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피곤해 죽겠군.’
문두스로 입성한 지 한 달째.
그간 하데스 루버몬트는 이 죽은 자 들의 세계에서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
매달의 첫날, 하늘에 뜬 세 개의 달 이 자취를 감추는 날이면 문두스의 허공에는 ‘환생문’이라는 것이 열린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무 영혼이나 통 과할 수 있는 문은 아니었다.
가이오니아가 죄를 사하여주기로 결정한 ‘선한’ 영혼들만이 환생문을 통해 올라갈 수 있다는데…….
산 자인 하데스는 환생문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그에게는 계획이…….
아니, 계획이 없는 게 계획이었다.
그는 그냥 그곳이 열릴 때를 틈타 억지로 뛰어들 생각이다.
이 여관방 3층을 싹 빌려 머물면서 ‘삭월’의 밤을 기다리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매달 열리는 환생문의 포털이 바로 이 여관 건물 뒤편…….
그러니까 ‘죽은 땅’이라 불리는 공터의 하늘에 생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삭월을 하루 앞둔 날.
매일 그랬듯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요상한 ‘죽은 땅’에서 수련을 마치 고 돌아온 길.
문두스에 입성하자마자 꽤나 얼굴이 팔린 하데스였다.
괜히 시비 걸리지 않기 위해 큼직한 로브를 뒤집어쓰고 다니는 건 어느새 일상이 되어 있었다.
하나 적어도 이 여관에서만은, ‘살 아있는’ 채로 문두스를 습격한 검은 로브의 사내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여관에 들어오자마자 주인이 하데스를 알아보고 말했다.
“식사하실 거죠?”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3층으로 올 라가려던 하데스의 걸음이 우뚝 멈추 었다.
카운터에 붙은 테이블에 앉아, 들어온 하데스를 무심코 힐끔거 리는 여자의 얼굴 때문이었다.
‘뭐, 뭐지…….’
하마터면 놀라서 경박하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대체…….
그녀가 왜 여기에?
너무 놀란 나머지, 바짝 굳은 몸이 움직이지도 않았다.
로브 아래로 감춰진 눈을 몇 번이고 다시 부릅뜨고 봤지만, 분명히 그녀였다.
아이샤여관에서 일하는 아이들이나 입는 낡은 옷차림이 었지만, 얼굴이나 그녀 특유의 표정만은 여전했다.
약간은 창백한 피부도, 물빛 머리칼 도, 그리고…….
그 언젠가 자신이 반했던 기억이 있는, 바다처럼 일렁이는 푸른 눈동자까지.
아이샤는 꼭, 사랑스러운 그 눈으로 지금…….
“데이먼 씨는 오늘 저녁에 뭐 해 요?”
……외간남자에게 열심히 추파를 던지는 중이었다.
턱에 예쁜 꽃받침까지 괴고, 가느다 랗게 뜬 눈을 나부끼는 꽃잎처럼 감 았다, 떴다 하면서.
아이샤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저건 암만 봐도, 누구라도 반할 수밖에 없는 표정이었다.
‘뭐야, 저놈은?’
아직 뒷모습밖에는 보이지 않지만 남자는 상당히 기골이 장대했다.
단단한 어깨와 곧은 자세. 얼굴이 안 보여도 꽤 매력적인 남성임은 틀림없었다.
“식사는 어떻게 해 드려요? 오늘 아 침처럼 방으로 올려드릴깝쇼?”
어째선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우 두커니 서 있는 하데스를 향해 주인 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 오, 오, 오늘 저녁이요?”
“네. 별일 없으면…….”
처음 들어왔을 때에 한 번 힐끔거렸을 뿐, 아이샤에게 하데스는 안중에 도 없었다.
그녀는 데이먼이라 부른 남자의 어 깨를 은근한 손길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랑 놀래요? 여기선 할 게 없 어. 너무 심심해서요.”
“여보쇼!”
멍하니 아이샤를 지켜보던 하데스의 시야에 주인이 불쑥 끼어들었다.
“식사 어떻게 해드리면 되겠냐니 까?”
“여기서 먹고 올라갈 거니 바로 내 줘.”
하데스는 일부러 다 들리게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인지 그를 등지고 선 데이먼이라는 남자의 몸이 움찔했다.
주인이 주방으로 들어가고, 하데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지만 아이샤는 데이먼에게 추파 던지느라 바 빴다.
