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아비규환이 벌어졌을 걸로 예상되는 포털 너머와는 달리, 아이샤 일행 이 옮겨온 곳은 평범한 숲속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낮의 하늘에는 태양이 떠 있었다.
오르쿠스일 텐데도, 누군가 알려주 지 않는다면 오르쿠스인지 인지할 수도 없을 정도로 한가로운 풍경이었다.
그들의 비극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보였다.
“대체…….”
무너져 앉은 아자르가 공허한 눈으 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만큼이나 정신이 나가버린 모양인지, 멍하니 주저앉은 아이샤.
참담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선 아벨과…….
무심한 눈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미하일.
눈이 뒤집힌 아자르가 벌떡 일어나 미하일의 멱살을 잡았다.
“이 사기꾼 새끼야!”
미하일이 인상을 찌푸리며 제 멱살을 쥔 아자르의 손을 붙잡았다.
“저도 예상 못 했습니다.”
“시발! 그게 말이야! 말렸어야지! 말렸어야지!”
핏발 선 아자르의 눈에 떨어질 듯 말 듯 눈물이 고여 있었다.
미하일이 피곤한 표정으로 그의 주 먹을 밀어냈다.
“제가 신입니까? 당신에게 작별인 사를 하고 오겠다기에 그러라고 했을 뿐입니다. 저도 놀랍군요. 대신 죽으 러 갈 사람으로는 안 보였는데 말입 니다.”
“이런 씨!!!”
“흐억…….”
“어머니!”
순간 미하일의 놀란 눈이 아자르의 등 뒤를 향했다.
멍한 얼굴로 바닥에 널브러져있던 아이샤가 눈물과 함께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괜찮, 괜찮으세요?”
“왜 이러는 거야?”
연신 바닥을 향해 맑은 침을 토해내 던 아이샤가 아벨과 미하일의 팔을 뿌리쳤다.
“으으…….”
눈물로 얼룩진 바닥에 이마를 붙이 고 연신 오열하는 모습을, 아자르가 멍하니 응시했다.
단 한명도 희생시키길 원하지 않았 던 그녀다.
아마 지금 아자르, 그가 느끼고 있는 종류의 분노와 배신감을 고스란히느끼고 있을 터다.
이가 악물렸다. 꽉 쥔 주먹 안으로 손톱이 파고들었지만 아픈 것을 느낄 새도 없었다.
“대신관.”
아자르가 나지막이 미하일을 불렀다.
“이 지옥을 만든 놈.”
“…….”
“가이오니아를 죽이면 다 되돌릴 수 있다고 했지.”
“아마도요.”
피곤한 표정으로 일어난 미하일에게로, 아자르가 다시 달려들었다.
무서운 표정으로 대뜸 그의 멱살을 쥔 아자르가 입술을 씹으며 말했다.
“애매하게 나불거리지 말고 제대로 말해. 그 새끼만 죽이면 되는 거지.”
“모든 영혼은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겁니다. 그건 확실히 말해두죠.”
“…….”
잠시 침묵하던 아자르가, 성큼 다가 가 주저앉은 아이샤의 팔을 잡고 일 으켰다.
힘없는 종이 인형처럼 아자르의 팔에 딸려 올라온 아이샤의 눈은 텅 비 어있었다.
“정신 차리십쇼. 우리 모두 살아야 됩니다. 아무 죄도 없이 끌려 들어온, 불쌍한 그 새끼를 위해서 라도.”
“…….”
“부인이랑, 대신관 대신 죽은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든 갚으십쇼. 어 떻 게든.”
가만히 아자르의 눈을 마주하던 아이샤의 입술이 모로 다물려 흔들렸다.
곧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렇게 할게요. 내가, 내가 할 수 있어요.”
“다시 갑시다. 앞장서쇼.”
아이샤를 일으켜 세워준 뒤, 아자르 가 미하일을 향해 말했다.
희망이라곤 하나 없는 얼굴들이었 지만 그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절 망 속에서도 멈춰있을 겨를이 없었으 니까.
