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엄마가 되어버렸다-171화 (171/221)

171화.

“어머니.”

“……아벨?”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왜 낯설면서도 익숙한 그 얼굴에서 아벨을 떠올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남자는 내 의문을 풀어줄 새도 없 이, 다급한 얼굴로 들고 있던 검을 내려쳤다.

내 위로 휘둘러지는 검에 놀라 반사 적으로 질끈 눈이 감겼다.

서걱.

그러나 남자의 검이 베어낸 건, 내가 아닌 내 팔에 감겨있던 솜니페르의 거미줄이었다.

[……뭐야?]

당황한 솜니페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내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왔 던 고통스러운 기 억들이 한순간에 썰 물처럼 빠져나갔다.

분노한 얼굴로 솜니페르를 노려보 던 남자의 고개가 곧바로 돌아갔다.

바닥에 나뒹굴던 미하일이 어느새 일어나 있었다. 입가의 피를 훔친 그 가 비척거리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대체 누구야.’

당황스러웠지만 한가롭게 의문스러 워할 겨를은 없었다.

나는 곧바로 시야에 잡힌 데보라를 향해 달렸다. 이상하게도 아벨은 온 데간데없었다.

‘정말 아벨인 거야?’

불안한 걸음으로 데보라에게 향하는 동안, 몇 번 솜니페르의 공격이 뒤를 따랐지만 나는 무사했다.

날카롭게 뻗어오는 거미줄을 전부 막고 잘라내며 내 뒤를 엄호해주는 남자 덕이었다.

“데, 데보라 사제. 괜찮아요?”

정신을 못 차리던 데보라가 힘겹게 눈을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데보라를 끌어안으며 미하일 과 대치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대체 뭐야?]

솜니페르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신 호탄으로 미하일이 남자에게 달려들 었다.

솜니페르에게 정신 지배를 당한다 고 해서 갑자기 신체적 능력이 극대 화되는 건 아니 었다.

마법도 쓰지 못하는 평범한 대신관 인 미하일의 몸을, 남자는 가볍게 막 았다.

‘아벨이 맞아.’

와중에도 미하일을 상처 입히고 싶 지 않은 모양인지, 검은 뒤로 돌리고 팔뚝으로 그를 막아서는 모습에 나는 확신했다.

게다가 정신이 또렷해질수록 남자 에게서 느끼는 익숙함. 알아보지 못할 내가 아니었다.

“그만…… 그만하세요!”

남자, 아벨이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 쳤다.

단순히 키와 덩치만 커진 게 아니었다. 그는 완전히 성장해 있었다.

내가 알던〈페르소나〉의 도입부에 서, 멋들어지게 등장했던 ‘루버몬트 공작’의 모습으로.

아벨이 미하일을 막고 있던 팔뚝에 힘을 실어 그를 밀어냈다. 미하일이 휘청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젠장할……!]

당황한 솜니페르가 소리쳤다.

“윽…….”

동시에 미하일이 고통스러운 얼굴 로 머리를 붙잡으며 몸을 움츠렸다.

저건 분명, 미하일이 가진 고통의 기억을 계속 자극하는 솜니페르 때문 일 터였다.

아직 회복이 덜 된 듯한 솜니페르가 아벨에게 대적하기 위해 힘을 증폭시 키고 있었다.

“아벨!”

나는 소리 질러 아벨의 주의를 끌고는 솜니페르를 가리켰다.

“대신관의 정신 지배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야! 저 마수를 잡 아야 해!”

다시 달려드는 미하일을 막아서며 아벨이 솜니페르를 돌아보았다.

그도 방법을 아는 모양이었지만, 섣 불리 움직이지는 못했다.

그럴 것이었다. 솜니페르와 대적하는 동안에 미하일이 나를 공격하러 올까 봐 걱정되겠지.

‘그럼 어떻게 해? 도망이라도 쳐야 하나?’

정말로 도망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니.

