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저벅, 저벅.
여유로운 웃음과 함께 하데스가 천천히 걸어 그와 거리를 좁혔다.
가이오니야.
그렇게 만나고 싶었던 얼굴은 상상했던 것만큼 특별하지는 않았다.
신비로워 보이는 금발과 금안을 제외하고서는 인간과 꼭 닮아 있는 모습이었다.
가까워질수록 가이오니아의 표정이 더 자세히 눈에 들었다.
무심한 얼굴이었지만 그 너머에 일 렁이는 감정이 명백하게 느껴졌다.
“하…….”
하데스는 우스웠다.
뭐라고 해야 하지.
슬픔? 절망?
적어도 이 모든 비극을 만들어낸 장 본인이 지을 만한 눈빛은 아니 었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꺼림칙한 금색 동공이 보일 만큼 그와의 거리가 가 까워졌을 때.
하데스는 천천히 걸어오며 바닥에 질질 끌리던 검을 바로 들고 돌진하 기 시작했다.
휘이익—!
날이 잘 선 검이 크게 한 번 포물선을 그리며 가이오니아의 머리 위로 내려쳐졌다.
챙!
순식간에 팔을 들어 하데스의 공격을 막은 가이오니아의 눈이 무심히그를 훑었다.
‘본체인가.’
찰나에 팔뚝 부분이 단단한 피부로 바뀌었다. 금색의 비늘이 돋아난 피 부는 꼭 철갑옷처럼 단단했다.
‘뚫리기는 할지 궁금하군.’
맞붙은 반동으로 물러나 착지한 하데스는 귀찮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저 한 번 내질렀을 뿐인데도 검을 든 팔이 얼얼했다.
예상은 했지만 당연하게도, 만만한 존재는 아니다.
부분적으로 변형시킨 본체의 피부 에도 홈집 하나 내기 어렵다면, 그가 본모습을 내보이고 난 후에는 어찌 상대해야 할지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다른 방법이 있을 리가.
죽이는 것.
심장에 칼을 박아 넣고 터뜨리는 것.
그것밖에는…….
[두 번째로 보는구나.]
“뭐?”
가만히 서서 하데스를 지켜보던 가이오니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질문이 의아했다. 하데스가 신경질 적인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뭔 개소리야?”
[너를 살리기 위해서 내 자식들이 그렇게 눈물겨운 노력을 했는데도 결 국은 제자리…….]
“…….”
[이것이 정말로 제누스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그 아이를 만들 고, 기르고, 누구보다 사랑했던 아비 인 내게, 대적하는 것이?]
“사랑해? 내가 아는 사랑의 의미가 언제 이렇게 바뀌었는지 모를 일이 군.”
하데스가 코웃음 치며 하는 조롱에 도 가이오니아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 었다.
그는 안타깝다는 듯 입술을 기울이 며 한숨지었다.
[무책임한 아이야. 네가 떠나고 나 서 제누스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정녕 몰라서, 똑같은 선택을 했느냐 하데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괜히 정신을 어지럽히는 독이 될 그의 목소리 따위 홀려들으면 그만이건 만, 왜 신경이 쓰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두 번째.
똑같은 선택.
전부 이해할 수 없는 의아한 말들이 었다.
[너는 또 죽고야 말겠지. 그렇지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프로크레아토르는 제누스를 위해 수십, 수백 번 이 세계를 다시, 창조할 테 니까.]
“…….”
[제누스는 너를 위해 수십, 수백 번죽으려고 할 것이고.]
“…….”
[그렇지만 어리석은 너는 또다시 내 앞에 찾아오겠지.]
“개 같은 소리 그만하고…….”
다시 가이오니아를 향해 달려들려 던 하데스가 멈칫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가이오니아의 옆에 나타난 아이샤 때문이 었다.
“아이샤?”
놀란 하데스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환상이었다.
익숙한 루버몬트 성 안의 배경.
조금 지친 듯한 표정의 아이샤는 행 복해 보였다. 품 안에는 작은 보자기에 싸인 아이 하나가 있었다.
[얼마나 괴로웠을지 상상이 되느냐. 자식을 죽일 수밖에 없는 운명인 걸 알면서도 저 애의 탄생에 제누스는 기뻐 눈물을 흘렸지.]
“무슨…….”
[모르겠느냐? 너의 자식이다. 네가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고서 두고 떠난.]
순간 하데스가 충격으로 휘청거렸다.
가이오니아가 보여주는 환상 속의 아이샤는 분명, 제누스의 영혼이 들 어간 다른 삶의 그녀가 아니 었다.
