 작가님의 일거수일투족에 감동하는 편이니까.
[오늘은 드디어 제 첫 사인회가 열 리는 날입니다. 오전 8시, 강남 명품 문고 2층에서 만나요~ ^▽^]
[아, 그리고 사인회 기념 숨겨진 설정 하나 풀게요. 백속성에는 사실 숨 겨진 히든 스킬이 하나 있는데요, 바 로 ‘기적’이랍니다. 3차 개방 능력이 끝인 다른 속성들과 달리 백속성 능력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숨겨진 능력 이에요. 여주 버프랄까요?]
[저는 그 아이가 비로소 기적으로, 최후에는 모두에게 평화를 안겨다줄 거라고 믿어요. 꼭 성공할 거예요.]
“오……. 본편에선 안 나왔는데. 외전 예고인가?”
사랑스러운 여주 데보라가 기적으 로 세계 평화를 쟁취하는 스토리도 퍽 재미있겠지.
뭔가 외전을 염두에 둔 듯한 작가님의 SNS 업데이트에 나는 들떴다.
얼른 작가님의 실물을 보고 싶은 마음에 걸음을 재촉하면서, 나는 갑자 기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멈칫했다.
잘 기억이 나지 않던 꿈 내용이 어렴풋이 밀려든 탓이었다.
“아, 맞다.”
시작이 어땠더라. 생각해 보니 딱, 이렇게 사인회를 가던 길에 차에 치 여 죽어버리지 않았던가.
꿈에서는 대체 왜 그렇게 덜렁댔더 라.
“학생!!!”
그때, 누군가의 다급한 비명이 귓전을 때렸다.
그 순간 놀라 고개를 돌린 내 시야 에는 헤드라이트 불빛이 가득 들어찼다.
이른 오전이라 아직은 어둑한 주변을 뚫고, 시야를 점령한 새하얀 불빛을 본 순간.
‘아.’
그때야 꿈속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가 떠올랐다.
‘맞다. 나, 핸드폰 보다가…….’
빠아아앙!!!
긴 경적이 이명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
“아이샤!”
“아…….”
벌써 두 번째 비슷하게 꿈에서 깨어 나고 나니 놀라울 것도 없었다.
오르쿠스로 떠났던 하데스가, 떠나 기 전 마지막 모습 그대로 내 앞에 살아있는 것도.
“……뭐예요?”
누워있던 바닥이 차고 딱딱해 문득 놀랐지만, 그보다는 모두가 무사한지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내 앞에는 아벨을 안은 하데스가, 조금 더 먼 곳에는 미하일과 데보라 가, 그리고…….
“살려줘도 지랄이지라? 어? 하여튼 배은망덕한 불멧돼지 같으니라고!”
“누가 살려 달랬어? 한 번만 더 시 키지도 않은 짓 하면, 뒈졌어도 무덤에서 꺼내서 또 죽여줄 테니까 그렇 게 알아라.”
생채기 하나 없이 무사한 모습의 록사와 아자르도 있었다.
오르쿠스에서의 육체는 영혼체였으 므로, 다시 살아 돌아온 이곳에서 그들이 멀쩡한 모습일 것임은 예상했지 만…….
알고 있었으면서도, 안도가 밀려왔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도 잠시, 록사 가 진동하는 땅 위에서 몸을 휘청거 리며 말했다.
“하이고, 무서버라. 한디 이번에는 너도 같이 뒤질 걱정을, 해야겠는 디?”
그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하늘로 향 했고, 나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분명 공작성 안에서 오르쿠스로 떠 나왔던 것 같은데, 우리는 모두 초토 화된 땅에 맨몸으로 선 채였다.
피처럼 붉게 물든 하늘에서는 수많 은 불덩이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그것들이 하나씩 바닥에 처박힐 때마 다 땅은 크게 진동했다.
꼭 폭격을 맞은 참담한 전쟁터의 풍 경 같았다.
