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나, 록사 트리볼트지라.”
히죽 웃는 록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아자르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퍽 감동적인 순간에 별 감흥 없는 얼굴이었다.
록사가 발끈했다.
“하이고! 누가 은혜도 모르는 검은 머리 짐승 아니랄까 봐 니 조동아리는 딱 붙어브렀냐? 고맙다는 말도 몰 라?”
“…….”
아자르는 대답 않고 새로 생긴 팔을 휘휘 움직이는 데 집중했다.
“이 싹퉁바가지 없는 놈이…….”
“누가 보면 지는 고맙단 말 한 줄 알겠네. 거 래 좋아하는 놈 아니 었냐? 당연한 거지.”
“와……! 누가 도와달라구 혔냐?”
“뭐? 이게 목숨을 살려줘도……!”
“고맙다잉.”
담백한 감사 인사에 아자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게 록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는지 헷갈렸다.
“생각해 보니까네 살려준 대가를 치른 게 맞으니 네놈은 고맙다고 안 해도 되겠지라. 눈깔은 사실 감동받 아 눈물을 줄줄 흘리고 싶은 것 같지 마는 넣어둬라.”
“착각은”
아자르가 불퉁하게 중얼거리며 록사의 시 선을 피했다.
사실 그가 최면에 걸려있는 동안, 거미 괴수의 속삭임과 록사의 잠꼬대 같은 비명을 고스란히 들었던 아자르다.
과거의 기억을 꺼내 인간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고 조종하는 마수라니.
거의 평생 마수를 상대하며 살아온 아자르도 이런 지능적인 부류는 처음 만나보았다.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 뻔했군.’
태연한 척하던 아자르가 옆에 선 록사를 힐끔 돌아보았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그의 사정을 엿봤다.
아자르의 동생들에게 했던 심한 말 은 아마, 어린 시절의 록사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겠지.
무슨 사정이 있든 절대 용서 못 할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딴 감당하기 힘든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도 용케 헤실거리며 잘 사는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고민하던 아자르가 살래살래 고개 저었다.
“한디 이를 워쩐다냐…….”
“뭐?”
왜인지 사색이 된 얼굴로 숲을 올려다보던 록사를 따라 아자르의 고개도 돌아갔다.
“아.”
방금까지만 해도 숲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광활한 황무지뿐.
두려운 눈으로 록사가 고개를 돌렸다.
뒤에는 아까 만난 괴수의 아가리처럼 시커멓게 열린 포털이 일렁이고 있었다.
아마 다음으로 향하는 길은 찾은 모양이었지만…….
“설마 재수 없게도 네놈이랑 단 둘 이만 남은 건 아니겠지라?”
……아직, 나머지는 저 숲 너머에 있을 텐데.
아자르의 표정도 경악으로 일그러 졌다.
***
“솜니페르군요. 아마 제가 기억하 기로는 세세푸우 다음으로 태어났던 마수지요. 가이오니아가 내린 이능을 악하게 휘두른 죄로 오르쿠스에 갇혔다고는 들었는데…….”
아자르와 록사를 따라 숲으로 들어 간 우리가 머잖아 만난 건, 머리 위에 커다란 구멍이 난 채로 죽어 있는 거 미 괴수, 솜니페르였다.
무서운지 아벨과 데보라는 내 다리를 한쪽씩 붙잡고 찰싹 달라붙어 떨 었지만, 미하일은 끔찍한 몰골의 사 체를 이리저리 살피며 히죽 웃기까지 했다.
“이거, 이거…… 꽤 성가신 놈이었 는데 잘됐군요. 고기방패로나 써먹을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제법 능력이 괜찮았던 모양이에요.”
아자르와 록사를 가리키는 말에, 내가 미하일의 어깨를 한 대 탁 내려쳤다.
“무슨 말이 그래?”
“정말로 죽은 거예요?”
아벨이 묻자, 미하일이 발끝으로 솜니페르의 사체를 뒤적거 렸다.
“아마도요. 창세 시절의 마수들은 지능이 깃든 핵을 가지고 있어서 보 통은 그 핵을 파괴하기 전까지는 죽 지 않지만…….”
미하일은 다시 한번 웃으며 솜니페르의 머리를 걷어찼다.
“죽어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걸 보 니 핵도 깨진 모양입니다.”
“핵석 같은 건가요?”
꼬치꼬치 캐묻는 아벨에게도 미하일은 왜인지 기분 좋은 표정으로 귀 찮은 기색 없이 대꾸했다.
걸림돌이 될 줄 알았던 마수를 손쉽 게 처리한 게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비슷하답니다. 마수들의 핵이 먼 저 만들어졌던 개념이지요. 처음에 창조된 인간들에게는 능력도, 핵석도 없었거든요.”
“그렇군요.”
“그런 의미에서 솜니페르는 ‘암속성 능력자’들의 선조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처음 가이오니아가 이마 수에게 허락했던 능력이 바로 상대의 기억을 엿보고 조종하는 거였거든요.”
아마 가이오니아도 솜니페르가 자신의 능력을 악용하리라 생각지는 못했을 터다.
확실히 처음에 솜니페르는 제 정신 조종 능력을 남발하지 않았다. 징그러운 거미 모습을 하고 있지도 않았 고.
지금은 기억이 좀 가물가물하지만, 솜니페르는 상처 입고 죽어가는 동물 들의 영혼을 보살펴 끔찍했던 최후의 기억들을 지워주고, 편안히 보내주는 일을 하곤 했다.
“한데 이마수가 제 능력을 갖고 살 아있는 존재들을 마음대로 조종하기 시작했죠. 가이오니아뿐 아니라 당시 이 땅에 살던 모든 존재들이 꺼림칙 하다고 등을 돌리기도 했습니다.”
