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가이오니아가 무심한 눈으로 데보라를 내 려다보았다.
“저는, 저는 죽기 싫어요. 저는 대신관님께 소, 속아서 여기에 왔어요. 제가 시,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서, 뭔가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러셨지 만…….”
미하일의 생각을 내다보는 것쯤, 가이오니아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데스가 실패하면 자신의심장을 노릴 무기로 삼기 위해 저 아이를 데 려왔을 터.
하지만 아이는 한없이유약했다.
아이샤와 미하일을 제외한 모두의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 것을 본능적으 로 느꼈는지, 아이는 죽기 싫은 마음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제, 제발……. 혹, 저, 저도 살려주 세요. 저는 아버지를 괴롭게 하는 자 식이 되지 않을게요. 제발 살려주세요. 저도, 저도 아버지가 만든 자식이 잖아요. 저도 살려주세요. 저는 평생 아버지의 곁에 있을게요. 죽기 싫어요. 무서워요…….”
가이오니아의 발을 붙든 데보라가 벌벌 떨며 중얼거렸다.
[너도…….]
“네! 저도, 흐윽, 저도 아버지의 자 식이잖아요. 저는 절대 아버지를 괴 롭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 외 롭게 두지 않을게요. 저는 죽고 싶지 않아요. 제가, 제가 아버지의 곁에 있을게요.”
지쳐버린 가이오니아의 눈이 가만 히 데보라를 응시했다.
제누스와 이그니스, 그리고 지금은 사라져버린 프로크레아토르만큼 사랑하는 피조물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데보라도, 하데스도, 아벨도, 전부 제 자식들과 다르지 않은 인간이었지만, 그 의미는 같지 않았다.
해서 생명을 거두는 데에 그토록 무 정했던 것인데…….
[살고 싶구나. 그래.]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목숨을 구걸하는 아이의 모습은, 불현듯 가이오니아의 지친 마음을 동하게 만들었다.
그의 눈이 다시금 아이샤와 미하일을 응시했다.
여전히 증오로 불타오르는 표정의 미하일은, 배신감을 느끼는지 데보라를 바라보며 부들부들 떨 었다.
“어찌 구차하게 저자에게 목숨을 구걸한단 말입니까, 사제? 내가 사제 에게 가르친 저자를 향한 분노와 증 오가 겨우 그것밖에 안 되었습니 까?”
“싫어, 싫어……. 살고 싶어. 저는 아버지가 주신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않을게요. 제발 저는 살려주세요.”
[이그니스.]
발치에 매달린 아이를 무시하고 가이오니아는 미하일에게로 다가갔다.
[돌아가자꾸나. 나를 미워하고 증오 한 죄는 더 묻지 않을 테니.]
“꺼져.”
한순간의 고민도 없이 나온 대딥에, 가이오니아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는 이번에는, 옆에 주저앉은 아이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제누스, 내 아이야.]
“…….”
[너를 아끼는 나의 깊은 마음을 이 해한다면 부디, 함께 돌아가자꾸나.]
가만히 가이오니아를 올려다보던 아이샤는 행동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여전히 텅 비어버린 눈으로, 그녀는 하데스의 식은 몸을 바짝 끌어안았다.
눈물에 젖은 뺨을 맞대며 아이샤는 작게 웃었다. 정신이 나가버린 것처럼 보이는 얼굴이 안쓰러웠다.
‘난 또 결국 실패했구나.’
아이샤는 생각했다.
미래는 꿈속에서 봤던 것과 크게 다 르지 않았다.
아니, 가이오니아에게 빌기로 결심한 이후 조금은 달라진 것도 같았지만 오히려 더 비극적이었다.
꿈에서 본 미래와는 달리 반대편에 서 있는 미하일은, 가이오니아를 죽 이겠다며 의지를 불태운 것과 달리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의욕이라곤 없어 보였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울먹거리던 데보라는 살고 싶어 가이오니아의 발치에 무릎 깛고 있었다.
그대로 죽을 줄 알았던 아자르는 어 째서인지 미래처럼 두 발을 붙인 채 서 있었지만 깊은 상처는 여전했 고…….
하데스는.
“미안해요.”
그나마 마지막까지 검을 쥐고, 제 눈물을 닦아주었던 오른팔을 잃은 채로 죽었다.
전사의 가장 큰 무기를 잃은 그의 마지막 모습은 이보다 더 비극적일 수 없을 정도였다.
희망이라곤 없다.
