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우리는 모두 절망했다.
죽일 수도 없어 보이는데, 잘못 팔 다리라도 날렸다간?
무한으로 증식할 가능성이 다분해 보였다.
전부 말을 잃은 가운데 미하일이 무 심하게 중얼거 렸다.
“그런데 우리를 공격할 의사가 없 어 보이는군요. 그냥 지나가도록 하 죠.”
“네, 네?!”
데보라를 안은 채로 미하일은 용감 하게 그것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당황해 미하일을 잡으려던 나를, 더 당황한 아벨이 붙잡았다.
“아니, 잠깐!”
그러나 미하일의 말대로, 그것들은 그를 공격하지 않고 얌전히 들여보내 주었다.
공격할 생각도 없어 보일뿐더러 눈코입이 없어 그런지 우리의 존재도 못 느끼는듯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나 누다가, 미하일의 뒤를 따라 그것들 사이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포털이 있군요.”
조심히 미하일을 따라 걷던 우리는 다음 관문으로 향하는 포털을 쉽게 발견했다.
다시금 마력이 묶인 걸 보면 이 공 간도 ‘시련’일 텐데, 이렇게 쉽게 통 과할 수 있다고?
그러나 이유는 곧 밝혀졌다.
“닫혀있네요.”
미하일은 꼭 남의 일처럼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지금까지 마수의 아가 리처럼 일렁이며 열려있기만 했던 포 털은 왜인지 입을 꽉 다문 채 닫혀 있었다.
“대체 왜…….”
당황하던 나는 곧바로 주변을 둘러보았고, 곧 5m쯤 떨어진 곳에서 무 언가를 발견했다.
둥근 모양의 제단이었다. 돌로만들 어진 제단은 오래되어 이곳저곳이 부서져 있었다.
곧바로 가까이 다가간 내가 읽기 힘 든 고대 문자들이 두서없이 쓰인 제 단을 살펴보고 있는데, 헐레벌떡 뒤 따라온 아벨이 팔을 붙잡았다.
“어, 어머니! 혼자 다니지 마세요. 저랑 같이 있어요. 공격할 의사가 없 어 보여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까…….”
아벨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붙 잡으며 말했다.
하데스와 꼭 닮은 얼굴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니 나는 왠지 민망해졌다.
그였다면 아마 이런 걱정보다는…….
‘겁이 없군. 뭐, 워낙 강한 나랑 있 으니 안이해질 만도 하지만.’
이러면서 나를 타박했을 텐데.
잠시 그를 떠올리며 웃던 나는 아벨 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그런데 이걸 좀 살펴봐야 겠어.”
나는 아벨에게 말하고 제단 주위를 살피다가, 그 위로 천천히 올라섰다.
이곳저곳이 깨져 알아보긴 힘들었 지만 고대어로 뭐라 적혀있었으므로, 그걸 읽어볼 생각이었다.
잔뜩 경계하며 엄호하는 아벨을 아 래 두고 제단 위로 올라온 나는 엎드 린 채 위에 적힌 고대어를 천천히 읽 기 시작했다.
쓴 지가 오래되어 조금 헷갈리는 말 이긴 했지만…….
“희생의…… 제단?”
이곳저곳 가장 많이 쓰인 단어는 ‘희생’, ‘공양’ 따위의 단어들이었다.
아마 이 ‘시련’의 이름을 가리키는 모양이었는데…….
어째 느낌이 싸했다.
“아!”
그때 문득 제단 위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당황한 내가 주춤 몸을 움츠러뜨렸을 때.
“악! 뭐야!”
“젠장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를 발견조 차 못 했던 ‘그것’들이, 일제히 붉은 두 개의 눈동자를 번뜩이며 달려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가 올라 있는 제단을 막아선 아벨 에게 한꺼번에 수 마리가 달려들었다.
“아벨!”
아벨이 검을 가로로 한 번 휘둘렀다.
다행히도 그것들은 허리가 두 동강 난 채 손쉽게 무너졌지만…….
아자르에게 베인 후 그랬던 것처럼, 꾸물거리며 각각 두 마리씩으로 증식하고 말았다.
“이러면 끝도 없어!”
