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런 거면 대신관님도 충분히 혼자 다니실 수 있 잖아요. 저는 어머니랑…….”
“아니, 아벨.”
나는 고개 저 었다.
“지금 저 양반은 정말 쓸모가 없어. 혹시나 허튼 수작 못 부리게 내가 능력을 막아놨거든.”
“아하!”
미하일이 방긋 웃었다.
“어쩐지. 그런 앙큼한 짓을 하셨군요.”
그는 웃는 얼굴로 부들거 렸다.
“그래도, 어머니……. 아까 대신관 님이 말해주셨는데, 오르쿠스 출신인 문두스의 인간들은 살아생전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영혼들이라고 했어요. 질이 나쁘대요. 그런 사람들이 이렇 게 많은데…….”
“나도 알아. 그렇지만, 아벨. 우린 정말 한시가 급해. 그 환생문이라는 게 열렸을 때 전하 혼자 가 버리면 어떻게 해. 최대한 빨리 전하의 흔적 도 찾고, 환생문으로 갈 방법도 찾아 야 한단 말이야. 아까 엄마가 창조경 제 하는 거 봤지?”
“아…….”
“해 지기 전까지 돌아오는 걸로 하 자. 다시 여기서 만나. 아자르, 부탁할게요.”
“예.”
아자르에게 눈짓하자 그는 데보라를 번쩍 안아들었고, 미하일은 내게 서 눈을 못 떼는 아벨을 이끌었다.
나를 걱정하는 아벨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지민—, 한시가 바쁜 와중에 다 같이 돌아다니는 건 확실 한 인력낭비였다.
미하일의 말대로, 아이러니하지만 우리들 중 제일 강할 내가 아벨의 보 호를 받는 건 더 우스운 그림이었고.
혹시라도 아벨이 더 붙잡을까 봐, 나는 얼른 그의 손을 한 번 잡아준 뒤 낡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문두스의 인간들 틈으로 섞여들었다.
***
가장 접근하기 쉽고 많은 정보가 공 유되는 장소는, 술 취해 입이 가벼워지는 이들이 모이는 주점이다.
예전에 산트크리아의 보검을 찾기 위해 발품 팔았던 눈물 나는 기억을 되짚으면서, 나는 번화가에서 가장 커 보이는 주점으로 들어섰다.
예상했던 대로 낮부터 거나하게 술 취한 인간들이 삼삼오오 모여 시끄럽 게 조잘거리고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덩치 큰 남자 하나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내게로 다가와 몸을 기울이며 중얼거 렸다.
“음? 이런 곳에 안 어울리게 웬 귀 여운…….”
‘그대로 꺼지세요.’
“헙!”
당연하게도 뻔한 수작질을 하려는 뻔한 종자들이 모여들 테지만 문제될 건 없었다.
수많은 주정뱅이들을 헤치고 바에 앉은 나는 눈치껏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에이, 재수도 더럽게 없지!”
“큭큭……. 몰골이 아주 볼만하구 민. 그렉 자네가 이렇게 얻어터진 건처음 보는데?”
호탕한 웃음소리가 섞인 대화가 드문드문 귀로 넘어왔다.
슬쩍 옆을 보니, 덩치 큰 두 남자가 마주 앉아 있었다.
‘어머.’
하마터면 나는 입 밖으로 놀란 소리를 낼 뻔했다.
그렉이라고 불린 커다란 덩치의 사내는, 누구에게 얻어맞았는지 얼굴이 거의 피떡이었다.
입가에는 여전히 채 마르지도 않은 피가 고여 있었고, 양쪽 눈두덩이는 잔뜩 부풀어 있는 데다가 겨우 뜬 실 눈은 실핏줄이 터져 빨갰다.
과연 생전에 못된 짓들만 하던 영혼 들이 모인 곳다웠다.
그래도 나름 갱생하는 척이라도 한 놈들이 문두스로 들어왔을 텐데, 대 낮부터 저렇게 쌈박질이나 하고 돌아다니다니.
쯧쯧.
그렉이라는 남자는 얻어맞은 분노로 부들부들 떨더니 앞에 있던 맥주잔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디 불에라도 그을린 듯 볼품없이 끝이 오그라든 수염 위로 미처 넘기 지 못한 맥주가 묻어 흘렀다.
“살아서 지옥에 들어온 인간을 어 떻게 이겨? 보통내기가 아니니 산 채로 여기까지 왔을 텐데. 내가 약해서 가 아니라고.”
“큭큭……. 변명은.”
“아니라니까?!”
둘에게서 시선을 떼고 가만히 귀만 열고 있던 나는, 알 듯 말 듯한 대화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킨 내게 로 두 남자의 시선이 모였다.
“……뭐야?”
나는 바를 빙 돌아, 그렉이라는 남자의 옆에 몸을 다급히 앉혔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로브를 살짝 벗 어 내리자 드러난 의외의 얼굴에 그렉은 놀란 눈을 했다.
대낮에 주정뱅이들 모인 곳에 여자 가 온 게 의아한 모양이었다.
“뭐요?”
“살아서 지옥에 들어온 인간이라니 요? 좀 더 자세히 알려줄 수 있나요?
이렇게 얻어터진 건 왜 그렇고요?”
“어, 얻어터져? 이봐, 당신 뭐야?”
‘묻는 말에 대답하자.’
세뇌에 그렉은 약 1초 정도 바짝 굳 어 멍한 표정을 짓다가, 곧 입을 열었다.
“한 달쯤 전에 문두스로 들어온 인 간이 있소. 진짜 미친놈이지. 다짜고 짜 거리 한복판에서 소리를 지르는 거야.”
“진짜 웃겼지. 주목~!”
