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2층으로 올라온 주인의 태도는 싹 바뀌어 있었다. 그는 내 앞에서 굽실거리며 말했다.
“한데 죄송해서 어쩔까? 지금 3층방을 싹 빌린 미친 손님이 있어가지 고 2층밖에 방이 없는데, 남아 있는 좋은 방이 두 개뿐이라. 나머지 하나는 창고로 쓰는 거고.”
“그 비싼 보석 반지를 냈는데 방이 두 개?”
“아, 그래도 꽤 큰 방이고 침대도 두 개씩 들어가 있어서…….”
나는 욱하며 끼어든 아자르를 말렸다.
어쩔 수 없이 주인을 세뇌하긴 했지만, 나쁜 짓을 해놓고 갑질까지 하기 엔 양심이 아팠다.
“네, 괜찮아요. 목욕물부터 올려주 세요.”
“예, 그렇게 합죠. 시중들 계집아이 들 좀 올려드릴까?”
“아뇨, 됐어요.”
“예, 그러면 조금만 기다리십쇼.”
주인이 헐레벌떡 내려가고 우리는 2충 복도에 남았다.
그가 내준 방은 나란히 두 개가 붙 어 있었고, 말했던 대로 충분히 넓었다.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데 뒤에서 아벨이 신음했다.
“윽!”
돌아보니 아자르에게 뒷덜미가 잡 혀 있었다.
“왜 그래요?”
의아한 내가 묻자 아자르가 방긋 웃 었다.
“공자님은 저랑 대신관이랑 같이 주무셔야죠. 이렇게 장성하신 모습으 로 어딜 들어가시 려고.”
“어어?!”
미하일과 아자르를 바라보며 아벨 이 질겁했다.
불쌍한 우리 아들. 나는 아자르의 손을 떼고 아벨을 당겼다.
“침대가 두 개인데 남자 셋이 한 방에 어떻게 들어가요. 내가 데보라 사제랑 한 침대 쓰고, 나머지 하나는 아벨이 쓰면 되죠. 이따 식사 오면 봐요.”
아자르가 뭐라 더 말하기 전에 면전에서 쾅 문을 닫자 아벨이 가슴을 쓸 어내렸다.
나와 떨어져 시커먼 남자 둘과 남는 게 적잖이 걱정스러웠던 모양.
몸은 다 컸는데 여전히 어린아이 같 은 표정과 행동에 내가 웃었다.
“큰일 날 뻔했네.”
아벨이 한숨 쉬며 나를 덥석 끌어안 았다.
“으음…….”
아벨은 여전히 아벨이었지만 확실 히…… 다 자라버린 그의 모습은 내게 조금 부담스러웠다.
다른 게 아니라, 하데스와 똑같이 생긴 얼굴 때문에.
등을 토닥이며 한숨 쉬는 내게서 아벨이 후다닥 떨어져나갔다.
“아, 죄송해요.”
그는 곧바로 사과한 다음 우물쭈물 하며 내 눈치를 봤다.
“그리고…… 아까, 거기에서도.”
“아…….”
억지로 나를 들쳐 업고 시련을 빠져나가려 했던 행동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막 포털을 넘어오고 나서는 미하일도 밉고, 아벨도 이해가 안 됐다.
아무리 아자르가 대신 남겠다고 했 다 한들, 아벨이 쉽게 고개를 끄덕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렇지만 어쩌겠어. 다 예정되어있 던 일이었을 텐데.’
록사가 없던 미래를 이미 보지 않았 는가.
예정된 일이었을 테다.
아직 어려 혼자 무언가를 판단하기 가 어 려운 아벨이 미하일과 아자르의 말에 휩쓸린 것도.
결국은, 전혀 대신 희생할 이미지는 아니었던 록사가 아자르 대신 희생의 제단에 남은 것도.
“아니야. 괜찮아.”
힘없이 대답하는 나를 보며 아벨은 어쩔줄 몰라 했다.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입술을 삐죽 이는 모습에 내가 애써 밝게 웃으며 그를 안았다.
“진짜 괜찮아. 그리고 아까 대신관 이 하는 말 들었잖아. 우린 죽은 채로 오르쿠스로 온 게 아니니 록사 씨의 육체는 저곳에서 무사해. 모든 일이 잘 해결되면…….”
“…….”
“……그러면 돼. 그냥 악몽을 꾼 것처럼, 아무 일도 없던 게 될 거야.”
나는 천천히 아벨의 등을 쓰다듬으 며 위로했다.
“정말 그럴까요?”
“그러엄.”
“어머니…….”
아벨이 내 품으로 더 파고들며 울먹였다.
커진 덩치가 버거워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토닥이자, 아벨이 또 놀라몸을 떼어냈다.
“죄, 죄송해요. 제가 너무 커져가지 고…….”
“아냐, 아냐. 싫은 거 아냐. 그냥, 전하가 생각나서 그래. 아벨 넌 지금 네가 어떤 모습인지 모르지?”
방 안에는 낡은 전신 거울 하나가 있었다.
내가 그것을 가리키자 아벨이 멈칫하더니 후다닥 그 앞으로 달려갔다.
“헉…….”
아벨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얼굴을 붙잡으며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처음 그를 봤을 때 모두가 놀란 데 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정말이지 성인이 된 아벨은 하데스 판박이였다. 굳이 다른 부분을 꼽아 보라면 살짝 덜 올라간 눈꼬리 정도.
“진짜 자라면 이렇게 멋있어지나 봐. 내가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야.”
“아……. 괜찮아요?”