무력감에 토기가 밀려왔다.

“죄송합니다!”

그때 아벨이 다시 한번 힘을 줘 미하일을 밀어 넘어뜨렸다.

바닥에 나뒹구는 미하일이 일어나 지 못하도록, 그의 가슴께를 발로 짓 누른 아벨이 검을 들었다.

목이나 심장이 아닌 허벅지를 향해 검을 겨눈 것을 보니, 나를 쫓지 못하도록 치명상만 입힐 모양이었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내 품에 안긴 데보라가, 갑자기 번 쩍이는 단검을 들고 그들 사이로 달 려들기 전까지는.

“무슨…….”

“안 돼!”

데보라는 기다린 것처럼, 제압당해 누워있는 미하일의 목 위를 향해 단 검을 치 켜들었다.

순간, 나는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직감했다.

재빨리 달려간 내가 데보라의 몸을 안다시피 밀쳤고, 불시착한 그녀의 단검은 미하일 가슴팍의 옷을 찢고 비켜갔다.

“아.”

놀란 아벨이 숨을 삼켰다.

역시였다. 옷이 찢어지고 드러난 미하일의 가슴팍에 흑색의 핵석이 보였다.

‘이 바보 같은 새끼!’

예상은 했지만, 데보라에게 자길 죽 여 달라 부탁한 게 틀림없었다.

“공자님! 안 돼요! 저걸 깨뜨려야해요!”

데보라는 병적으로 집착했다. 핵석 이 깨진 인간이 죽는다는 걸 알 텐데 도.

미하일이 얼마나 간절히 그녀에게 부탁했을지 가늠도 안 됐다.

그저 말로만 부탁했을 것이기에 다 행이었지.

만약 내가 그의 세뇌 능력을 봉인해 두지 않았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안 돼, 아벨.”

나는 재차 단검을 쥐며 몸부림치는 데보라를 붙잡고 말했다.

“그러면, 죽을지도 몰라.”

“…….”

“영원히.”

덧붙인 말에 아벨이 놀란 눈을 했다.

알아들었겠지. 보통의 영혼들처럼 환생을 거듭하지 않고, 영원히 소멸한다는 뜻인 걸.

“아악!”

곧 아벨은 지체 없이 검으로 미하일의 허벅지를 내리그었다. 퍽 깊은 자 상이 났다.

정확히, 나를 위협하기 힘들 수준의 상처.

“피해 계세요.”

아벨은 단호히 말하고 곧바로 솜니페르를 향해 돌진했다.

[나, 나를 죽여도 이그니스가 소멸하는 것은 변함없다! 지금 이그니스의 정신은 나와 이어져있어!]

두려운 목소리였다.

아무리 아벨이 자랐다지만, 솜니페르가 저렇게 약한 모습을 보일 리는 없는데, 아무래도 마수의 본능이 발동한 모양이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무력의 차이. 강자를 향한 두려움.

솜니페르의 말에 아벨은 멈칫했고 나는 소리쳤다.

“아니야! 상관없어!”

[입 닥쳐!]

솜니페르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와 정신이 이어진 인간은 곧 솜니페르와 한 몸이 었다.

그러나 대상이 미하일이라면 얘기 가 달랐다.

미하일뿐만 아니라 나도, 누군가를 죽이기 전까지는 아무리 고통스러워 도 죽을 수 없는 존재들이 니까.

[아아아악!]

내 말을 믿기로 결정했는지 아벨은 더 주저하지 않고 달려들었고, 순식 간에 솜니페르의 다리 한 개를 잘라 냈다.

끔찍한 비명이 숲 안에 울려 퍼졌다.

솜니페르의 큰 몸이 기울며 그의 입에서 거미줄이 튀어나왔다. 거미줄은 빠르고 위협적으로 아벨을 노렸다.

하지만 아벨에게 닿지도 못했다.

능력이라도 쓰는 것처럼 재빠른 몸 짓, 인간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반응 속도.

