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미하일의 충고대로, 돌아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 달리던 나는 절망했다.
끝없이 뻗어진 길은 끝이 보이지 않 았다. 들어온 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 문에 금세 입구가 보여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빠져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 숲의 주인인 솜니페르를 없애지 않고서는.
“이리 와.”
제 몸만 한 길이의 보검을 챙겨 쥔 아벨과 데보라를 이끌어, 나는 일단 길이 아닌 숲을 헤치고 들어갔다.
솜니페르와, 아마도 그에게 정신을 지배당하고 우리를 쫓게 될 미하일을 피하려 면 몸을 숨기는 편이 나았다.
“어, 어머니…….”
아벨과 데보라는 덜덜 떨며 내게 안 겨왔다.
둘을 달래는 내 손도 똑같이 떨리고 있었다.
‘어떡하면 좋지.’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숲에 걸려 있는 제약 때문인지 마력 이 봉인되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나마 솜니페르에게 대적할 힘을 가 진 아벨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제가 너무…… 쓸모가, 없어 서……. 어머니가 도와, 도와달라고 부탁하셨는데도…….”
검 하나를 들기도 버거운 작은 손으 로 아벨이 눈가를 훔쳤다.
“아니야. 아니야, 아벨.”
이게 아벨의 잘못은 아니니까.
나는 우는 아이를 달래며 침착하기 위해 애썼다.
“우리는 무사히 빠져나가야 해. 그 럴 수 있을 거야. 그러려면, 그러려면 아까 본 괴물의 핵을 찾아서, 찾아 서…….”
아벨과 데보라를 나란히 앉혀두고 중얼거리던 나는, 순간 사색이 된 두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숨을 삼켰다.
놀란 듯 치뜬 눈동자들이 일제히 내 등 뒤를 향해 있었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이렇게…… 빨리?’
등 뒤에 미하일이 있었다. 기억을 전부 읽힐 때까지 솜니페르의 거미줄에 묶여 자유롭지 못할 줄 알았던 그는 아무렇지 않았다.
벗어난 걸까.
아니, 아니다.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금방 부서질 만큼 연약한 그의 정신이, 고작 몇 분 도 버티지 못하고 기어코 잠식당해 버린 거였다.
“이그, 니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아벨과 데보라를 막아서고는, 그를 마주 봤다.
탁하게 바랜 미하일의 푸른 눈동자 가 나를 빤히 직시했다.
천천히 올라온 그의 손이 머리부터 삠까지 천천히 쓸어내리는 동안, 나는 두려움에 눈을 감지도 못하고 가 만히 떨었다.
질끈 눈을 감아버리는 순간 모든 게 끝날 것만 같았다. 치뜬 눈에 고인 눈 물이 흐르며 뺨을 간지 럽혔다.
“컥!”
“어머니!”
미하일의 두 손이 단숨에 내 목을 졸랐다.
“컥, 허…….”
몸이 덜렁 들렸고 순식간에 호흡이 가빠졌다.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미하일은 그저 무심한 눈으로 응시할 뿐이었다.
[히히히히히……!]
샤샥,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어 느새 미하일을 따라온 솜니페르가 눈 알을 번들거리며 머리를 기울였다.
[여기 있었어?]
“꺄아아악!”
난데없이 머리를 들이민 솜니페르의 등장에 데보라가 웅크리며 소리 질렀고, 아벨은 곧장 미하일에게 달 려들었다.
우리 사이를 가르고 달려든 아벨에 미하일이 나를 놓치고 뒤로 넘어졌다.
“컥……. 헉!”
막혀있던 숨이 뚫린 순간 시야가 핑 글 돌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겨우 숨을 고르고 재빨리 앞을 살피자 아벨이 나와 데보라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는 눈에 띄게 떨면서도 재빨리 움 직였다.
질질 끌고 있던 보검을 검집에서 꺼 내는 움직임이 다소 힘겨워 보였다. 솜니페르가 웃었다.
[푸히히히히……. 그것으로 무엇을 어찌하게? 재미있는 아이구나.]
만신창이가 되었던 솜니페르는, 미하일의 기억을 먹고 어느새 멀쩡하게 회복되어 있었다.
아벨은 용감하게도 검 손잡이를 쥐고 일어서서 다가오는 미하일을 향해 겨누었지만, 그 무게를 버티기도 힘 들어 보였다.
자꾸 내려가는 검 끝을 바라보던 솜니페르의 입에서 다시 웃음이 흘렀다.
[히히히……!]