하데스가 없는 루버몬트의 안주인 이 된 아이샤 루버몬트의 모습이었 고, 그녀의 품에 안긴 건…….
“이런 식으로 인간을 약하게 만드는 게 네 특기인가 보군. 미안하지만 네놈의 악명은 질릴 정도로 많이 들 어서 말이지. 나는 호락호락하지 않을 텐데.”
일부러 아이샤의 환상에서 눈을 떼 며 하데스가 웃었다.
동요하지 않으려는 하데스를 보면 서도, 가이오니아는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
그는 무심한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모든 것은 네 선택이었지. 떠나지 말라고 붙잡는 제누스를 두고 오르쿠스에 온 것도, 기어이 그 애에게 너의 유일한 흔적을 남겨둔 것도. 결국 끝 나지 않을 저주의 굴레를 또 선물한 것이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해도, 하데스는 혼란스러웠다.
만약 가이오니아가 보여준 환상이, 자신이 떠나고 홀로 남은 아이샤의 모습이 맞는다면.
앞으로 펼쳐질 미래라면…….
‘아이?’
설마.
남겨두고 온 아이샤의 배 속에?
[후회되느냐?]
“시끄러워.”
[너는 그른 선택을 했지만 되돌릴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한데 단 한 번도, 그들이 바라는 선택을 하지 않 았지. 정녕 너의 선택이 제누스를 행 복하게 하였느냐? 그렇게 생각하느 냐?]
환상이 뒤바뀌었다.
다 무너져가는 낡은 오두막 한 채. 조금 앳된 모습의 자신이 그곳에 있 었다.
‘이번엔…… 과거?’
그곳이 어디인지 하데스는 알고 있 었다.
아벨을, 그리고 그를 부탁했던 제누스를 처음 만난 오비투스.
「도와줘서 고맙군. 목숨을 빚졌어. 사례는 제대로 하지.」
「아뇨, 사례는 됐어요.」
여기까지는, 하데스가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대화였다.
두꺼운 로브 아래에 감춰져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던 여인, 제누스의 모습까지도.
그러나 다음 장면부터는 아니었다.
침대에 누운 하데스를 간호하던 여 자가 로브를 벗어내고 살풋 웃는 순 간.
“저게…….”
하데스는 놀랐다.
분명, 기억 속에는 그저 뿌연 안개처럼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던 로브 차림의 여인은.
아이샤, 그녀였다.
「보고 싶었어요.」
「……뭐?」
「어차피 기억하지 못하게 할 거니 까, 하고 싶은 말, 다 해버려야지.」
「…….」
「나를 위해서 죽지 말아요. 이번에는 행복할 수 있을 거예요. 유일한 방 법을 알았으니까.」
아이샤는 슬픈 얼굴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지 못했는 데 이렇게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히 야. 사랑해요. 언제 어떤 모습으로만 났든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가 없었을 거예요.」
서럽게 우는 아이샤의 앞에서, ‘과 거의’ 하데스는 영문을 몰라 당황스 러운 얼굴로 침묵하기만 했다.
「한 번이면 됐어요. 나를 위해서저버렸던 삶은. 이제는 내 차례야.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요.」
말을 마친 아이샤는 하데스의 눈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나를 기억하지 말아요. 지금 내 얼굴도, 이 순간도, 우리의 인연도. 그저 행복하세요. 영원히.」
그것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신 지배, 암속성의 이능이라는 건 눈치 껏 깨달을 수 있었다.
분명 오비투스에서 만난 적 있던 ‘제누스’.
지금의 아이샤와 꼭 같은 그녀의 얼굴을 하데스가 기억하지 못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
그 이후로는,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아이샤는 의문의 소년, 아벨을 맡기 며 혹시 전생을 기억한다고 말하는 자가 나타나면 죽여 달라 부탁했다.
신을 믿지 않는 자가 자신을 죽일 수 있음을 알기에.
자신이 죽어야만, 아벨이 죽지 않 고…….
자신이 죽어야만.
하데스가 가이오니아에게 대적하기 위해 오르쿠스로 떠나지 않을 테니까.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거지? 내가 아까 본 건 미래인가? 아니, 그 전에, 저놈이 보여준 환상이 진실일 확률 은?’
혼란스러웠다.
아이샤와 형벌의 굴레로 얽힌 자식의 영혼은 아벨이 아니었던가?
한데 왜, 가이오니아는 미래에 새로 태어나게 될 자식까지도 그녀에게 죽 임 당할 운명이라고 얘기한 거지?
