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미쳐 돌아서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못 들은 걸로 하세요.”
나는 단호하게 말하고 미하일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때 열심히 포털 사이에 보검을 끼 워 넣고 있던 아벨이 말했다.
“저…….”
“어허, 공자님.”
아벨이 뭔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자르가 그를 막아섰다.
아자르가 미하일의 코앞까지 다가와 바짝 얼굴을 들이밀고 말했다.
“말은 번지르르한데 결국은 누가 죽을 거냐고 물어보는 거네?”
“생긴 것과 달리 이해력이 좋으시 군요. 얘기가 빨라 다행입니다.”
“천사 같은 얼굴로 주군의 은혜 어 쩌고 하면? 몸만 컸지 어린애인 우리 공자님 여린 마음이 라도 자극하게?”
“아뇨. 공자님이 남으면 공작부인께서도 남으려 할 테고, 그건 제가 원 하는 게 아니라서요.”
“뭐?”
아자르의 눈썹이 불만을 담고 쓱 치 켜올라갔다.
“기사님은 생각 없으신지요?”
미하일이 방긋 웃었다.
허, 웃음을 터뜨린 아자르가 단박에 표정을 굳히고는 이를 악물었다.
“솔직히 나랑 촉새는, 한명 버리고 가야 한다면 대신관이 가장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아, 그건 힘들겠네요. 저는 가이오니아가 죽는 걸 꼭 봐야 해서.”
“뭐? 하하……. 그딴 이유로? 그 빌어먹을 가이오니아인지 뭔지는 내가 주군을 도와 깔끔히 해치우도록 할 테니…….”
아자르가 웃는 얼굴로 손가락을 들 어 미하일의 어깨를 밀치고는 말했다.
“……여긴 대신관이 남아. 우리 중에 가장, 쓸모없잖아?”
“쓸모없는 걸로 따지면 그쪽이 나…….”
미하일은 한 마디도 안 졌다.
턱 끝으로 아자르를 가리킨 다음, 그는 뒤에 선 록사에게 손가락질했다.
“……저쪽이 더.”
“하아? 무슨 근거로? 치유 능력도 없는 허수아비 신관 주제에 뭐가 잘 났다고…….”
“하하……. 그런 능력이 제게 없는 건 당연하죠. 백속성이 아닌데.”
“뭐?”
“저주니 뭐니 두루뭉술하게만 설명해서 정확히는 모르고 계셨죠? 이번기회에 알려드리지요.”
미하일이 손을 뻗어 아자르를 밀어 냈다.
그는 솜니페르의 숲에서 찢어진 이 후 대충 묶어 놨던 목깃을 주저 없이 풀어 보였다.
곧바로 가슴께의 핵석이 드러났다.
“이게…….”
아자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암속성 능력자라는 사실은 알 고 있었겠지만, 아마 검은색의 핵석을 보는 것은 처음일 테지.
나는 그저 낭패라는 표정으로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암속성의 능력자체가 저주의 일 환입니다. 저는 매 생에서 연인을 죽 여야 하는 저주를 받고 있는 암속성 능력자고, 이번 생에서 제가 죽여야 할 연인의 몸은 이쪽이고요.”
미하일은 웃으며 나를 가리켰고, 아자르는 사색이 된 얼굴로 입술만 달 싹였다.
그뿐 아니라 뒤에서 우리를 지켜보 고 있던 록사도, 아벨도 놀란 얼굴이 었다.
“하나 놀랍게도 이쪽도 마찬가지랍 니다. 부인께서는 매 생에서 자식을 죽여야 하는 저주를 받고 있죠. 이번 생에서 부인이 죽이게 될 자식의 몸은…….”
미하일은 우두커니 서 있던 아벨을 가리켰다.
“……공자님이고요.”
“뭔 쓰레기 같은 저주야?”
“그 말에는 동의합니다. 아무튼 저 주는 저주지만, 맹점이 하나 있죠. 제 가 솜니페르에게 당하고서도 살아있는 이유. 궁금해하지 않으셨습니까.”
미하일은 아자르의 어깨를 다정히 쓰다듬으며 덧붙였다.