멀리서 아자르가 소리치는 게 들렸다.
말 그대로였다. 끝이 없을 터였다.
베어도 죽지 않는 데다가 그 수까지 무한 증식하는 마수라니.
‘그런데, 갑자기 왜 공격을 시작한 거지?’
분명, 뭔가 있을 터였다.
나는 두려운 눈으로 갑자기 빛을 발 하기 시작한 제단을 내려다보았다.
아벨에게는 수 마리가 달려들었지민, 이상하게도 제단 위에 올라 있는 나는 무사했다.
‘혹시…….’
3m나 되는 거대한 키로 비척거리 며 달려드는 그것들이 무서웠지만,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제단 위에서 뛰 어 내렸다.
내가 바닥에 발을 붙인 순간이 었다.
사아아아—
제단이 뿜어내던 빛이 사라짐과 동 시에, 마수들의 눈에서 번뜩이던 붉 은 빛도 일제히 사그라졌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그것들 은 공격 의사를 잃고 다시 긴 팔과 다리를 흔들며 목적지 없이 배회하기 시작했다.
“아…….”
반사적으로 내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알겠다.
이 시련의 이름이 왜, ‘희생의 제 단’인지.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아자르가 우리 쪽을 달려오며 소리 쳤고, 내 상태를 살피던 아벨이 대답했다.
“어! 난 괜찮아!”
단숨에 다가온 아자르가 포털을 가리키며 말했다.
“방금 이놈들이 움직일 때 포털이 열렸습니다!”
“뭐?”
“한데 지금은…….”
아자르가 멀리 포털을 돌아보며 입술을 물었다.
열렸었다는 포털은 왜인지 처음 봤을 때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
역시나…….
아마 포털을 열 수 있는 ‘열쇠’인 듯한 제단.
제단은 내가 올라섰을 때에야 감응하여 빛을 냈고, 이 정체 모를 마수들을 난폭하게 만들었다.
“왜…… 갑자기 포털이 열렸다가 닫힌 걸까요?”
난처한 표정으로 아벨이 내게 물었다.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내 시선은 허망하게 제단을 훑었다.
이 ‘열쇠’를 발동시킬 수 있는 방법 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인신공양이 필요한 거야.”
“……네?”
“뭐라고요?”
퍽 무서운 발언에 둘 모두 눈이 휘 둥그레졌다.
뒤늦게 미하일과 데보라, 록사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록사가 흥분한 얼굴로 포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열리던데예?! 뭐 어떻게 하 신 거여라? 열려있을 때 들어가면 될 것 같던디?”
“네. 이제단으로 포털을 열 수 있 어요. 포털이 열렸을 때 넘어가면 될 거고요.”
“하믄…….”
“대신, 포털을 열 한명은 여기 남 아야 하고 말이죠.”
내 말에 록사는 웃는 표정으로 굳었다.
***
무서운 생김새의 마수들은 여전히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하릴없이 몇 시간을 흘려보냈는지 알 수 없었다.
포털 옆에서는 아자르와 아벨이 억지로 그걸 열기 위해 무던히 노력 중이었고, 그들 곁에는 록사와 데보라 가 있었다.
나와 미하일은 제단 옆면에 새겨진 고대어들의 해석을 마쳤다.
이곳저곳 상한 부분이 많아 힘든 작 업이었지만, 대강은 알아보게 되었다.
“큰일이네.”
절망적이었다.
제단에 적힌 내용은 대충 이랬다.
[때로는 고귀한 희생이 우리를 한 충 더 완벽한 존재로만들리라.
자식을 위한 희생.
연인을 위한 희생.
동료를 위한 희생.
목표를 위한 희생.
기꺼이 자신을 위해 희생의 피를 흘 려줄 이를 가진 자만이, 끝내는 신께 도달하리.
고귀한 공양을 바쳐 신의 품으로 향하라.]
나와 미하일은 고대어를 해석하고 나서 서로 한참 말이 없었다.
“피 어쩌고 하는 걸 보면…….”
“아미 이것들일 거야.”
미하일이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뒤에서 배회하는 마수들을 턱짓하며 말했다.