아니, 애초에…….
루버몬트에 홀로 남아있던 아이샤의 모습은 미래가 맞나?
‘아니 리면 혹시…… 내가, 기 억하지 못하는…….”
“젠장.”
거친 욕이 튀어나왔다.
알 듯 말 듯, 혼란스럽게 엉킨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돌아가거 라.]
“…….”
[네가 죽으면 제누스가 슬퍼할 것이다. 하나 산다면 그 애에게는 삶의 희망이 생길 테지.]
“시끄러워.”
하데스는 험악한 표정으로 가이오니아의 말을 끊었다.
이 모든 비극을 만들어낸 장본인인 주제에,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꼴이 우스웠다.
어쩌면 가이오니아가 ‘자식들을 사랑했었다’는 아이샤의 말은, 진실일 지도 모른다.
다만 그 방식이 인간의 기준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지.
[제누스는 여전히 자식을 죽여야하는 제 운명을 괴로워하면서도 스스 로 목숨을 끊지는 않을 것이다.]
“…….”
[네가 살아있으니까.]
“…….”
[그러니까 살아라. 그 애가 자식에게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행복할 수 있도록.]
“정말이지 정신 나간 소리만 하는 도마뱀이군. 인간이 아니라 짐승 새 끼인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멍청할 일인가.”
[…….]
“네놈이 그 돼먹지 못한 저주만 풀 어줘도 아이샤는 처음부터 불행할 일 없었어.”
아주 당연한 얘기를 왜 해줘야 하는 지, 하데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가이오니아는 냉정하게 고 개 저었다.
[내 아이들을 슬프게 한 존재들이다. 받아 마땅한 형벌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뭐?”
왜인지 그의 말이 의아하게 들린 하데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가이오니아의 말은, 그러니까…….
“네놈이 미워하는 건, 아이샤의 자식이고 대신관의 연인이라는 말이 냐? 그 ‘형벌’을 받고 있다는 게, 네자식들이 아니라는, 소리?”
[…….]
침묵은 긍정이었다.
하데스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대단하군.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사랑하는 자식들에게 죄책감 따위 갖지 않고 살아왔겠어. 네놈 기준에서는 벌을 받고 있는 게 자식들이 아니니까.”
[나는 누구보다 내 자식들을 사랑하는 존재다. 설사 그 아이들이 나를 배신하고 가슴 아프게 하더라도, 나는 그 아이들을 고통스럽게 할 생각 이 없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멍청한 놈들 은 많이 봤지만…….”
다시 검을 드는 하데스의 얼굴에서는 황당하다는 웃음마저 사라져 있었다.
“……네놈은 그중 최고야.”
[…….]
“그 사랑하는 자식들이, 왜 네놈 생 각과는 달리 자기들이 벌을 받고 있 다고 생각하는지.”
[…….]
“그 무식한 대가리로 곰곰이 생각을 좀 해 봐.”
말을 마친 하데스가 다시 전력으로 질주해 가이오니아에게 달려들었다.
챙!
위에서 내리 그은 검이 다시 한번 가이오니아를 가격했다.
이번에는 날카로운 검의 모양처럼 변형된 가이오니아의 팔.
전과 달리 하데스는 물러서지 않고 버티어 선 채 검을 든 팔에 힘을 실 었다.
‘젠장. 힘이 아주 장사군.’
인간의 육체라고 해서 그 힘이 인간 같지는 않았다.
두 팔에 힘을 주고 있는데도 고작 한 팔로 자신을 막아낸 가이오니아에 하데스는 이를 악물며 버텼다.
[굳이 네 한계를 알려주어야 포기할 것이냐.]
가이오니아가 자유로운 제 왼팔을 치켜들었다.
한순긴, 그의 왼손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변해 하데스의 어깨를 향해 날 아왔다.
‘젠장!’
빠른 속도에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입겠다고, 생각한 그때였다.
쉬이 이익—!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 한 대가 하데스와 가이오니아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정확히 가이오니아의 팔꿈치를 겨 냥한공격.
틈을 놓치지 않은 하데스가 몸을 떨어뜨렸고, 제 팔꿈치에 박힌 화살을 무심히 내려다보던 가이오니아의 고 개가 멀리 뒤로 향했다.
동시에 하데스의 시선도 다급히 누군가를 찾았다.
돌아본 곳에는, 다시 활시위를 당긴 채로 웃고 있는 아자르가 있었다.
“주군, 이 재미있는 도마뱀 사냥을 혼자 나오셨습니 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