일부러 알아들으라고 목소리도 크 게 냈는데, 얼마나 저 남자에게 정신 이 팔려 있으면…….
쿵, 쾅, 쿵, 쾅!
크게 발소리를 내며 하데스가 걸었다. 그리고는 아이샤의 비어있는 옆 자리에 대놓고 몸을 앉혔다.
둘의 대화가 더 잘 들렸다.
“뭐, 뭐 하고 놀 건데요?”
“어머, 알면서.”
“모, 모, 모르겠…….”
왜인지 데이먼이 울먹이는 목소리 로 대답했고, 동시에 그의 시선이 살 짝 고개를 튼 하데스의 날카로운 시 선과 마주쳤다.
로브 아래로 번뜩이는 붉은 눈을 마 주한 데이먼이 흠칫했다.
하데스는 곧바로 다시 고개를 틀고 이를 갈았다.
‘대체 뭐냐고.’
외간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그는 혼 란스러웠다.
‘꽤 생긴 놈이잖아.’
정말이지 아주 잘생긴 얼굴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데스 루버몬트는, 단 한명을 빼고는 ‘잘생겼 다’고 누군가를 인정해본 적 없었다.
물론 그 ‘한 명’은 거울로 본 자기 얼굴이었고 적어도 이제국에서 자신의 미모를 능가할 남자는 없을 거라 확신하며 살아왔다.
한데 본능적으로 자신이 ‘꽤 생겼다’고 인정할 만한 수준의 얼굴이라 니.
게다가…….
‘묘하게 나랑 닮은 것도 같은 게…….’
다시 데이먼의 얼굴을 훔쳐보던 하데스는 이를 갈았다.
설마, 진짜, 한 달 만에…….
‘바람이 났다고?!’
물론 죽을지도 모르는 자리로 직접 걸어 들어가면서 아이샤가 평생 독수 공방하길 바란 건 아니 었다.
당연히 아니길 바라지만 만약 자신 이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면, 아이샤 도 아이샤의 삶이 있으니 다른 남자를 만나 행복할 수도 있고, 재혼을 할 수도 있고…….
광!
상상하니까 화가 나네.
본능적으로 쾅, 테이블을 내려친 하데스에 데이먼이 흠칫했고 아이샤가 슬쩍 그를 돌아보았다.
겨우 관심을 끌었지만 그뿐이었다. 아이샤는 곧 흥미 없는 표정으로 눈을 떼며 다시 종알거렸다.
“사실 제가 헤어진 지 얼마 안 돼서 좀 외로워요.”
‘뭐야? 아니, 누구 맘대로 헤어졌는 데?’
“아……. 여, 연인이 있으셨던 모, 모양입니다.”
‘그래, 여기 있다. 연인이 아니고 남편이다, 이 자식아.’
“네. 있긴 했는데 별로 믿음직스러 운 남자는 아니었죠. 절 버리고 홀라 당 떠났거든요.”
“아니!”
하데스가 움찔하며 소리 질렀고 아이샤가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참자.’
억지로 흥분을 가라앉힌 하데스가 애꿎은 콧김만 씩씩거렸다.
“이런 말, 기분 나쁠 수도 있지 만…… 데이먼 씨는 절 버리고 떠나 간 그 남자랑 너무 닮았어요.”
‘나랑 닮아서 뭐? 닮기만 하면 다 좋다는 거야, 뭐야?’
“그, 그런가요…….”
“식사 나왔습니다.”
와중에 주인이 고기가 산처럼 쌓인접시를 하데스의 앞에 내려놨지만 그는 손댈 생각도 없이 아이샤와 데이먼의 대화에 귀를 세우느라 정신없었다.
“아, 아이샤 양은, 그분을 사, 사랑했던 게 아닌가요?”
“어머, 사랑이요? 제가요? 저한테 말 한 마디 없이 잠수 이별한 남자를 아직까지 사랑하고 있겠어요? 설령 사랑했더라도 진작 잊었겠죠!”
뜨끔한 하데스가 당장이라도 입을 열고 싶은 마음을 부들거 리는 주먹을 꽉 쥐는 걸로 대신했다.
물론 떠나버린 자신을 아이샤가 원 망할 거라고는 예상했지민,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듣고 보니 생각보다 타 격이 컸다.
아니, 그래도 벌써 잊은 건 좀 너무 하지 않은가.
“남자가 눈치가 없네.”
그때 식당 구석에서 식사하고 있던 사내 둘이 껄렁거리는 목소리로 다가왔다.