“제물로 바쳐진 인간들의 영혼이라 고?”
“아마도. 이것들에게 죽임당하고 난 뒤에 떠돌던 영혼이, 시간이 흐르 면서 이 것들 모습으로 변했을 거야.”
“오, 이런…….”
이 시련을 통과하기 위해서 우리는 동료 중의 한명을 버리고 가야 했고, 애석하게도 그 끝은 죽음이나 다름없 었다.
“그럼 말이야, 여길 지나야 한다면 아마도……”
나나 미하일, 둘 중의 하나가 남는 게 최선이었다.
제물이 되어 이것들에게 찢기고 먹 힌다 한들 죽지는 않을 테니까.
삼킨 내 뒷말을 이해했는지 미하일 이 어깨를 으쓱했다.
“난 여기 남을 생각 없어. 무조건 가이오니아에게 갈 거다.”
단호한 미하일의 말에 나는 잠깐 멍 해졌다.
내가 남는 건 두렵지 않았지만, 가이오니아를 만난 이후가 걱정되었다.
만약 우리가 가이오니아를 죽이는 데 실패했을 때, 그때는…….
‘살려달라고 비는 것밖에 답이 없을 텐데.’
신을 믿지 않는 하데스가? 데보라 가? 신을 혐오하는 미하일이? 아니 면 아벨이?
그 누가 가이오니아에게 무릎 꿇고 호소할 생각을 하겠어.
그래도 싫다는 미하일더러 남으라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 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좋아. 그럼 내가 남을게. 대신 부탁이 있어. 만약, 아주 만약에 가이오니아를 죽이는 데 실패하게 되 면…….”
“아니.”
내 말을 자른 미하일은, 눈을 휘어 방긋 웃었다.
그는 내 어깨에 턱하니 손을 올린 채 예의 그 다정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그것도 안 되겠는데.”
“그럼 다른 방법이 없잖아.”
“왜 없어?”
어깨를 으쓱한 미하일이 포털 옆에 선 아자르와 록사를 바라보았다.
“깡마른 쪽은 죽어도 남을 생각 없 어 보이고, 덩치 큰 쪽은 루버몬트 공작을 향한 충성심이 강하니 잘 말하 면 대화가 통할 거야.”
“뭐라고?”
나는 황당해 웃었다.
“미하일, 아니, 이그니스.”
“…….”
“너 정말 미쳐버린 거야? 사람 한두 번 죽여 보니 이제 별 감홍도 없니?”
“가이오니아를 죽이고 나면 해결될 문제야.”
“뭐?”
“이 오르쿠스에 이딴 영혼들이 몇 개나 될 거라고 생각해?”
미하일은 여전히 배회하는 마수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수십? 수백? 세계가 만들어지고, 처음으로 죽은 ‘인간’이 나온 이후 쭉 존재해왔던 곳이야. 우리 정신 나간 아버지의 기준에 위배되는 수많은 인 간들의 영혼이 여기서 고통받고 있 지.”
“…….”
“프로크레아토르가 원했던 최종적 인 목표는, 우리 형벌을 끝내는 것뿐 만이 아닐 거야. 가이오니아를 없애 고 고통받는 모든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거겠지.”
“확신하는구나. 무조건 가이오니아를 죽일 수 있다고.”
미안하게도, 내가 본 미래는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는데.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던 미하일은, 곧 휙 몸을 틀어 포털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가기 시작했다.
“야, 기다려!”
당장 아자르에게 남아 달라 명령이 라도 할 기세였다.
붙잡기도 전에 아자르의 앞에 도착 한 미하일이 말했다.
“제단을 조사해보니 별다른 방법이 없어 보이는군요. 한명이 남아 제단을 발동시키는 것밖에는.”
“야!”
뒤늦게 도착한 내가 미하일의 입을 막으려고 달려들었지만, 한 발 늦고 말았다.
아주 간단하게 내 팔을 붙잡아 내린 미하일이 말했다.
“우리를 위해 오르쿠스에 뛰어드는 것도 불사한 루버몬트 공작 전하십니다. 그분께 갚아야 할 은혜가 있으신 분들이 있다면 손을 들어주세요.”
이런, 미친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