“부인께서는 제 손이 아니면 그 누구에게도 죽을 수 없어요. 그건 공자 님도 마찬가지고요. 그렇지만 저는 당장 부인을 죽일 생각이 없고, 부인 도 공자님을 죽일 리 없죠. 다시 말해 가장 무력해 보여도 고기방패로서는 적격이랄까요?”
“그럼…….”
“네, 맞습니다. 시련 안에서 ‘능력’을 전혀 사용할 수 없는 걸 느끼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가장 쓸모가 없는 건 기사님과 마법사님이겠 죠?”
“…….”
“우리야 뭘 만나든 죽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지만, 두 분은 조금 성가시 거든요. 목숨이 보장되어있지 않으니 우리에게는 방해가 될 뿐이라서.”
“하…….”
“그렇게 두려워하실 건 없어요. 우리가 가이오니아를 죽이고 돌아올 때 까지만, 저 제단 위에서 얌전히 기다 리시기만 하면 되는 걸요.”
“얌전히, 뭐? 제단을 건드리면 이것들이 난리 치는 꼴 못 봤어?”
“으음, 아뇨. 제단 위는 안전지대립 니다. 걱정하실 거 없어요.”
흠칫하는 순간, 미하일이 재빨리 팔을 내려 내 손을 꽉 맞잡았다.
‘제단위가 안전지대라니.’
확실하지 않은 말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내게 동조하라는 신호까지 보 내고 있다.
정말 돌아버린 건가.
“아니예요. 확실하지 않아요. 내가 제단 위에 올라갔을 때 나를 먼저 공격하지 않은 건 맞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을 먼저 제거하기 위해서였을 거 예요.”
“부인, 조용히 좀 해주시겠어요?”
미하일이 방긋 웃으며 나를 돌아보 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못 들은 걸로 해요. 조금만 잘 생 각해보면 허무맹랑한 말이에요. 저주에 관한 대신관의 말은 맞지만, 그래 서 더더욱 저나 대신관 중 하나가 남는 게 맞지 않겠어요? 남은 사람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면, 확실히 죽 지 않는 우리가 남는 게 옳으니까.”
“하, 정말…….”
미하일이 표정을 싹 굳히곤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안 돼요!”
그때 아벨이 불쑥 끼어들었다.
“전 무조건 어머니랑 있을 거예요.”
“아벨, 그건…….”
“싫어요! 남으려면 저랑 같이 남으 세요! 제가 지켜드리면 되잖아요! 저 이제 강해졌다고요!”
“안 돼. 네가 강해진 건 알겠는데 이건…….”
나는 수백 마리의 마수들을 돌아보며 고개 저었다.
“전하가 와도 못 당해. 우린 능력도 쓰질 못하잖아.”
“그래도 싫어요. 전 절대 어머니랑 떨어질 생각 없어요.”
“후…….”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미하일이 대 뜸 뒤돌아섰다.
“그래, 그럼. 네 말은 내가 남았으 면 좋겠다는 거지?”
불쑥 말하고는 미하일이 휘적휘적 걸었다. 내가 달려가 그의 팔을 붙잡 았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어린애야? 그럼 어쩌라고? 딱히 방법도 없으면서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할 말이 없었다. 방법이 없는 것도 맞고, 이것도 저것도 싫은 것도 맞으 니까.
미하일에게는 내가 생각 없이 떼쓰는 걸로 보일 테고, 그게 맞을지도 모르지만…….
‘그런데 정말, 어쩌라고? 다 같이 살기 위해 오르쿠스로 들어와 놓고, 누굴 죽이는 선택을 하라니?’
나는 미하일의 팔을 뿌리치고 그보 다 앞서 걸었다.
“다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을 조금 더 생각해볼 거야.”
제멋대로라고 생각하더라도 상관없 었다.
나는 제단을 조금 더 살펴보기 위해 움직였고, 아벨이 뒤를 따랐다.
남겨진 미하일이 신경질적으로 내 뱉는 한숨 소리가 들렸다.
***
한 시간쯤 흘렀을까. 이곳에서는 시 간을 가늠키 어려웠다.