“오지 마세요!”
소리치는 아벨에도 아랑곳 않고 미하일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아!”
질끈 눈을 감고 아벨이 검을 휘두른 순간, 미하일은 그의 손목을 맥없이 낚아챘다.
챙!
단숨에 빼앗은 검을 미하일이 멀리 내던졌다.
“아…….”
“안 돼!”
퍽!
힘껏 휘두른 미하일의 주먹에 아벨의 작은 몸이 멀리 날아가 굴렀다.
“아, 아벨!”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퍽! 퍽! 퍽!
작고 힘없는 어린아이의 몸 위로 무 자비한 발길질을 쏟아 붓는 미하일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했다.
“하, 하지마……!”
정신없이 무릎으로 기어간 내가 미하일의 다리를 잡고 매달렸다. 그의 움직임이 잠시 멎었다.
“아, 아벨. 괜찮……. 하윽!”
울컥 피까지 토하며 나뒹구는 아벨의 상태를 파악할 새도 없었다.
뒷머리를 우악스럽게 낚아채는 손 길에 나는 힘없이 뒤로 고꾸라졌다.
“컥!”
널브러진 내 몸 위로 올라탄 미하일 이 다시금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커, 헉…….”
목을 꽉 붙든 미하일의 손을 떼어내 려고 매달렸지만, 역부족이었다.
다시 숨이 가빠졌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여전히 빛을 잃은 미하일의 푸 른 눈동자만 선명했다.
[흐으음……. 매번 이렇게 죽임 당 하는 불쌍한 영혼의 기억은 얼마나 맛있을까?]
멍멍한 귓가에 솜니페르의 목소리 가 아득히 멀어지듯 스며들었다.
미하일의 손을 붙든 내 손목 위로, 불쾌하고 날카로운 거미줄이 천천히 기어올랐다.
‘아……. 안 돼.’
정신 지배를 당한 미하일을 상대하 기도 버거운 이때, 나까지 솜니페르의 최면에 허우적거릴 순 없는데.
아벨은? 데보라는?
힘겹게 비튼 시야에 겨우 눈만 뜬 아벨과 구석에 움츠린 데보라가 들어왔다.
‘도망쳐.’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아벨을 죽이기 전까지는.
하지만, 솜니페르에게 정신 지배를 당하고 난 이후의 나는 장담할 수 없 었다.
미하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처럼…….
‘제발.’
‘도망쳐.’
정신이 아득해졌다. 꿈을 꾸는 것도 아닌데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밀려들 어오기 시작했다.
***
아이샤의 몸을 옭아매고, 천천히 그녀의 기억을 흡수하기 시작한 솜니페르의 입에서 놀라움으로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세, 세상에나.]
[불쌍한 이그니스.]
[연인의 몸 안에 형제의 영혼이라 니? 이건 무슨 운명의 장난이냐?]
[히히히히히…….]
기괴한 웃음을 터뜨리며 솜니페르가 여러 개의 다리를 다다닥 움직여 가까이 다가왔다.
[가만 있자! 내게 아주 재미난 생각 이 있다. 혼자 보기는 아까운 광경이 될 텐데, 관객이 있어 다행이구나.]
솜니페르는 인상을 찌푸린 채 뒹구는 아벨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여전히 찌르르 울려오는 복부의 통 증에 아벨은 피를 토하며 억지로 눈을 떴다.
[잘 보아라. 재미있을 게야.]
아이샤의 위에 올라타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던 미하일이 웬일인지 손을 놓고 멍하게 휘청거렸다.
가까이 다가온 솜니페르가 징그러 운 발을 들어 미하일의 뺨을 긁어내 리듯 쓰다듬었다.
[불쌍한 아버지의 아들. 우리의 이그니스. 생을 나눈 형제를 탐하고 연 인을 죽인 비극의 주인공이 되면 어 떨까?]
미하일이 빛을 잃은 눈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정신, 차려…….”
입 맞출 듯 떨어지는 고개를 피하며 아이샤가 힘겹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지금 끔찍한 기억들을 재생시키는 솜니페르의 최면에 지배당하 고 있는 중이었다.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을 걸 알면서도 아이샤는 필사적으로 버텼다.
“제발…….”
젖은 뺨 위로 불시착한 미하일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히히히히히……!]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와 함께 미하일의 손이 올라왔다. 이미 너덜너덜 해진 드레스의 앞섶을 북 찢어내는 손길에 아이샤가 질끈 눈을 감고 소리쳤다.
“제발!”
