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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엄마가 되어버렸다-172화 (172/221)

172화.

아자르와 록사였다.

나는 아벨의 등 뒤를 넘겨다보며 가 슴을 쓸어 내 렸다.

솜니페르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탈 출했다는 건 짐작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다.

미래에서 보이지 않았던 록사의 안 위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지.

지속형의 무효화를 걸어놓긴 했지만, 아무래도 오르쿠스의 ‘시련’ 속에 서 이능들은 전부 무용한 듯했기에…….

“워디 틀어박혀 있다가 이제야 나 타나신 거지라?!”

“대체 뭡니까, 주군? 대신관은 또 왜 이 꼴이고?”

황급히 다가온 둘이 한 마디씩 했다.

아벨은 당황한 표정으로 허둥거렸다.

“아, 그게, 저기…….”

손을 저으며 말을 더듬는 아벨에, 아자르와 록사가 눈을 껌뻑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하데스와는 영 다른 반응에 그들도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아벨, 어떻게 된 거야?”

오해를 풀기 위해 내가 묻자, 예상 대로 아자르와 록사의 눈이 휘둥그레 졌다.

“공자님이라고요?”

“뭐라고예?!”

“아, 응. 록사 씨가 주신 물약을 마 셨더니 이렇게 됐어요.”

“예에에에?!”

록사가 거의 뒤로 넘어갈 듯 까무러 쳤다.

황당한 표정으로 아자르가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말했다.

“주, 주군이 되는 약이었어?”

“그거겠냐?! 그런 효력이 있었음 진작 내가 마셨겠지라!”

저벅저벅 다가온 록사가 아벨의 뺨을 붙들더니 이리저리 돌려보고 말했다.

“의지를 실제로 발현시키는 약이었 지리. 하데스 루버몬트가 되고 싶다고 빌기라도 하셨어예?”

“아니, 자세히 보니까 조금 다른데? 눈매도 부드럽고 턱도 덜 날카롭 고…….”

아자르가 끼어들어 말하자 록사가 다시 아벨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나. 확실히 하데스 루버몬트 순한 맛이지라. 공자님,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지예?”

“아, 죽은 줄 알았던 마수가 깨어났 어요.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록사 씨 가 주신 약이 생각나서…….”

“무슨 생각 하면서 드셨는데예?”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는데…….”

아벨이 손에 들고 있던 검을 올리며 말했다.

“……이걸 들 수 있었으면, 하고 바 랐던 것 같아요. 키가 작아서 도무지 들 수가 없었거든요.”

“예? 뭐더러 공자님이 칼을 쓰실라 하셨어예? 그냥 전하처럼 다 태워버 렸으면…….”

“아니, 그 마수가 농간을 부린 건지 뭔지는 모르겠는데 나도 숲에 처음 들어섰을 때 능력을 쓸 수가 없었어.

가능했다면 내가 직접 칼을 들고 설 쳤겠냐?”

아자르가 끼어들어 말하자 아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어머니도 마력이 사라진 것처럼 아무 힘도 쓰지 못했어요.”

“히익! 참말이가? 아니, 요 지옥 같 은 데서 능력도 못 쓰고 어찌 살아남 으라고? 아니다, 내가 네 팔은 붙였 잖어?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디?”

“팔이 부러졌어, 아자르?!”

“부러진 게 아니라 아예 숭덩 잘렸 지라.”

“아, 아니…….”

바보들처럼 말을 주고받는 둘을 보며 아자르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가 마수를 잡고 나서 숲이 사라진 직후였지. 지금은 나도 마력 이 다시 도는 게 느껴져.”

“아!”

아자르의 말에, 나도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과연 숲의 환상이 깨지고 나자 다시 몸 안에 휘도는 마력이 느껴졌다.

나는 그 즉시 미하일의 다리에 난 상처를 회복시키고 부서지고 있는 정신을 되돌렸다.

비로소 계속 끙끙거리고 있던 미하일의 얼굴이 잠잠해졌다.

다행이면서도 절망적이었다.

“아무래도…… 세세푸우가 말했던 오르쿠스의 ‘시련’ 속에서는 능력이 전혀 발동되지 않는 모양이에요.”