아벨이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붉혔다. 내가 쿡쿡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정말 멋져요, 공자님. 공작 전하보 다 더요.”
내 옆에 있던 데보라가 수줍게 한마 디 끼어들었다.
“아, 그, 그래요?”
칭찬을 들은 아벨이나 칭찬을 한 데보라나 서로 수줍어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에 나는 왠지 불청객이 된 기 분이었다.
남주와 여주의 분위기 넘치는 애정신에 불순물처럼 끼어있는 조연 1 같 달까. 심지어 포지션도 무려 시어머니라니.
너무 힘든 상황이 반복돼 정신이 홀 라당 나간 건지, 별 이상한 생각을 하 고 있는 와중 여관의 시종이 문을 두 드렸다.
목욕물을 가지고 온 모양이 었다. 문을 열어주니 어린 여자아이가 큼지막 한 나무 욕통을 밀고 들어왔다.
나는 피곤해 보이는 데보라를 안아 들며 말했다.
“졸려도 씻고 나서 잠깐 눈 붙이는 걸로 해요. 내가 씻겨줄게요. 싫지 않 죠?”
“우웅……. 네에.”
데보라가 배시시 웃으며 내게 안겼다.
방에 있던 허름한 여벌 옷을 챙기며 나는 아벨을 돌아보았다.
그는 조금 난처한 얼굴로, 욕탕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음……. 우리 아들도 씻겨줄까?”
“네?”
화들짝 놀란 아벨이 얼굴을 붉히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문가로 뒷걸음질 쳤다.
“어, 저는, 저…… 생각해보니까 옆 방에서 같이 씻는 게 좋겠어요. 이따 가 식사할 때 봬요, 어머니!”
그 말을 남기고 아벨은 바람같이 방을 빠져나갔다.
나와 데보라는 쾅 닫힌 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서로 마주 웃었다.
***
헐레벌떡 나온 아벨이 주먹을 들어 제 이마를 살짝 쥐어박았다.
암만 생각해도 바보 같은 모습이었을 게 틀림없다.
아자르나 미하일과 함께 씻는 건 내 키지 않았지만 별수가 있나. 옆방으 로 건너가려던 때였다.
“흐어어억……!”
“아이고, 형님! 나가시는 길이십니 까!”
2층 복도에서 아벨을 맞닥뜨린 낯 선 얼굴의 남자 둘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움츠러뜨렸다.
“……형님? 저요?”
복도에는 두 남자와 아벨 말고는 없 었다.
아벨이 의아한 표정으로 제 얼굴을 가리키며 물었지만, 두 남자는 잔뜩 겁에 질린 듯 질끈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지, 지나가보겠습니다!”
“오늘도 수고하십쇼!”
“아, 저, 잠깐!”
행여나 아벨의 어깨를 치기라도 할 까 벽에 바짝 붙어 게걸음 하던 두 남자는 꽁지가 빠져 라 후다닥 자기들 방으로 사라졌다.
‘누구랑 착각했나……?’
아벨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남자가 사라진 방문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
식사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한 우리는 곧바로 여관을 나왔다.
엄연히 ‘산 자’인 우리들은 오르쿠스와 문두스에 관한 지식이 전무했기에, 정보를 수집할 필요가 있었다.
정확히는 가이오니아를 만날 수 있는 ‘환생문’이 어디서, 어떻게 열리는 지 말이다.
“한시가 급해요. 셋으로 갈라져서 따로따로 알아보는 게 좋겠어요.”
여관 앞에서 내가 말했고, 아벨은 당연하다는 듯 내 옆에 섰다.
나는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다가 말 했다.
“혼자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사람들끼리는 같이 붙으면 안 돼. 인력 낭비야.”
“네, 그렇죠. 저랑 어머니가 같이 다니고, 대신관님이랑 사제님이랑 그리고 아자르는…….”
“아니, 아벨.”
나는 아벨을 미하일 쪽으로 쭉 밀며 말했다.
“네가 지켜줘야 할 건 지금 우리 중에 제일 약한 대신관. 나는 혼자 갈 거야.”
내 말에 아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지만 당당하게 여자 혼자 몸으 로 돌아다니겠다는 발언에, 이해 안 된다는 표정을 짓는 건 아벨뿐이었다.
미하일도, 아자르도 내 결정을 십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넌 혼자 다닐 만큼 강하지만 어리 니까 뭘 모를 거야. 대신관님을 따라다니면서 지켜주도록 해.”
“아니, 대체…….”
아벨이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미간을 좁혔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데보라 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그리고 사제님은 아자르랑 같이 다니는 게 좋겠어요. 대신관님이 더 편하겠지만, 아벨이 둘 다 신경 쓰려 면 힘들 테니까.”
“어머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아벨이 계속 황당해하자 미하일이 웃으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문두스에 서는, 사실 씁쓸한 말이지만 부인이 공자님보다 더 강할 겁니다.”
미하일이 번화가를 나다니는 수많 은 인간들을 쓱 훑어 가리켰다.
“저 많은 인간들이 한순간에 부인의 호위를 자처하고 나설 수도 있지요. 감히 부인을 건드리려고 했다간 뼈도 못 추릴 테니 걱정 마세요.”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알아들은 듯했지만, 나를 혼자 보내는 게 내키지 않은지 뚱한 표정을 한 아벨에게 미하일이 웃으며 말했다.
“부인이나 제가 가지고 있는 ‘암속성’의 능력은, 뭐, 대충 그런 거니까요.”
굳이 내 입을 열어서는 하고 싶지 않은 얘기였지만, 다행히도 미하일이 대신해주었다.
아벨이 불퉁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