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엄마가 되어버렸다-181화 (181/221)

181화.

“또 이렇게 도망갈 생각이었어요?”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하데스가 멍하니 아이샤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이, 문을 닫고 들어온 그녀가 들고 있던 접시를 탁상 위에 올 려두고 다시 물었다.

“또 도망갈 생각이었냐고요.”

“아니, 난…….”

어느새 큰 눈에는 금방이라도 떨어 질 듯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리고…….

그 젖은 눈빛 너머에 스민 애정, 그리움, 같은 것들.

잠시나마 그녀를 믿지 못하고 속으 로 서운함에 투정 부렸던 제 모습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절절한 감정이었다.

하데스는 먹먹해지는 마음에 일부 러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라도 하 지 않으면 꼭 그녀처럼 울게 될지도 몰랐다.

“나 안 보고 싶었어요?”

“대체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그대는…….”

“그게.”

미간을 좁힌 아이샤가 성큼 가까이 로 걸음을 붙였다.

“그게, 날 보자마자 하고 싶은 말이 에요? 어떻게 여기 있냐는 게? 정말, 당장……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말이냐고요.”

“…….”

“여기까지 오는 데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한시도 전하를 생 각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우리는 어 떻게 될까, 혹시 죽게 되지 않을까, 그런 걱정보다도 나는.”

“…….”

“그냥 당신이 보고 싶었어요. 만약 세상의 끝에서 만나게 되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혹시 다시 못 만나 게 되면 어떡하나, 그런 걱정만 했다 구요.”

끝끝내 고여 있던 눈물이 아이샤의 뺨을 타고 흘렀다.

목 끝까지 차오른 설움을 삼키며 아이샤가 하데스의 목깃을 원망하듯 붙 잡았다.

“보고 싶었어요. 나, 너무…… 당신 이 너무…….”

“…….”

“보고 싶었어.”

젖은 목소리가 만들어낸 고백을 끝으로 마주 선 두 몸이 다급히 맞붙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삼킨 채로 둘은 그간 나누지 못한 말들을 대신했다.

보고 싶었다는 말을 행동으로 대신하려는 모양인지 남자의 입맞춤은 뜨 겁고, 버거웠다.

흡사 목마른 짐승들 같았다. 몰아붙 이는 거친 기세에도 오히려 여자는 부족하다는 듯 남자의 목을 안고 매 달렸다.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고요 속에 서 젖은 혀가 뒤엉키는 소리만이 선 명했다.

턱.

벽까지 밀어붙여진 아이샤의 등이 긴 탁상에 닿았다.

잠시 입술을 뗀 둘의 눈빛이 허공에 서 진득하게 얽혀들었다.

“흑…….”

떨어진 입술 사이로 미처 삼키지 못한 울음소리가 터졌지만 잠시였다.

아이샤를 안아 탁상 위로 앉힌 하데스의 입술이, 아주 짧은 순간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다시 그녀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텅, 탱그랑…….

격정적인 움직임에 탁상 위에 올라 있던 싸구려 장식품들이 하나둘 바닥으로 떨어지며 위험한 소음을 만들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이를 가 로막는 한 꺼풀을 벗겨내기 위한 서로의 손길들이 다급했다.

“하아…….”

탁상에 앉은 채 바짝 벽에 붙어 하데스를 끌어안은 아이샤의 입술을 가 르고 가쁜 신음이 터 져 나왔다.

겨우 숨을 고를 수 있는 그 순간마 저도 하데스의 붉은 눈은 오롯이 아이샤를 담아내느라 정신없었다.

투명한 동공 위로 비치는 제 얼굴을 바라보며 아이샤가 울듯이 웃었다.

안 보고 싶었냐니.

이 얼굴을, 어떻게.

“보고 싶었어.”

“…….”

“나야말로.”

***

많이 울었다.

오고가는 대화 속에서 내 운명이 서 러워서도 울고, 지금까지 힘들었음에 북받쳐 울고.

……너무 힘들어서 울고.

“정말 대책 없군. 얌전히 기다릴 것 이지 여긴 왜 와서…….”

오르쿠스에 따라온 자초지종을 내게 전해들은 하데스는, 혼자 옷을 열 심히 챙겨 입으며 혀를 끌끌 찼다.

나도 그를 따라 옷을 입으려다 그냥 말았다.

엎드려 겨우 눈을 뜨고 있는 것만 해도 힘들어서…….

“대책 없다니. 대체 누가 누구한테. 거사를 앞두고 이렇게 체력 낭비하는 게 더 대책 없는 모습이 아닐까요?”