가이오니아를 죽일 수 있는 ‘신을 믿지 않는 존재’, 하데스는 전투 불능 상태였고, 데보라는 제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설사 데보라가 끝끝내 신을 믿지 않는 존재로 남았다고 하더라도, 작고 약한 몸으로 가이오니아의심장에 칼을 찔러 넣을 수는 없었다.
정말로 모든 게 끝났다.
‘생각해보면 항상 이랬지.’
아이샤는 멍한 눈으로 식어버린 하데스의 뺨을 쓰다듬으며 자조적으로웃었다.
자식을 죽이는 수많은 미래들을 보 고, 그와 같은 비극을 막기 위해 발버 둥 쳤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다른 선택은 지금처럼 이렇게, 더 큰 비극을 불러오곤 했다.
하데스를 처음 만났던 전생에서 도…… 그랬었다.
자식을 죽이지 않기 위해 죄 없는 수많은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 고 그건 분명 자신의 탓이 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말걸.
전생을 기억했을 때, 하데스에게 모 든 것을 털어놓지 말걸.
죽여 달라고 부탁하지 말걸.
이제는 그도 아벨만큼이나 자신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는데, 결국은…….
‘이제 정말 지쳤어.’
차라리 죽이라고 말하는 미하일의심정이 이해가 됐다.
매 생에서 죽음을 선물했던 아벨과, 자신을 위해 죽어버린 하데스가 없는 세상에서 대체 무슨 의미로 뻔뻔하게 살아갈 텐가.
아이샤는 가만히 고개를 올려 가이오니아와 눈 맞추고 말했다.
“살고 싶지 않아요.”
[…….]
“아버지를 사랑했지만 지금은 아니 에요. 제 자신만큼이나 증오스러워요.”
두려워서, 그의 앞에서는 절대로 내 뱉을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진심이 었다.
가이오니아는 무심한 얼굴이었지만, 아이샤는 그 눈빛 너머 충격으로 일그러지는 그의 속내를 읽을 수 있었다.
비극 속에서 우습게도 희열이 일었다.
아이샤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준 이 죄 많은 목숨 따위 한 번도 아까워한 적 없어요. 그런 나를 살고 싶게 했던 유일한 사람도 죽 었으니 이제 미련이라고는 없어.”
점점 식어 딱딱하게 굳어가는 하데스의 몸을 다시 한번 끌어안은 아이샤는, 전에 없이 매정하게 덧붙였다.
“내게 당신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는 새로운 삶이 허락된대도 당신을 잊지 않을 거예요. 영원히 저주할 거 야.”
[그것이…… 나의 사랑에 대한 너의 대답이냐?]
“제발!”
핏발 선 눈으로 아이샤는 소리쳤다.
“사랑한다고 말하지마.”
[…….]
“당신이 입에 올릴 말이 아니야.”
그 말을 해주길 바랐던, 그 말을 해 줄 수 있을 만큼 정말로 그녀를 사랑해주었던 남자는 죽었다.
끝내 그 말을 해주지 못하고서.
“표정이…… 볼만하네.”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미하일이 비 죽 웃으며 가이오니아를 조롱했다.
“기분이 어때? 그렇게 사랑한다던 자식들에게 외면당하는 기분이.”
[…….]
“우리의 운명도 뒤집을 수 없었지만, 당신도 마찬가지야.”
죽음이 두렵지 않은 미하일은 거리 낄 것이 없었다. 그는 충격 받은 듯한 가이오니아를 향해 계속 말했다.
“영원히 외로움에 몸부림치면서, 그렇게 홀로 존재해. 당신 같은 미친 존재를 사랑해줄 인간은 없어. 그냥 곁에 아무도 없이, 그렇게, 영원을 홀 로 살아가.”
그것은 외로웠기 때문에 세계를 만 들고 인간을 만들었던 가이오니아에게 가장 끔찍한 저주였다.
가이오니아의 텅 빈 눈동자가 미하일을 빤히 응시했다.
“아버지…….”
그때 다시금 다리를 붙잡는 온기가 느껴졌다.
가이오니아의 메마른 시선이 아래 로 향했다.
“외로우셨어요? 외로워서, 외로워 서 그러신 거였어요?”
데보라는 울먹이는 얼굴로 물었다.
“저도, 저도예요.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혼자가 됐을 때…… 죽는 것보 다 혼자 남았다는 게 더 고통스러웠어요.”
[…….]
“사실 저를 외롭게 만든, 아버지를 원망했어요. 바보 같지만…….”
[그게 어찌 네 탓이겠느냐.]
우는 데보라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가이오니아가 말했다.