“아, 그래서…….”
“네. 암속성 능력자들이 배척받듯 이 이마수도 오르쿠스 깊은 곳으로 쫓겨났고……. 뭐, 잘 숨어 살다가 결국은 이렇게 가버렸군요. 안타까워 라.”
전혀 안타까운 얼굴은 아니었지만.
나는 왜인지 기뻐 보이는 미하일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한시가 바빠 죽겠는데 여기서 몬 스터 도감 설명할 때야? 아자르랑 록사 씨를 찾아서 얼른 여길 빠져나가 야 해.”
“조급해 마세요. 아마 숲의 주인은 솜니페르였을 겁니다. 둘은 이놈을 죽이고 도망친 듯하니 별 걱정 안 하 셔도 될 것 같고……. 우린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길을 따라서 쭉 빠져나가기만 하면 됩 니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미하일의 말 에도 찝찝했다.
왜냐면…….
“어머니도 느끼고 계세요?”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펴는 나를 올 려다보며 아벨이 조용히 물었다.
“너도?”
“네.”
그래. 숲에 들어온 순간부터 나는 마력의 흐름이 턱 막혀버렸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력억제제를 먹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미하일은 왜인지 전혀 못 느끼는 듯했지만…….
아직 마력을 많이 사용해본 적 없어 그 흐름에 민감한 나와 아벨은 본능 적으로 긴장할 수밖에.
이 숲이 문제인지, 우리의 상태가 문제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 지금 우린 완전히 무력한 상태였다.
괜히 조급해진 내가 미하일의 팔을 이끌었다.
“알겠으니까, 그럼 빨리 가자. 여기 너무…….”
그때였다.
미하일이 갑자기 자길 붙든 내 팔을 잡고 거세게 반대로 밀어 넘어뜨렸다.
“악!”
“어머니!”
“부, 부인!”
놀란 아벨과 데보라가 내동댕이쳐진 내게로 달려왔다.
급하게 눈만 들어 미하일을 살핀 나는 놀랐다.
아마 나를 겨냥한 듯, 방금까지도 내가 서 있던 자리에는 대신 미하일 이 있었다.
정확히는, 나 대신 무언가를 막은 오른팔이 단단히 옭아매어진 채로.
“아, 안 돼…….”
가느다랗지만 질긴, 새하얀 거미줄 이, 죽어버린 줄 알았던 솜니페르의 주둥이에서 뻗어 나와 있었다.
[불……쌍한…… 이그니스, 아니야?]
축 늘어져 있던 솜니페르의 다리가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크게 한 번 움찔했다.
죽은 듯 빛을 잃었던 마수의 머리에 달린 아홈 개의 눈은 어느새 녹색빛을 내며 징그럽게 반짝이고 있었다.
[다행……이야. 으음, 세상에나. 이 렇게 맛있는 기억들이…….」
“아이샤.”
이제는 그의 오른발 한쪽까지 옭아 매기 시작한 거미줄을 내려다보며, 미하일이 가만히 나를 불렀다.
“뒤돌아보지 말고, 들어왔던 길을 따라 도망가. 여길 벗어나. 무조건.”
“핵이 아직 깨지지 않아서 그래. 찾 아서 깨야 해.”
나는 재빨리 옆에 앉은 아벨에게 말 했다.
“핵…….”
아벨은 솜니페르를 돌아보며 절망했다.
그의 몸집의 열 배는 되는 거미 괴 수의 몸 어디쯤 핵이 있을지, 가늠하 기도 어려운 듯했다.
[회복하려면…… 몇백 년은…… 걸렸을 텐데, 이렇게 맛있는 기억을 가 진 사냥감이…… 제 발로 와줄 줄이 야.]
“데보라 사제.”
“네, 네! 대신관님!”
[다른 인간도 아니고…… 영원히 고통받는 이그니스! 이그니스다! 역 시! 가이오니아께서는…… 나를 버리지 않으신 모양이야!」
“내 말 기억하고 있지요?”
“아…….”
지금 이 타이밍에 미하일이 데보라를 불러 저런 말을 하는 이유라곤 뻔했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자길 죽여 달 라는 거다.
동시에 ‘나를 죽이는’ 미래를 봤다 던 미하일의 말이 떠올랐다.
하나의 목표를 위해 오르쿠스로 들 어온 우리였다. 갑자기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눌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생긴다면, 미하일의 자의가 아닐 확률이 컸고.
지금 내 머릿속에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졌다.
“솜니페르가 기억을 전부 읽고 나면, 그 인간은 정신을 지배당하게 돼.”
급히 몸을 일으킨 나는, 아벨과 데보라의 손을 잡고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설명했다.
“그러니까 만약에 대신관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더라도 그게 저 사람의 자의는 아니라는 거야.”
기억을 읽는 과정에서 벗어나면 되 지만, 가망이 없었다.
고통스럽고 음울한 기억일수록, 그 기억에 오랫동안 마모된 인간일수록, 솜니페르의 최면 안에서 의지를 발휘하기 힘드니까.
나도, 아벨도, 데보라도 전부 안타 까운 기억을 갖고 있는 존재들이지 만…….
[미안해요, 이그니스.]
이그니스, 그는 우리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매 생마다 거 듭하며 쌓아온 제일 ‘약한’ 인간이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 아요.]
“도망쳐.”
먼 옛날, 그의 연인을 흉내 내고야마는 솜니페르의 목소리와, 빛을 잃 기 직전 나를 돌아보며 간절히 호소하는 미하일의 얼굴.
그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아벨과 데보라의 손을 꽉 잡은 채 뒤돌아 달리 기 시작했다.
지독한 술래잡기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