***
포털이 닫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회수된 마력을 느꼈다.
록사에게 걸어줬던 지속형의 무효 화.
그만큼의 마력이 되돌아왔다는 건, 곧 그의 죽음을 의미했다.
‘결국은…….’
록사가 없었던 미래가 똑같이 펼쳐 질 것이다.
혹시 나, 하는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아마도 우리는 가이오니아를 만나 게 될 것이다. 하데스는 그를 죽이려다가 실패한 뒤, 죽고 말 테고.
어쩌면 아자르의 말대로, 애꿎은 죽 음을 당한 록사에게 빚을 갚고 모두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내게 있을지 모른다.
가이오니아를 죽일 수 없다면 무릎 꿇고 빌기라도 해야 하니까.
“‘문두스’군요.”
한참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던 미하일이 중얼거 렸다.
아자르가 날카로운 표정으로 그를 돌아봤다.
“……문두스?”
“성서에 나오는 오르쿠스 안의 세계입니다. 죄를 뉘우치고 비로소 환 생을 약속받은 인간들의 영혼이 모여 사는 곳이라고 하지요.”
그의 말에 나는 북적이는 주변을 멍 하니 둘러보았다.
진짜 지옥이나 다름없던 이전의 관 문과 달리, 이곳은 원래 세계인지 오르쿠스인지 헷갈릴 정도로 평범하고 평화로웠다.
막 포털이 열렸던 곳은 인적이 드문 숲 안이 었으나, 조금 몸을 옮겨 나오 자 금세 제도만큼 북적이는 번화가가 나왔다.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이게 오르쿠스라니.
게다가…….
“마력 사용에도 제한이 없어. ‘시 련’ 속은 아니야.”
“네. 아마 더 이상 관문은 없을 겁 니다. 환생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영 혼들이 모인 이 문두스가, 가이오니아와 가장 가까운 곳이 라고들 하니까요.”
이런 곳도 있었구나.
죽고 나면 곧바로 다른 몸에서 눈을 뜬다. 계속해서 쉬지 않고 환생을 거 듭하느라 지옥 문턱은 밟아본 적도 없는 내게는 생소했다.
“저도 성서에 적힌 내용 말고는 아는 게 없지만, 그에 따르면 불규칙적으로 ‘환생문’이 열린다고 하지요. 그 때 가이오니아가 선택받은 자들을 불 러 죄를 묻고 환생을 허락한다고 합 니다.”
지나칠 정도로 평화로운 문두스의 하늘을 노려보며 미하일이 중얼거렸다.
그때 여전히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아자르가 말했다.
“서두르자고. 가이오니아인지 뭔지 그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만 소멸시키면 되는 거니까.”
“맞는 말이긴 합니다만 여기서는 입을 좀 조심하는 게 좋겠군요. 전부 환생하기 위해 가이오니아에게 복종하는 영혼들이 모여 있으니, 그런 불 경한 말을 했다가는 맞아 죽을지도 몰라요.”
미하일이 방긋 웃었다.
과연, 지나가던 깡마른 중년 남성 하나가 험악한 표정의 아자르를 이상한 얼굴로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환생문이 열릴 때까지는 숨을 돌 릴 수 있을 겁니다. 일단은 우리 모두 좀…… 씻고 쉬어야겠군요.”
어디 한 군데 성한 곳이 없는 꾀죄 죄한 차림의 일행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던 미하일이 말했다.
***
번화가 깊숙이 들어선 우리는 오랜 만에 마음을 풀어놓을 수 있었다.
문두스는 산 자들의 세계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굳이 환생을 바라 지 않고 이곳에 쭉 머무는 영혼들도 꽤 되어 보일 정도였으니.
몸을 좀 추슬러야겠다는 미하일의 말에 동의한 우리는 꽤 괜찮아 보이는 여관 하나를 찾았지만, 곧 현실적 인 문제에 부딪히고 말았다.
바로, 돈.
뭐,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가 지옥이든 어디든, 결 국 평범한 인간의 영혼들이 모여 사는 세계 니까.