이 작은 아이가 자신을 원망하게 된 이유는 이그니스 때문일 터였다.
자신을 저토록 증오하는 이그니스 가신을 원망하도록 데보라를 종용했을 테니까.
“저는 외로운 것도 싫지만 죽는 것도 무서워요. 흐으……. 아버지, 저는, 저는 살려주세요. 저는 아버지가 외롭지 않도록, 곁에 있을게요.”
“하하하하!!!”
데보라의 호소에 미하일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분노한 눈빛으로 말했다.
“나와 내 형제의 운명이 불쌍하다 고 눈물짓던 사제가 맞습니까? 어째 서 이 모든 비극을 낳은 저자에게 머리를 조아립니까? 내가, 내가 얼마 나…….”
부들부들 떨며 소리치는 미하일의 목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데보라는 귀를 막았다.
가이오니아는 천천히 주저앉은 데보라를 안아들었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가이오니아를 보았다.
[그래…….]
어린아이의 눈빛에는 살고자 하는 욕망이 절실했다. 결코 꾸며낼 수 없는 진심.
자신이 준 생명을 결코 아까워하지 않는 자식들과는 사뭇 달랐다.
“아버지…….”
[…….]
“저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사랑해요. 외롭지 않게 곁에 있을게요.”
제 목을 잡고 매달리는 데보라의 얼굴에서 가이오니아는, 어린 시절의 제누스를 떠올렸다.
「이것 보세요, 아버지. 아버지가 만든 세상은 아름다워요.」
꽃을 따와 건네며 수줍게 웃던 아이.
「사랑해요, 아버지.」
목을 안고 매달리며 사랑한다고 웃 던 아이.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사랑스러운 아이.
이제는 그런 아이가 자신을 증오한 다며 핏발 선 눈으로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슬펐다.
만약 인간들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면, 이것은 슬픔에 가장 가까울 거 라 고 가이오니아는 생각했다.
[괴롭구나. 내가 만든 자식들이 모 두 나의 뜻을 거스르고야 말다 니…….]
그의 눈에서 끝내 눈물이 흘렀다.
데보라는 그보다 더 가슴 아파하는 얼굴로, 가이오니아의 뺨에 흐른 눈 물을 훔치고 안겨들었다.
“저는, 저는 아버지의 뜻에 따를 거 예요. 제발 저를 버리지 마세요.”
[그래, 불쌍한 내 아이야. 너만은 나의 뜻을 알아주어 다행이구나.]
이리도 황폐해진 마음이건만, 고작 제누스를 닮은 인간 아이 하나에게 위로받는 것이 우스우면서도 놀라웠다.
그의 변덕은 이 작은 아이를 살려두 겠다고 결정했다.
[부디 슬퍼하지 말거라. 나의 세계 안에서 나의 뜻을 따르며 너는 비로 소 자유로울 수 있을 테니…….]
말을 마치고, 가이오니아는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저 어리석은 내 아이와는 달리…….]
비록 자식들에게 배신당했지만, 그 들의 뜻대로 그들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모든 것은 처음으로 돌아갈 것이다.
괴로웠던 이 세계의 기억을 전부 지 우고 나면, 사랑스러웠던 자식들은 다시 돌아올 수 있겠지.
[돌아가자꾸나.]
가이오니아는 천천히 아이샤와 미하일에게로 다가갔다.
그들은 여전히 원망스러운 눈빛이 었다.
[모든 것은, 처음으로…….]
이 번에는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자식들이 아무리 외로움을 호소하더라도 결코…….
[너에게 소중한 것은…….]
그는 마지막으로 아이샤의 우는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인 나와, 너의 형제들이면 그뿐이다.]
가이오니아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 렸다.
최후의 순간이었다.
[사랑하는 내…….]
그리고, 그때.
그를 응시하고 있던 아이샤의 눈이 놀람에 물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가이오니아는 당장 그 순간에는 인지하지 못했다.
[아.]
차가운 날붙이가 파고든 심장이 삽 시간에 돌처럼 굳는 느낌.
이 세계를 만들게 한 무한한 마력의 원천이던 심장이, 갑자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돌덩이처럼 차갑게 얼어붙었다.
천천히 돌린 시야에 잡힌 미하일이 히죽 웃고 있었다.
비로소 가이오니아의 고개가 뻣뻣 하게 아래를 향해 기울었다.
정확히 심장을 찌른, 작은 날붙이.
자신이 부러뜨린 반쪽의 검을 쥔 채, 데보라는 떨며 말했다.
“죽어, 이 악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