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네놈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 자는 여기 아무도 없다. 다만 네놈이 처절 히 용서를 구하는 모습은 봐야겠는 데, 역겨울 것 같으니 목숨으로 대신 받지.”
비로소 제 주인을 찾은 ‘신을 믿지 않는 자의 무기’가 번개처럼 휘둘러 졌다.
챙!
전처럼 공격을 막아낸 가이오니야의 팔뚝 위로 단단한 금빛 비늘이 솟 았다.
쩍, 쩌적.
하나 전과 달리 철갑 같았던 그의 피부 위로는 미세한 균열이 일었다.
하데스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기 울었다.
챙! 챙! 챙!
틈을 놓치지 않은 벼락같은 공격이 쉴 새 없이 몰아쳤다.
반격할 의사가 없어 보이는 가이오니아는 하데스의 공격을 막는 데 급 급했다.
합이 이어질수록 하데스는 비로소 승기를 잡았음을 느꼈다. 가이오니야 의심장 부근에서 버려지듯 흘러 사 라지는 오오라의 양이 늘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이오니아를 몰아붙이고 있는 하데스의 모습을 보면서도, 아이샤는 불안으로 떨었다.
모든 것이 내다본 미래대로 되어가 고 있었다.
록사의 죽음.
결국에는 가이오니아의 앞에 모인 이들.
가이오니아와 대적하고 있는 하데스까지…….
지금은 분명 하데스가 승기를 잡은 듯해 보이지만, 최후의 순간에 어떤 비극이 펼쳐질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주군! 조심하십시오!”
멀리서 화살을 날리며 하데스를 엄 호하던 아자르가 소리쳤다.
벼락같이 내리치는 공격을 겨우 막아내기만 하던 가이오니아가, 웬일인 지 멀찍이 몸을 옮기고는 공격을 준 비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과연, 그곳에 모인 모두를 긴장에 떨게 할 만큼 거대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무슨.’
하데스가 당황하는 사이, 그의 몸이 한순간 불길에 휩싸여 타오르기 시작했다.
“주군!”
“아, 아버지!”
놀란 아자르와 아벨이 소리 질렀다.
자연 발화
일평생 하데스 그가 자유자재로 다 뤄왔던 불의 능력으로 고스란히 공격받는 상황은 퍽 참담했다.
그러나 예상 범주 내의 일이었다.
제국인들의 모든 능력은 가이오니아에게서 비롯되었고, 그것은 신을 믿지 않는 자인 하데스 또한 마찬가 지였으므로.
“아버지……!”
“아벨.”
보다 못한 아벨이 뛰어들려는 것을 아이샤가 막았다.
그녀는 왜인지 힘겨운 표정으로 고 개를 가로저었다.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데스가 한 걸음 발을 내딛는 순 간, 그를 삼키고 타오르던 불꽃이 사 그라졌다.
멀찍이 떨어져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가이오니아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오, 이 공간에서 능력은 전부 봉인되었을 텐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퍽 태연한목소리로 미하일이 중얼거렸다.
그는 반대편에 선 아이샤를 바라보 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속형 무효화라도 걸어두었던 모양인데, 그렇다 하더라도 발동이 되는 게 신기하군요.”
다시 검을 바로 쥐고 가이오니아를 향해 달려드는 하데스를 보며 미하일 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신을 믿지 않는 자에게 주어지는 특혜이려나요. 과연 내 형제의 치밀 한 안배가 대단하군요.”
비죽 웃는 미하일을 보며 품에 안겨있던 데보라가 떨었다.
한순간 하데스가 불타 죽는 줄 알고 놀랐건민, 설사 정말 그렇게 되었다 고 하더라도 미하일은 눈 하나 깜빡 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데스가 죽어버리면 이곳에서 살 아 나갈 방법이 요원할 듯한데, 어째 서 미하일은 이리도 태평한 얼굴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를 빤히 올려다보는 데보라의 시선을 느꼈는지, 미하일이 다정히 웃으며 말했다.
“가이오니아는 신이랍니다. 호락호락하게 당할 리가 없지요. 제가 공작 에게 바라는 건 살아남아 가이오니아를 처단하는 게 아니랍니다. 사제도 그런 건 기대하지마세요.”
“고, 공작 전하가 죽으면 어떻게 해 요? 뭐든 도와드려야…….”
쾅!
그때 거대한 불덩이가 내리꽂혔다. 재빨리 몸을 피한 하데스가 자욱한 연기 위로 몇 번 기침을 내뱉었다.