불덩이가 떨어져 내린 곳의 땅은, 무서운 괴물의 아가리처럼 금방이라 도 우리를 집어삼킬 듯 쩍쩍 갈라져 있었다.
“아이샤, 내말 잘들어.”
“전하……. 멀쩡하네요.”
다급히 나를 붙잡는 하데스를 본 내 감상은 그거였다.
사실 이 아비규환 속에서도 내게 중요한 건 그뿐이 었다.
하데스, 그가 죽지 않고 살아남아 내 앞에 존재한다는 것.
“지금 그게 중요해?”
하데스는 왜인지 태연한 나를 보며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한결같은 그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아벨, 괜찮아?”
나는 하데스의 품에 안긴 아벨에게 물었다. 그는 눈물자국이 짙은 얼굴 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아이샤. 대신관이 그러는데, 가이오니아가 없어졌기 때문에…… 그자 가 만든 이 세계도 곧 소멸할 거라 하더군.”
“그래요?”
나는 멀지 않은 곳에 선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그는 곧 사라져버릴 세상의 끝에서도, 나처럼 태연한 얼굴이었다.
마치 곧 일어날 기적을 예상이라도 한 사람처럼.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웃는 내게 하데스가 말했다.
“아니, 그래요, 는 뭔 그래요, 야?”
“뭐, 너무 당연한 얘기라서…….”
“무슨 뜻인지 몰리? 젠장, 그대의 형제라는 놈 말을 믿는 게 아니었어. 세계를 재창조한다고 어쩌고, 저쩌 고……. 가이오니아를 없애면 모든 게 괜찮아질 것처럼 말하더니, 괘씸 하게도 날 속였다고.”
“그쵸. 걔만큼 남들 속여먹는 거 좋 아하는 애도 없을 거예요.”
덤덤히 웃으며 대답하자 하데스가 눈을 깜빡이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는 품에 안긴 아벨을 바라보며 말 했다.
“너무 절망적이라 네 어머니가 정신을 놔버린 모양이다.”
“어, 어머니…….”
걱정스러운 표정의 아벨에게 웃어 준 뒤, 나는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무 작정 하데스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살아줘서 고마워요.”
“그래, 무사한 건 좋은데 그것도 이제 끝이라니까. 그러니까 아이샤, 내 말을 좀 들어봐.”
“네, 듣고 있어요. 말해요.”
나는 하데스의 품으로 더 파고들며 그의 팔에 안겨있던 아벨을 함께 안 았다.
“이 세계가 사라지고 나면 내가, 그리고 그대가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 어. 죽더라도 다음이 약속되어있다면 좋을 텐데, 확신할 수가 없으니까.”
“네.”
“그래서 못 했던 말을, 지금 하려고 해.”
하데스는 품에 안긴 나를 떼어내고 말했다.
진지한 표정에도 나는 웃음이 나왔다.
전혀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웃는 내가 황당한 눈치였지만, 하데스는 시 간이 없다고 생각하는지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어떤 모습으로, 어 떤 누군가로 몇 번의 삶을 살아왔는 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해.”
“…….”
“나는 아마 그대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을 거야.”
아…….
주저 없이 나온 고백에,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사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하고 있었는데도…….
“정말요?”
갑자기 눈물이 터지려는 걸 겨우 참고 되묻자, 하데스는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서 확실히, 나는 약속할 수 있어. 만약에, 만약에 이게 우리의 끝이 아니라면…… 만약 다음에도 내게 그대를 만날 수 있는 기적이 주어 진다면…….”
“…….”
“그때도 나는 그대를, 사랑할 거 야.”
말하면서, 하데스는 작게 웃음 지었다.
“그러니까 혹시…… 내가 바보처럼 그대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조금만 기다려줘.”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던 모양인 지, 하데스의 손이 내 뺨을 다정하게 훔쳤다.
“어차피 나는 또 그대를 사랑하게 되고, 또 그대를 위해서 살아갈 테니 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