그렉의 옆에 앉아있던 남자는, 세뇌를 건 것도 아닌데 신나서 끼어들어말했다.
“어, 맞아. 주목~! 이러면서 아주 지랄을 하더니, 대뜸 도마뱀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놈에게 사례를 하겠 다는 거야.”
“사례요?”
“여기서 사례랄 게 뭐 있나. 돈 좀 있는 놈인가 했더니, 그냥 미친놈이 었어. 남자는 자기 가문에 기사로 고 용시켜주고 여자는 주방 사용인으로 써주겠다고 하더군.”
“또라이였지, 또라이.”
“아하…….”
“아무튼 그 발언부터 뭔가 이상했 어. 말도 안 되잖아. 그리고 대체 도 마뱀이 뭔가 했더니, 글쎄…….”
그렉은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는지 몸을 부르르 떨 었다.
옆에 있던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뒷말을 받았다.
“대체 문두스에서 가이오니야 님을 그딴 식으로 부르는 인간이 어디 있 어?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니까.”
“그러게요. 간을 배 밖으로 빼놓고 다니는 사람이네. 그래서 그 다음은 요?”
“미친놈이라 다들 상종도 안 했지. 그 뒤로 뭐, 자기 혼자 돌아다니면서 환생문에 대해 알아보고 다니는 것 같더군.”
“그런데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게, 티가 나는 거예요?”
“뭐? 당신 뭐 어디 별나라에서 왔 어?”
그렉이 순간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니, 뭐……. 온 지 얼마 안 돼 서.”
대충 얼버무리자 그렉이 쯧, 혀를 차며 덧붙였다.
“어떻게 알아봤겠어. 여전히 가이오니야 님의 이능을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이었으니까 그렇지. 옛날부터 목 숨 아까운 줄 모르고 산 채로 여기 기어들어오는 미친놈들이 몇 있었 지.”
“이번에 들어온 놈은 개중에서도 아주 길이길이 남을 미친놈이고.”
“맞아. 여기 내 수염 좀 보라고. 그 미친놈이 이렇게 해 놨다니까!”
그렉이 끝이 그을린 수염을 내보이 며 울분에 차 소리쳤다.
아…….
좀 알겠다. 그러니까 문두스의 인간 들은, 생전과 달리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함부로 능력을 쓰지 않는 편 이 눈에 덜 띄겠네. 나야 상관없지만 아벨이랑 아자르는 좀 걱정스러운 데.’
혹시나 생각 없이 능력을 사용했다 가 예기치 못한 소란을 피울 수도 있 으니까.
당황하던 나는, 얼른 자리를 정리해 야겠다 싶어 마지막 질문을 했다.
사실 환생문에 대한 정보도 좀 얻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그 미친놈 말인데요, 아직 환생문으로 넘어간 건…… 아니죠?”
“뭔 소리야. 내일 밤이 ‘삭월’인데. 그 미친놈, 삭월만 기다리면서 한 달 내내 행패란 행패는 다 부리고 다녔 다고! 이제 내일이면 뒈지러 갈 테니 그 꼴 볼 일 없어 다행이구만!”
환생문. 삭월. 한 달.
환생문은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모양이었고, 그 시기는 달의 첫날인 삭 월의 밤.
마치 나를 위해 이곳에 준비되어 있 던 정보통이기라도 한 것처럼, 듣고 싶은 말만 딱딱 골라 뱉어주는 그렉 에게 속으로 감사했다.
필요한 정보를 재빨리 귀에 주워 담 은 나는 다급히 그렉을 재촉했다.
“아직 여기 있는 거죠? 혹시 그 미 친놈, 어디 있는지는 알아요?”
“아니, 그 미친놈을 왜 찾아? 댁도 뭐 당한 거 있소?”
“그런 건 아니고요. 어디 있는지 알 면 좀 말해줘요.”
그렉은 의심스러운 눈을 하면서도 세뇌된 상태라 별수 없이 입을 열었다.
“헌데 진짜 별나라에서 왔나? 아무 리 온 지 얼마 안 됐다고 해도 어떻 게 그 미친놈을 몰라? 지금 그 미친 놈 때문에 문두스가 아주 공포 분위 기인데 말이야. 다들 ‘죠’의 여관 앞 지나갈 때면 목을 쑥 집어넣고 다니 지.”
그 미친놈께서도 여관방 하나를 잡 아 삭월이 오기까지 묵고 계신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또 물었다.
“죠의 여관에 묵고 있나 보군요. 실 례지만 거기가 어딘지…….”
죠의 여관도 문두스에서는 꽤나 유 명한 곳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나를 쳐다보는 그렉의 의심스러운 눈 초리가 심해졌다.
다행히 입을 열려는 그렉의 옆에서 거나하게 취한 남자가 신나는 목소리 로 끼어들었다.
“신입한테 왜 그렇게 눈치를 줘. 모를 수도 있지. 여기 주점 거리 따라 쭈—욱 올라가면 빨간 벽돌집 여관있어!”
“……네?”
나는 약간 당황했다.
남자는 제법 상냥한 말투로 굳이 쓸 데없는 내 걱정까지 덧붙여주었다.
“뭐, 친구가 그 미친놈한테 당하기 라도 한 모양이지? 그래도 괜히 가서 덤 볐다가 통구이 되지 말고, 그냥 하 루만 참아. 어차피 내일이면 제 발로 자기 무덤 찾아갈 놈인걸.”
오, 맙소사.
남자의 걱정은 귀로 잘 들어오지 않 았고, 대신 놀란 내 입은 절로 떡 벌어졌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그 ‘미친놈’께서 지내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우리가 묵고 있는 여관이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