내 말을 듣고 있던 모두가 표정이 어두워진 채 말을 잃었다.

숲이 사라진 자리에는 다시 딱딱하 게 말라 있는 광활한 평야만이 남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 평선.

내 시야를 가리고 있던 록사가 슬쩍 몸을 틀어 뒤돌자, 가까운 곳에 검은 색의 포털이 보였다.

다음 시련으로 향하는 관문인 듯한 데…….

분명 호락호락하지 않을 그곳에 능력을 사용할 수도 없이 또 뛰어들어 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멍청한 약쟁이가 내놓은 것치곤 생각보다 쓸 만한 약이었군. 그럼 이제 공자님 어린 시절은 끝난 겁니까?”

아자르가 무거워진 분위기를 띄우 려는지 걱정스러운 표정의 아벨을 향 해 물었다.

록사가 고개 저었다.

“멍청한 건 네놈이겄지. 약발 떨어 지면 돌아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닌 감.”

“아…….”

거기까진 생각 못 한 모양인지, 아벨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약효가 남아있을 때…….”

나를 돌아보며 아벨이 재촉했다. 미하일이 정신을 차린 건 그와 동시였다.

“대신관님!”

내 옆에서 울며 앉아있던 데보라가 소리쳤다.

천천히 올라간 미하일의 눈꺼풀 아 래로 푸른 눈동자가 비쳤다.

“괜찮아? 정신이 좀 들어?”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내가…….”

“아프진 않아?”

다급히 묻는 나를 빤히 응시하던 미하일이 피식 웃음 짓고는, 아벨을 올 려다보았다.

“신세를 졌습니다, 공자님.”

“아……. 아니예요.”

미하일은 다시 나를 보고 말했다.

“미안.”

“아냐.”

“기억이 났어.”

“……무슨?”

“첫 생의 기억 말이야.”

나는 굳었다.

첫 생의 기억. 우리에게 그것이 가 진 의미는 컸다.

처음으로 살인이라는 죄를 저지른 끔찍한 기억이니까.

미하일, 아니, 이그니스가 죄를 지 은 건 맞지만, 지금은 죄책감에 무너 질 때가 아니 었다.

내가 그를 달랬다.

“너만 죄인인 것도 아니잖아. 나도 있어. 지금은 그런 생각, 하지 말 고…….”

“아니.”

자조적으로 웃던 미하일이 나를 빤히 응시했다.

“너무 오래되어서였는지, 떠올리기 싫어서였는지 계속 잊고 살아왔는 데…….”

“…….”

“……드디어, 기억이 났어.”

그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왜인지 마냥 다정하게만 보였던 얼굴이 괴로움과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래.”

“…….”

“내 목숨보다 사랑했어. 그런데 내가…… 그랬을 리 없잖아.”

설마…….

순간, 나는 혼란스러웠다.

나를 돌아보며 웃는 미하일의 얼굴 이 애처로웠다.

「내가, 내가…… 내가 죽이고 말았 어. 내가…….」

내가 기억하는 첫 생의 미하일, ‘이그니스’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와 프로크레아토르를 찾아와 일주일 밤 낮을 울었다.

나는 이그니스가 그의 연인을 죽인모습은 직접 보지 못했다.

프로크레아토르도 그때의 일을 기 억한다고는 했지만, 직접 목격한 건 아니었다.

울다 지쳐 잠든 미하일을 보며 프로크레아토르는 괴로워했다.

「변심한 연인을 제 손으로 절벽에 서 밀었다고 하더구나. 아버지가 괴 로워하셨다. 이그니스에게 벌을 주겠 다고 말씀하셨지.」

당시에는 끔찍하다는 생각에 이그니스를 제대로 마주하기도 어려웠다.

그건 이그니스의 첫 살인이기도 했지만, 이 세계에서 ‘인간’이 저지른 첫 살인이기도 했기에.

“무슨 말이야? 네가 본 기억이 어땠 기에? 조금 더, 자세히 말을 해봐.”

치미는 혐오감에 그가 형제라는 사실이 괴로웠다. 하여 단 한 번도 묻질 않았다.

왜 그랬느냐고.

하나 혹시라도…….

“너도, 나도 죄인인 적 없었어.”