돈 한 푼 없는 우리들이 여관방을 잡을 수 없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좀 안 되겠소?”
겁이라도 주려는지 아자르가 최대 한 험악한 표정으로 여관 주인에게 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주인은 아자르만큼이나 무시무시한 덩치를 자랑하는 사내였다.
턱 위로 북슬북슬하게 자란 수염이 나 산만 하게 튀어나온 배는 솔직히 아자르보다도 더 위협적으로 보였다.
주인이 쯧, 혀를 차며 말했다.
“웬 거지들이…….”
“아니, 일이라도 도와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빡빡하게 구는 거요? 뭐힘쓰는 일 없소? 밥값은 제대로 할 수 있으니까…….”
“부탁드릴게요.”
그때까지만 해도 뒤에서 고개를 숙인 채 거의 숨어있다시피 하던 아벨 이, 아자르를 말리고 불쑥 끼어들었다.
“깜짝아! 시벌!”
“어머니가 너무 지쳐서 쉴 곳이 꼭필요해요. 돈 되는 일이라도 시켜주 시면 할게요.”
아니, 나보다도 장성한 모습으로 나를 어머니라고 하면 어떻게 해.
주인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츠러 뜨렸다가, 곧 가늘게 실눈을 뜨고 아벨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 아니구나. 어휴…….”
뭐가 아니라는 건지.
가슴을 쓸어내린 주인은 곧 아벨을 미친놈 보듯 했다.
그건 미하일과 아자르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물끄러미 아벨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 었다.
“은혜를 베푸시면 꼭 큰 보답으로 돌아올 겁니다. 몸이 많이 약한 여성 분과 어린아이가 있어요. 잠시 몸을 누일 곳을 빌려주시면 은혜는 어떻게 든 갚겠습니다.”
이번에는 미하일이 성스러운 대신관 행세로 환심을 사려 했지만, 역시 나 주인은 단호했다.
“대체 무슨 배짱으로 공짜로 묵겠 다는 거야? 돈이 없으면 돈 되는 거 라도 내!”
“보시다시피 우리가…….”
웃던 미하일의 고개가, 어 디론가 향 한 주인의 시선을 따라 돌아왔다.
얄밉게 한쪽 눈썹을 쓱 치켜세운 주인의 시선이 내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낀 반지 위로 닿아있었다.
하데스가 남겨두고 간 마지막 흔적이었다.
“아, 이거.”
나는 생긋 웃고는 반지를 빼냈다.
“어, 어머니. 그거…….”
당황한 아벨이 말리려 했지만, 나는 지친 표정으로 그를 막았다.
그리고는 좋다고 히죽 웃으며 반지를 받아들려는 주인에게 그것을 내밀 며 말했다.
“최고로 좋은 방 주세요. 그리고 고 기 잔뜩 들어간, 여기서 제일 좋은 음 식 내어주시고요. 먼저 씻을 테니까 따뜻한 물도 올려주세요. 담보가 아니고 그냥 드리는 거니 나머지는 돈으로 거슬러 주시고요.”
‘그리고 반지는 받았다고 영원히 착 각하세요.’
덧붙인 세뇌에, 신나게 반지를 향해 뻗었던 주인의 손이 쑥 내려갔다.
나는 냉큼 반지를 도로 품 안에 넣 었고, 주인은 카운터 아래로 몸을 숙 여 거스름돈을 챙기기 위해 덜그럭거 렸다.
곧 묵직한 가죽 꾸러미를 꺼내 내게 준 주인이 활짝 웃는 얼굴로 우리를 이끌었다.
“따라오슈!”
나는 피곤한 표정으로 데보라의 손을 잡고 아벨에게 팔짱을 꼈다.
둘이 당황하며 나를 따랐다.
“가자.”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미하일과 아자르도 우리의 뒤를 따랐다.
둘은 힘없이 웃으며, 딱 내게 들릴 정도로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안 봤는데 날강도시 네.”
“그런 나쁜 말보다는, 창조경제라 고 해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