‘뭐야, 또 저것들은?’
안 그래도 머리끝까지 열이 뻗친 하데스가 신경질적으로 그들을 돌아봤다.
양아치 같은 목소리가 익숙하다 했 더니 아니나 다를까. 처음 여관에 들 어왔을 때 시비가 붙어 한번 혼쭐을 내준 얼굴들이다.
사내 하나가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 며 아이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런 미인이 같이 놀자는 뜻이 뭐 겠어?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다.”
“어이, 요런 얼굴만 번지르르한 숙 맥 말고 우리는 어때? 새벽 내내 심 심할 일은 없을 거야.”
“어머, 왜 이러세요?”
치근덕거 리는 사내놈들을 날려주려 고 하데스가 몸을 틀었지만 안타깝게 도 데이먼이 뺄랐다.
과연 양아치 무리의 말마따나 숙맥 같았던 남자는, 백팔십도 뒤집힌 매 서운 표정으로 사내의 손을 쳐내며 말했다.
“함부로만지지 마세요.”
“뭐야?”
“맞아요, 함부로만지지 마세요. 그리고 전 못생긴 남자 싫어요.”
“뭐, 뭐라고?”
도발하는 아이샤에 두 사내가 눈이 뒤집혀 달려들려 했다.
그러나 패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쾅!
어마어마한 힘으로 테이블을 내려 친 하데스 때문이었다.
뽀각, 하는 소리와 함께 낡은 테이블에 금이 갈 정도였다.
홈칫 놀란 사내들이 거북이처럼 목을 집어넣고 하데스의 눈치를 봤다.
“아……. 저, 저분 언제 오셨대.”
“오, 오늘은 좀 빨리 돌아오셨네.”
한번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던 터라자연스럽게 얌전해진 그들이었다.
무심한 움직임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하데스가 말했다.
“조용히 해라. 거슬리니까.”
“아, 옙!”
“식사하시는데 실례가 많았습니 다!”
우두커니 선 하데스는 자신을 올려 다보고 있는 아이샤의 시선을 느꼈다.
그러나 왜인지, 로브를 벗고 그녀를 마주 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자신감 빼면 시체였던 자신이 왜 이 렇게 약해졌는지 모르겠다.
꽤나 괜찮아 보이는 남자가 아이샤의 옆에 있기 때문인가?
뭐가 됐든, 멀쩡히 거기 앉아 식사할 기분은 아니 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하데스는 몸을 틀어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하데스는 아이샤가 왜 이곳에 있는지에 대한 아주 당연한 고민을 할 겨를이 없었다.
예상치도 못하게 맞닥뜨린 그녀와, 진작 자길 잊었다는 퍽 냉정한 발언까지…….
로브를 벗어두고 침대에 앉은 하데스가 멍한 표정으로 아이샤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땀에 젖어 찝찝한 옷이 느껴졌지만 씻고 싶은 의욕도 사라지고 말았다.
「설령 사랑했더라도 진작 잊었겠 죠!」
진심인가. 그건 진짜 타격이 좀 큰 데.
오르쿠스로 들어와 한 달 가까이 홀 로 지내며, 단 한 순간도 아이샤를 생각하지 않은 적 없었다는 데에 하데스는 제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
고작 한 달.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 건만…….
얼굴을 못 본다는 사실 하나가 얼마 나 괴로웠는지 그 매정한 여자는 이 해나 하려나.
말도 없이 떠나온 제 잘못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똑똑.
멍하니 말라가고 있던 그때, 문가에 서 기척이 났다.
“뭐야?”
“식사를 안 하고 올라가셔서요. 직 접 가져왔어요. 문 좀 열어주세요.”
평소에 심부름하던 여관 아이의 목소리와는 많이 달랐지만, 생애 최고 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충격 받은 상태의 하데스는 눈치채지 못하고 대답했다.
“생각 없다. 가지고 가라.”
“식사를 거르면 안 돼요. 문 좀 열 어주세요.”
“하, 됐다는데도…….”
입맛은 없었지만 아이는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힘없이 몸을 일으킨 하데스가 비척비척 걸어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는, 이윽고 열린 문 앞에 선 얼굴을 보고 그대로 굳었다.
하데스의 접시를 들고 서 있는 건, 아이샤였다.
“전하.”
그녀는 방긋 웃으며, 타박하듯 말했다.
“또 이렇게 도망갈 생각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