“으아아!”
그때였다.
구석에서 덜덜 떨고 있던 데보라가, 어디서 났는지 모를 단검을 쥔 채 미하일의 등 뒤로 달려들었다.
[어어, 안 되지, 안 돼.]
“꺄악!”
짐승처럼 뒤돈 미하일이 팔을 한 번 휘둘렀다. 데보라의 작은 몸이 맥없이 나가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히히히히히……. 왜 재미있는 연극을 망치려고 해, 아이야.]
어찌나 세게 얻어맞았는지 데보라는 땅을 구르며 기침을 토했다.
‘왜…….’
그때 아벨 루버몬트는, 생각했다.
이 끔찍한 광경들을 전부 지켜보면 서도,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따금씩 피를 토하는 게 전부라니.
‘저는 이렇게…….’
무력했다. 지극히도.
‘쓸모가 없을까요, 아버지.’
처음부터 그랬다.
하데스의 손에 주워져 루버몬트로 왔을 때부터…….
언제나 폐만 끼치는 존재였고, 끝내는, 그가 했던 마지막일지도 모를 부탁까지 들어주지 못할 모양이었다.
‘어머니를 지켜달라고 하셨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어떡하죠.’
아버지처럼 강하지도 않고, 검 하나 제대로 쥘 수 없는 바보 같은 어린아이라니.
‘죄송해요, 아버지.’
눈물이 흐름과 동시에 손끝이 힘없 이 늘어졌다.
가까이에 꼭 내팽개쳐진 제 모습처럼 나뒹구는 보검이 있었다. 지금까 지 애지중지 들고 있던 그것의 차가 운 손잡이가 손에 닿았다.
쥐어봤자 들 수도 없을 검이다.
“아…….”
무력감에 입술을 문 채로 작은 손을 거두던 아벨이 멈칫했다.
문득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무 언가가 만져졌다.
숲에 들어오기 전, 록사에게서 받았던 물약.
「소원을 들어주는 물약이지라.」
「지는 그거를 ‘간절한 정신의 집약 체’라부르고 있어라.」
속성 마법이 봉인된 이 숲에서, 어 쩌면 속성 외 마력을 수집해 만들었 다는 이 물약은 유일하게 쓸모 있을 지도 모른다.
아벨은 힘겹게 손을 움직여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내들었다.
***
「어머니, 저는 준비가 됐어요.」
「부디 슬퍼하지마세요.」
「사랑해요.」
「당신을 만나서 기뻤어요.」
요동치는 기억이 괴로운 이유는, 그수많은 형벌의 시간 속에서도, 아이 가 단 한 번도 나를 원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참 한결같았다. 아직 아무것도 모를 어린 나이에 죽임당할 때도, 삶의 기쁨을 전부 누린 후에 죽임당할 때도, 그 언제라도…….
단 한 번도 나를 원망하는 일 없이, 웃으면서, 때로는 슬퍼 말라고 나를 달래면서.
‘안 되는데. 나까지 정신을 지배당 하면…….’
솜니페르에게 정신을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밀려오는 과거의 기억을 털어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 도, 쉽지 않았다.
수도 없이 반복됐던 형벌의 시간들 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고통을, 이길 수가 없었다.
‘안 되는데, 정말……. 아벨을 지켜줘야 하는데…….’
내 몸을 타고 있던 미하일의 묵직한 무게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몽롱해진 정신이 천천히 바스러지 기 시작했고…….
밀려오는 기억의 마지막에는, 이번 생에서 만난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아벨.
아…….
설마, 이런 식으로 너를 죽이게 되는 미래를 보는 걸까?
「어머니!」
맑은 웃음과 함께 나를 부르던 아벨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어머니!”
그때.
조금은 낯선 목소리와 함께 겹쳐졌 던 시야가 깨진 순간.
퍽!
“윽!”
몸이 가벼워졌다. 스치듯 미하일이 멀리 나가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초점이 맞지 않던 시야가 점차 뚜렷해지자, 내 앞에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그가 있었다.
헤어질 때와 다름없이 말끔한 모습으로, 한 손에는 아벨이 들고 왔던 보 검을 쥔 채로.
‘……하데스?’
어째서 그가 여기에?
금세 사라질 환각이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에, 나는 눈에 힘을 주고 부릅 떴다.
아니, 아니다.
하데스라고 생각했는데…….
그저 그와 놀랍도록 닮은, 낯선 얼굴이었다.
‘누구…….’
그는 금방이라도 울 듯 애처로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