“뭐래? 이런 것도 예상 안 하고 용 감하게 내 방 문을 두드린 거야?”

녹초가 돼 누워있는 나를 내려다보 며 하데스가 피식 웃었다.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던 그가 내 옆에 살짝 걸터앉았다.

다정하게 뻗어온 손이 내 뺨을 쓸고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 리해주는 동안, 그의 표정은 조금 무거워졌다.

“왜 따라왔는지는 알겠지만, 아이샤. 난 여기까지 와서…….”

“네. 저도 전하를 다시 데리고 돌아 가려고 여기 온 거 아니예요. 설득해 봤자 설득당할 사람도 아니 잖아요?”

“그럼…….”

“죽어도 같이 죽어요. 나도 가이오 니 아의 앞에 갈 거예요.”

내가 딱 잘라 말하자 하데스의 얼굴 이 굳었다.

그는 곧 한숨을 쉬더니 이를 갈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록사, 이 새끼 진짜……. 잘 숨어 있으라고 했더니, 역시 제대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어. 그놈 자식은 한 대때려주고 가야겠군.”

“자, 잠깐.”

록사의 일은 미처 말하지 못했다.

함께 왔을 테니 여관방 어딘가에 록사가 있을 줄로 안 모양이다.

당장 나가려는 하데스를 붙잡고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미 벌어진 일인데 괜히 록사 씨를 탓해서 뭐 해요. 나 움직이기 힘드 니까 가만히 좀 있어요.”

그는 불퉁한 표정으로 망설이다가, 다시 옆에 누워서는 나를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그런데 1층에서 그대에게 치근덕 대던 놈은 뭐야? 여기 와서 만난 건 가?”

“누구…… 아아! 데이먼 씨?”

친근한 부름에 하데스가 인상을 와 락 찌푸렸다.

일부러 록사 씨의 물약을 먹고 자란 아벨의 얘기는 빼놓았던 나다.

이렇게 놀려주려고.

“여기 와서 만났죠. 혹시 전하가 죽 고 나면 어떻게 해요? 아벨에게는 아버지가 필요하니까 저도 괜찮은 사람을 물색해야죠. 잘생기기도 했고 전하만큼 강하기도 해서소 급히 고 른 남편감치곤 꽤 괜찮은 것 같아요.”

진지하게 고민하는 척 말하자 하데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정도로 눈이 커진 건 처음 봤다.

몇 번 눈을 깜빡이던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진심이야?”

“이 상황에서 제가 뭐 하러 거짓말을 해요? 아, 혹시나 데이먼 씨가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 이따가 가서 전하랑은 아무 사이 아니라고 해명해야겠다.”

“아니…….”

벌떡 몸을 일으킨 하데스가 뭐라 말도 못 하고 입을 뻐끔거리는 모습이 볼만했다.

“그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아니…… 왜 내가 당연히 죽을 거라고 생각해? 살아서 돌아오면 어떡하려고?”

“풉.”

결국 못 참고 웃음을 터뜨린 나를 보며 하데스가 미간을 좁혔다.

“인상 좀 펴요.”

잔뜩 찌푸린 그의 눈썹 사이를 어루 만지며 내가 말했다.

“아들도 못 알아봐. 바보도 아니 고.”

“뭐?”

“그거, 아벨이에요. 사실 오르쿠스의 첫 시련을 통과하면서 죽을 뻔했 거든요. 그때 아벨이 아니었으면 죽 었을지도 몰라요.”

“아벨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 던 건데?”

“록사 씨가 아벨에게 줬던 약이 하나 있었거든요. 뭐라더리, 마력을 개방할 때 방출되는 의지를 모아서 만 든 거였대요.”

“아아, 기억이 나는군. 1 + 1 할인가 로 4억 노르트에 팔아먹으려고 했던 소원의 물약인가 뭔가…….”

“어머, 전하께도 드리려고 했나 보 네요.”

“영 신뢰가 안 가서 네놈이나 양껏 마시라고 안 샀지. 한데 그런 효능이 있을 줄은…….”

놀라워하는 하데스를 보며 내가 물 었다.

“그런데 두 개였어요?”

“어. 원래 2억 5천에 팔 생각이었는 데 두 개 해서 1억 깎아준다고 했었 지. 그럼 그거 하나 남은 건가? 그러 면…….”

“아뇨.”

그랬구나.

문두스에 오기 전 마지막 시련에서, 어떻게 록사가 아자르를 포털 앞으로 보냈는지 의아했는데…….

“표정이 왜 그래?”

“아, 아뇨. 아니예요. 물약 두 개, 다 썼어요. 안 남았어요.”