그때 아벨은 버거워하는 아이샤를 보고 깨달았다.
가이오니아의 공격을 상쇄한 건 아이샤의 능력인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가이오니아도 눈치챘는 지, 멀리서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한눈팔 시간 있나?”
챙!
어느새 뒤에서 내려치는 하데스의 공격을 반사적으로 막은 가이오니야 가 작게 웃었다.
[확실히…… 대단하구나. 내가 많은 힘을 봉인당하긴 하였지만, 한낱 피 조물에 지나지 않는 너를 상대하기 위해 이리 공을 들여야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기분 나쁘군. 뒈질 걱정을 해야 할 놈이 아직까지 입만 살았어.”
가이오니아의 약점은 합을 나눌수 록 하데스의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일단, 프로크레아토르에게 일정 부 분 힘이 봉인당한 그는 본래의 육체, 즉 드래곤의 본체로 싸우는 것이 불 가해 보였다.
기껏해야 부분적으로 본체화하는 것이 최선.
능력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거 대한 가이오니아의 본체와 싸우게 된다면 가망이라곤 없으니, 다행인 일이었다.
챙! 챙! 챙!
방향을 틀어가며 내리치는 공격을 무식하게 막기만 하는 가이오니아를 보며 하데스는 속으로 웃었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넘치는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절대 적인 존재.
그렇기 때문에 굳이 인간의 육체로 뒤엉켜 싸워본 일이라곤 없었을 것이다. 감히 그에게 이런 식으로 도전하는 존재들도 없었을 테고.
‘마력을 뺏고 붙으면 아자르나 잭스 놈을 데려다 놔도 처리 가능한 수준이다. 이렇게 쉬울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하데스가 피식 웃으며 입술을 한 번 훑었다.
가이오니아가 승기를 잡기 위해서는 하데스를 마법으로 공격해야 했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구멍 뚫린 가이오니아의심장에서는 쉴 새 없이 마력 이 흘러나와 버려지고 있었으니까.
아마 그는 무한의 마력이 전부 소모되기 전에 승부를 보고 싶겠지 만…….
‘글쎄.’
아이샤의 무효화 때문인지 그것도 힘들 터였다.
쉬이이이—!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이 하데스의 주변으로 퍼부어졌지만, 보이지 않는 보호막에 흠집만 몇 번 일으키고 사 라졌을 뿐.
슈욱!
순간, 틈을 놓치지 않고 가이오니아를 향해 대각선으로 날아온 아자르의 화살을 발견한 하데스의 눈이 빛났다.
기회였다.
화살을 피하기 위해 몸을 튼 가이오니아를 향해 전력 질주한 하데스가 그의 가슴팍 위로 검을 깊게 찔러 넣 었다.
푸욱!
‘아, 젠장.’
아슬아슬하게 한 뺨 정도가 빗나가 고 말았다.
재빨리 가슴 부근의 피부를 단단히 굳히는 가이오니아를 피해 하데스가 급히 검을 뽑았다.
‘이런.’
동시에 금빛으로 발광하는 가이오니아의 눈을 확인한 하데스가 급히 몸을 틀어 소리쳤다.
“피해!!!”
수천 개의 칼날처럼 빚어진 바람의 흐름이, 이번에는 하데스가 아닌 아자르에게 향했다.
자신을 겨냥한 공격을 느끼지 못할 아자르는 아니었지만, 안타깝게도 피 할 재간은 없었다.
능력이 봉인당한 공간에서는 그의 특기인 순간이동도 사용할 수 없었으 니까.
“컥……!”
바람의 칼날이 쏟아져 온몸을 저미 자 아자르가 들고 있던 활을 떨어뜨 리며 피를 토했다.
살이 터지고 뼈가 갈리는 참혹한 광 경을 빠짐없이 보고 있던 미하일이 데보라의 눈을 가리며 자기도 슬쩍 고개를 돌렸다.
“나쁘군요.”
“대, 대신관님. 놔, 놔주세요.”
“네?”
데보라가 크게 한 번 몸부림 쳐 미하일의 품에서 내려오더니 그대로 아자르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사제!”
놀란 미하일이 다급히 데보라의 뒤를 따랐지만, 다행히 아자르 위로 퍼 부어지던 가이오니아의 공격은 끊긴 상태였다.
하데스가 그의 정신 집중을 막고 다시 쉴 새 없이 공격을 퍼붓는 중이었다.
“괜히 힘 빼지 마세요, 사제.”
초주검이 되어 겨우 숨만 붙은 아자르의 모습에서 시선을 돌리며 미하일 이 말했다.