아벨은〈페르소나〉에서 묘사된, 전 쟁터의 사신과도 다름없다던 루버몬트 공작의 모습 그대로였다.

확실했다. 그저 몸만 자란 게 아니 었다. 모든 능력치가 ‘미래의’ 아벨과 비슷해졌다.

[꼬아아아악!]

한 개, 두 개…….

다리를 베어낼수록 솜니페르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무너졌다.

처음에는 제법 아벨의 움직임을 따라 뻗어나가던 거미줄도 곧 조준점을 잃고 허망하게 허공을 찔렀다.

아벨은 기울어 넘어진 솜니페르의 몸을 밟아 재빠르게 타고 올랐다.

[시, 싫어…….]

징그러운 아홉 개의 눈. 솜니페르의 투명한 동공 위로 아벨의 얼굴이 스 친 순간.

[아아아악!]

그의 검이 솜니페르의 머리를 푹 꿰 뚫었다.

전보다 더 소름 끼치는 솜니페르의 비명이 숲을 메웠다.

고통에 찬 수만 개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지금까지 솜니페르가 기억을 먹고 정신을 지배한 수많은 인간들의 목소리.

솜니페르는 풀썩 무너졌지만 아벨 은 멈추지 않았다.

꽂아 넣은 검을 움직여 솜니페르의 머리를 가르고 헤집었다.

‘핵’을 찾는거였다.

깊숙이 찌른 검이 솜니페르의 머리 와, 몸통으로 이어지는 목 부분을 몇 번 휘저었다.

“아.”

무언가 검 끝에 걸린 듯했다.

핵을 찾은 모양인지 아벨이 약간 망 설이는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솜니페르가 소멸하면 미하일은 극 한의 고통에 괴로워하겠지. 그러나 죽지는 않을 테다.

엉금엉금 기어간 내가, 허벅지의 자 상에 고통스러워 거의 정신을 잃은 미하일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아벨을 향해 눈짓했다.

그는 크게 한 번 고개를 끄덕인 뒤, 솜니페르의 핵 위로 높게 쳐든 검을 내려쳤다.

쨍!

핵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우리를 둘 러싸고 있던 모든 ‘환상’이 무너졌다.

눈앞에 있던 끝없는 숲이 조각조각 깨져 사라지기 시작했다.

***

“하윽! 아…….”

예상은 했지만 미하일은 생각보다 더 고통스러워했다.

어찌 모를까.

아벨의 영혼을 죽이 지 않기 위해 수 십 번 먼저 죽으려던 나였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수만 가지의 방 법들 중 고통스럽지 않은 건 없었다.

보통 인간이었다면 충분히 죽을 만 큼의 고통을 감내했는데도 끝내 죽지 않는 것이 더 고통스러울 터.

“괜찮아, 괜찮아.”

나는 울며 미하일의 얼굴을 더 꽉 끌어안았다.

정신이 조각조각 나며 끝내는 죽고 마는 고통을 고스란히 겪으며 그는 계속해서 몸부림 쳤다.

이윽고 그의 몸이 축 늘어졌고, 내 위로 큰 그림자가 드리웠다.

천천히 고개를 드니 아벨이었다.

정확히는…….

하데스를 꼭 닮은 얼굴로 자란, 미래의 아벨.

“어, 어머니. 대신관님은…….”

“괜찮아. 죽지 않았어.”

나는 대답해주고 멍하니 그를 올려 다보았다.

아벨이란 건 확실했지만 갑자기 어 떻게 그가 자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당황한 나와 달리, 정작 아벨은 어 른으로 자란 제 상태는 자각도 못 한 모양이었다.

내 품에서 축 늘어진 미하일을 살피 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아벨을 향해, 어찌 된 일인지 물으려던 그때였다.

“아벨. 너 대체…….”

뒤에서 놀란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주군?!”

“아, 아니……. 이게 뭔 조화당가?

와 여기 계셔예?!”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