“그래?”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하데스를 보며 내가 말했다.

“우리 아벨, 되게 멋있게 자랐죠?”

“누구 아들인데.”

“그렇게 자라는 거, 꼭 같이 봐요.”

내 말에 하데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죽으려고 안 할게요. 운명이 허락하는 때까지는 전하랑 아벨 옆에 있을게요. 우리 아들 예쁘게 자랄 때까 지, 같이 살아요.”

“…….”

“전하가 실패한다고 해도 전하를 원망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 까…….”

내가 조심스럽게 일어나 하데스를 끌어안자, 조금 망설이는 듯하던 그 도 나를 마주 안았다.

“……죽을 각오는 버려두세요. 힘에 부치면, 한계가 느껴지면, 그냥 미 련 없이 돌아서는 거예요.”

“…….”

“그래도 괜찮아요. 아버지는 위선 적인 신이라서, 너그러운 척 우리를 무사히 돌려보내줄 거예요.”

알았죠, 덧붙이는 내 말에 하데스는 한참 답이 없었다.

나는 그와 눈을 맞추고 애원하듯 다시 한번 속삭였다.

“저는 꼭 이번 생에서, 전하랑 행복 하게 살고 싶어요.”

한참 내 눈을 들여다보던 하데스는, 이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꼭이에요.”

“그래. 그렇게 할게.”

언제나처럼 알아보기 쉬운 거짓말이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이 자존심 강한 남자가 내 뜻대로 움직일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그래서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의 목숨을 구걸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었으니까.

***

「삭월에 환생문이 열린다는 건 정 확히 언제예요? 같이 가요. 같이 가 서 같이 싸워. 전하 혼자 가는 것보다는 훨씬 든든할 거예요.」

「진짜 못 만났으면 어쩔 뻔했어. 앞으로는 이렇게 말도 없이 훌쩍 떠 나기 없어요. 그럼 나 진짜 바람날 거 야.」

삭월을 기다리며 한참 종알거리던 아이샤는, 하데스의 예상대로 까무룩 졸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잠들기 전에 환생문이 열렸다면 낭패였을 터였다. 하데스는 겨우 가슴을 쓸어 내 렸다.

아이샤에게는 미안한 말이었지만, 목숨을 담보로 뛰어들어야 하는 가이오니아의 앞에 함께 갈 생각은 없었다.

아이샤뿐 아니라 무작정 오르쿠스 로 따라 들어온, 모두다.

‘조금만 기다려.’

달도 없는 삭월의 밤하늘이 눈부시 게 밝은 이유는, 비로소 환생문이 생 겨났기 때문일 것이다.

‘저기에 있는 게 무엇이든, 그대를 위해서 전부.’

허공에 떠오른 푸른빛의 거대한 균 열.

창 너머의 그것을 가만히 응시하던하데스가, 누워있는 아이샤의 이마 위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없애버리고, 무사히 살아서 돌아올 테니까.’

다정하던 눈빛이 일순 어스름한 어 둠 속에서 날카롭게 빛났다.

***

세 개의 달이 어둠에 먹히고, 칠흑같았던 밤하늘에 내린 어슴푸레한빛.

달도 없는 문두스를 밝힌, ‘죽은 땅’의 허공에 떠오른 환생문 아래에 서 하데스는 천천히 숨을 삼켰다 뱉 었다.

환생이 허락된 영혼에게만 보인다 던 환생문의 계단.

허공이 일그러진 것처럼 불투명하 게 생겨난 그것은, 하데스의 눈앞에 선명히 보였다.

그는 환생문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산 자였는데도 불구하고.

‘팔자 좋게 기다리고 있군.’

아마 가이오니아는 여유만만하게하데스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찰그락…….

손에 든 검 끝으로 환생문의 계단을 하나하나 스치듯 세어가며, 그 끝자 락에 도착했을 때.

하데스는 여전히 세상모르고 잠들 어 있을 아이샤 쪽을 돌아보며 작게 웃었다.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올게.”

들리지 않을 약속을 끝으로 환생문 은 하데스를 삼켰다.

첫 포털을 지났을 때, 그리고 문두스에 들어섰을 때와 별다를 것 없는 느낌이었다.

펼쳐진 풍경도 그랬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자라지 않을 듯한 메마른 땅.

딱 하나, 그렇게 간절히 만나기를 고대했던 존재가 눈앞에 있다는 것만 빼고.

“아.”

열 걸음 남짓.

“드디어 찾았군.”

무표정으로 선 금발의 사내를 마주하고, 하데스는 방긋 웃었다.

“……쥐새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