그대로 놔두면 죽겠지만 데보라는 굳이 그를 살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울먹이는 얼굴로 데보라는 아자르의 상처 위에 손을 갖다 대고 능력을 구현했지만, 소용없었다.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는 아자르를 보며 데보라가 엉엉 울 음을 터뜨렸다.
“소용없다니까요.”
“대, 대신관님은 대체…… 왜 저를, 왜 저를 데려, 데려오신 거예요. 저는, 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짐 만 되고, 차, 차라리 전에 봤던 거기에, 마, 마법사님 말고 제가 남았다면 좋았을 텐데…….”
무력감은 어린아이의 약한 마음을 쉴 새 없이 괴롭혔다.
차라리 이곳에 오지라도 않았으면 좋았을까.
제국인들이 ‘신’이라고 숭배하는 가이오니아는 악마보다도 잔인하고 무 서운 존재였고, 그 앞에서 자신은 너무나도 무력했다.
대체 미하일이 왜 자신을 데려온 것인지, ‘사제만이 할 수 있다’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미하일은 울고 있는 데보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니예요. 저는 분명 보았답니다. 저 못된 신을 끝내 응징하는 사제의 모습을요.”
“제가, 제가 대체 어떻게…….”
미하일의 시선은 어느새 다시 하데스와 가이오니아에게로 가 있었다.
“이런. 아버지께서 이제야 머리를 쓰는군요.”
미하일이 탄식하듯 말했다.
왜인지 가이오니아는, 부질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하데스에게 계속해서 마력을 퍼붓고 있었다.
뜨거운 화염이 주변에 몰아쳤고,바람의 칼날이 하데스를 감싸 안은 백 속성의 보호막 위로 쉴 새 없이 퍼부 어졌다.
거리를 붙이기 위해 다가오는 하데스의 걸음걸음마다 얼음이 생겨났다 가 녹아 사라졌다.
전부 상쇄되는 마법들을 지켜보며 하데스가 웃었다.
“무슨 발악이지? 학습능력이 너무떨어지는데?”
“어머니!”
그때 아벨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데스의 시선이 날카롭게 가이오니야 너머에 있는 아이샤에게 향 했다.
“아이샤.”
피를 토하며 몸을 주저앉힌 아이샤 가 억지로 눈을 부릅뜬 채 겨우 버티 고 있었다.
‘젠장. 무효화를 벗겨내려는 거였 나?’
무효화가 보호해줄 수 있는 한계치는 시전자의 마력과 비례한다.
무효화까지 개방한 수준의 마력을 상쇄할 자가 인간 중에는 없었으므 로, 인간들 사이에서야 그 능력은 ‘무 적’으로 칭송받았지만…….
[끝났구나.]
덤덤한 가이오니아의 말과 동시에, 하데스는 제 가슴 언저리에서 느껴지 던 따뜻한 기운의 마력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허공에 커다란 불덩이 하나 가 떠올랐다. 그것은 정확히 하데스를 겨냥하고 있었다.
“아버지! 제발!”
몸을 피하려던 하데스의 눈이 놀라 커졌다.
당장 불덩이가 내려앉을 자리 위로 아이샤가 무작정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막아야 했기 때문에 혼자 몸을 피할 수도 없었다.
사아아아—
“흡…….”
그러나 거대한 화염구는 아이샤에게 닿기도 전에 바스러졌다. 가벼운 재 몇 줌이 허공 위에 나부꼈다.
[너…… 대, 체…….]
하데스는 말문이 막힌 채 멍하니, 공격을 취소한 가이오니아의 얼굴을 응시했다.
표정이라곤 하나도 없던 그의 놀란 얼굴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인간 같 았다.
제 손으로 아이샤를 죽일 뻔했던 상 황에 놀란 듯, 핏발 선 금안이 혼란으 로 허우적거렸다.
[이 어리석은 것이…….]
단숨에 아이샤의 팔을 낚아챈 가이오니아가 하데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어느새 그녀를 데리고 허공으로 멀 찍이 몸을 옮긴 가이오니아가 말했다.
[왜.]
“…….”
[왜 나를 이렇게 괴롭게 하느냐?]
“아버지…….”
이미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아이샤는 엉금엉금 기어 가이오니아의 발치까지 다가갔다.
“살려주세요. 제발……. 저 사람, 을, 제발……. 죽이지 마세요. 제발, 제가, 이렇게…….”
[…….]
“이렇게, 빌게요. 저를, 용서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렇지만 제발, 저, 저 사람만은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