‘암만 좋게 해석하고 싶어도, 남겨 진 사람이 무사할 수는 없어.’
빽빽이 적힌 제단의 고대어를 수십 번 해석하며 내가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피를 흘려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말 도 그렇고, 중간중간 보이는 제물, 공 양이라는 소름 끼치는 단어도 그렇 고.
‘아자르나 록사가 남으면 개죽음이 야. 공격당하더라도 죽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건 나랑 미하일, 아벨뿐이니 까…….’
마음이 점점 한쪽으로 굳었다.
내 무거워진 표정을 본 아벨이 손을 잡아왔다.
“전 어머니랑 떨어질 생각, 없어요. 정확히는 어머니를 여기에 남겨두고 갈 생각 없어요. 이기적인 말일지도 모르지만, 다른 사람은 다 돼도 어머니는 안 돼요.”
“있잖아, 아벨.”
“안 들을 거예요.”
그는 단호하게 말하며 잡은 내 손에 힘을 줬다.
자라 있는 상태라 그런지, 어린 모습이었을 때보다 힘이 갑절은 되는 듯했다.
그때 멀리서 아자르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공자님, 저랑 잠깐 얘기 좀.”
“아자르.”
나는 곧바로 둘의 사이를 막고 섰다.
“대신관이 나 빼놓고 또 무슨 말로 아자르를 구슬렸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동의 못 해요. 아벨에게 따로 할 말이 재수 없는 작별 인사 같은 거면, 지금 내가 듣고 있는 이 자리에서 하 세요.”
“그런 거 아닌데요. 저도 목숨 귀한 줄 아는 놈입죠. 혹시 부인도 은근히 제가 여기 남았으면 하고 바라시는……?”
“설마요. 아무튼 아니면 다행이고, 여기서 얘기해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요. 걱정 마십쇼. 멀리도 안 가고, 여기서 잠깐.”
“금방 다녀올게요.”
아벨이 나를 살짝 밀어두고 아자르를 따랐다.
나는 둘을 잡으려다가 말았다.
뭐, 아자르가 제멋대로 혼자 남겠다 고 하더라도 내가 거절하면 그만이 지.
나는 다시 털썩 주저앉아, 가만히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 었다.
‘하데스는 어 디쯤, 가 있을까.’
내가 봤던 그 미래가 정말로 일어나 긴 할까? 이렇게 당장, 그의 곁으로 가기도 힘든데…….
꽤 오랜 상념이 끝날 때까지도 아벨 과 아자르는 대화 중이었다.
적당히 떨어진 거리에서는 둘의 대 화가 들리지 않았다. 이따금씩 난처 해하는 아벨의 표정만 보일 뿐이었다.
이윽고 대화를 마친 듯, 아벨과 아자르가 내게로 다가왔다.
“대신관이 무슨 황당한 소리를 했 든 간에 나는 싫어요. 엄마 듣기 싫어, 아벨.”
뭔가 말하려는 듯한 아벨의 앞에서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어머니.”
“안 들려.”
내 단호한 태도에 아벨과 아자르는 서로 시선을 나누었다.
무슨…….
왜인지 불길한 예감이 든 그 순간이 었다.
“아!”
불쑥 다가온 아벨이 나를 안았다.
그리고는 아주 손쉽게, 짐짝처럼 나를 제 어깨에 들쳐 멨다.
“……뭐, 뭐하는, 뭐하는 거야?”
아, 이건.
상상도 못 했는데.
“뭐, 뭐 하는 거냐고! 내려놔!”
거꾸로 매달려 아벨의 등에 막힌 시야가 답답했다.
억지로 고개를 쳐들고 무작정 아벨의 등을 내리쳤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그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크고 강하게 자라 있었으니까.
“이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내 려놓으라고!”
아벨이 뒤돌았고, 힘겹게 목을 꺾어 든 내 시야에는 아자르가 보였다.
“미쳤어요?”
“저…….”
그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몇 번 얼굴을 쓰다듬고는 말했다.
“무사하십쇼.”
“……뭐라고요?”
“미안해.”
아벨의 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대로 나를 짊어진 채 포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