미하일은 더 대답하지 않고, 주저 없는 걸음걸이로 포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사랑해서’, 죄를 저지른 건 가이오니아야. 나는.”

그는 포털로 들어서기 전 나를 돌아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 괴물을, 우리의 아버지를.”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서 운 얼굴이었다.

“죽여야겠어.”

***

‘그 괴물을.’

‘우리의 아버지를.’

‘죽여야겠어.’

오르쿠스에 봉인된 이후로 좀처럼 들리지 않았던 자식 이그니스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연하였다.

죽은 듯 누운 채 아주 오랜 시간 동 안 눈을 감고 있던 용신, 가이오니야의 눈꺼풀이 천천히 흔들리며 열리기 시작했다.

긴 속눈썹 아래 길게 찢어진 금빛 눈동자가 괴로움으로 떨 렸다.

[너를 태어나게 하고, 움직이고 말 하게 하며, 사랑하고 분노하게 해준이 아비를 왜 그렇게 증오하느냐?]

웬만한 증오가 아니었으면 그에게 닿지도 않았을 의지였다.

사랑으로만이든 자식이 어찌 저런 불 경한 생각을 품을 수가 있는지.

[내가 어디서부터 잘못한 것이냐?]

[너의 연인을 만든 것?]

[그 아이에게 자유의지를 준 것?]

[대체 어디서부터…….]

가이오니아는 아주 외로운 존재였다.

광활한 공간에 자신의 세계를 세웠고, 마르지 않는 샘과 드넓은 평야를 만들었지만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독한 외로움으로부터 가이오니아를 구제했던 세 명의 자식들을, 그는 사랑해 마지않았다.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을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했다.

「미안해요.」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이그니스의 연인이 이그니스에게 이별을 고하는 모습을, 가이오니아는 무심한 표정으로 숨어서 전부 지켜보 았다.

인간과 달리 무감정한 존재였다. 그 렇기에 처음으로 느껴본 분노였다.

이그니스가 아닌, 이그니스의 연인을 향한.

‘감히……. 저 따위 것이 왜?’

자식들이 ‘외롭다’며 다른 인간들을 만들어 달라 빌었을 때도 내키지 않 았다.

사랑했기에, 자식들이 원하는 거라 면 뭐든 들어줄 생각이었기에 뜻대로 해주었을 뿐이지.

다 같은 인간이었지만 가이오니야 에게는 결코 같지 않았다. 처음부터, 단 한 번도 같은 적이 없었다.

이그니스.

불같은 성미를 가졌지만 누구보다 순수했던 아이. 그 엉뚱한 괴리가 사랑스러운 자식이었다.

「아버지, 저에게도 연인이 있었으 면 좋겠습니다. 한낱 짐승들도 사랑을 하고 자손을 퍼뜨리는데 저는 그 러면 안 됩니까?」

뜻대로 해주었고, 이그니스는 기뻐했다.

자식은 연인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칠 수도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한데, 가여운 자식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그 존재는 아주 괘씸하게 도 제 연인을 배신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제발…….」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위험해. 위험하니까 일단, 일단 이리로 와.」

마주 선 둘의 감정은 창조주인 가이오니아에게 여실히 느껴졌다.

이그니스의 연인에게 남아있는 사랑의 감정이라곤 없었다. 반대로 이그니스는 여전히 활활 타올랐다.

불처럼.

저 괘씸한 연인이 지금 당장 자신을 배신하고 도망친다고 해도, 용서할 것처럼.

‘내 안타까운 이그니스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존재구나.’

울며 이그니스에게로 돌아가려는 그의 연인을, 가이오니아는 용납할 수 없었다.

다시 자식을 사랑해줄 마음이 남아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괘씸했다.

가이오니아는, 힘을 실어 한 번 까 딱 손짓했다.

제 손으로만이든 인간의 목숨을 제 손으로 거두는 건, 가이오니아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발 이리로 와. 다, 알겠으니까. 제발……. 아!」

그 순간 이그니스의 연인이 서 있던 절벽이 부서지고, 맥없이 흔들리던 발치와 함께 추락하던 것까지 전 부…….

이그니스는 몰랐겠지만, 우연이 아니었다.

「아악!!!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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