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돈이 생겼지만 크나큰 빚을 갚아야 할 부모는 이미 죽고 없었다.
그런데도 왜 살려고 했더라. 그냥 이렇게 빨리 죽어 만나고 말 것을.
“기억이 안 나.”
“그래, 굳이 생각하지마. 지금 행 복해졌으면 된 거지. 아버지, 얼른 저 기 가 봐요!”
“그래, 그래.”
록사는 비로소 만족스러웠다. 지긋 지긋한 생에서 이토록 기분 좋은 날 은 없었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서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록사 트리볼트.”
익숙한 목소리에 록사의 걸음이 멈 추었다.
돌아본 곳에는…….
“잉? 전하?”
하데스가 있었다.
그는 지금 아는 얼굴보다는 조금 젊 어 보였다. 록사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정도, 되었을까.
“……전하가 왜 여기 계셔라?”
“살아라.”
“예?”
머리가 찌릿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했는데, 언젠 가 한 번, 하데스에게 들은 적 있는 말이었다.
그는 특유의 오만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며 록사의 앞에 무언가를 내던졌다.
거무죽죽하게 피가 말라붙은 가죽 꾸러미 안에서, 묵직한 무언가가 좌 르륵 굴러 나왔다.
목이 잘린 낯선 사내의 얼굴들.
질겁하던 록사가 그 머리들을 내려 다보다가 탄성을 내뱉었다.
찬찬히 살펴볼 생각을 하지 않아 몰 랐지만, 다시 보니 그 머리들은 과거에 보았던 무뢰배들의 것이었다.
아, 맞다.
목적도 잊고 살아오던 그가 하데스를 만났을 때…….
시야가 다시 한번 반전되었다.
지금과는 조금 다른 풍경인 하데스의 집무실.
그 앞에 방의 주인인 하데스와 마주하고 선 록사가, 무심코 어깨 언저리에서 흔들리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 만졌다.
과거의 자신이었다. 제국 지명수배 자가 되어 도망치다가, 하데스를 만 나 겨우 살았던.
‘갑자기 또 뭔데?!’
제국에서 제일 잘나간다는 귀족이 대체 왜 자길 숨겨주면서 황실의 눈 밖에 날 짓거리를 하는지, 도무지 이 해가 안 되었던 그날이었다.
“뒈진 생선 눈깔이군.”
“제 눈이 보이셔라……?”
“가끔 뜰 때 있어.”
“글긴 하지라마는…….”
“너 같은 놈이 살려는 의지가 없다 니 참 안타까운 일이야.”
“살려는 의지가 없다니요? 죽기 싫 어가 열심히 도망치던 저를 잡아오신 양반이…….”
“글쎄. 목적을 잃어버리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을 그런 눈이라서. 착각이라면 미안하군.”
“착각이셔라.”
“복수는 했나?”
“……예?”
“네 부모를 죽인 자들 말이야.”
“제…… 뒷조사 하셨어라?”
“인재를 채용할 때 신상 조사는 기 본 중기본이지.”
“하…….”
“복수, 했냐고.”
“구질구질하고 뻔한 말 하실 거라 믄 들을 생각 없어라. 지는 고것들 얼굴도 몰라예. 이미 다 잊은 마당에 뭔 감성팔이를 하실라고…….”
“좋다. 환영식을 맨입으로 할 순 없 지.”
이튿날, 루버몬트의 성 안에는 장대 네 개가 걸 렸다.
누군지도 모를 사내들의 사체 네 구였다. 그들은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 사흘 내내 장대 위에 걸려 있었다.
성에 머물던 록사는 기겁하며 하데스 루버몬트라는 인간에 대해 고민했다.
오갈 데 없는 도망자신세가 되었으 니 몸을 의탁하긴 해야 할 텐데, 수를 리면 자기 편 목을 벨지도 모를 그런 미친놈 곁에 있어도 되는 것인지.
“살아라.”
수습한 시체들은 죽어서도 평온하 지 못했다. 하데스는 죽은 그들의 목을 잘라내 록사의 발치 앞에 던지며 말했다.
살라고.
“아니, 살아있는데 뭘 자꾸 살라 고…….”
“지금은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살 고 있다면 그래, 악착같이 벌어. 나중에 다 쓰고도 배가 터져 죽을 만큼 벌어 회의감이 들 때까지.”
“…….”
“다만 그때가 되어 목적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면, 또 새롭게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아라.”
“뭔…….”
“아무리 봐도 네놈 눈빛은 죽어있 어. 목적을 잃으면 유감없이 뒈질 놈 이란 말이야.”
“…….”
“살아라. 악착같이.”
하데스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죽기엔 아까운 놈이니까.”
왜 악착같이 살고 있는 제게 악착같 이 살라 강요하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아.”
어느새 록사는, 다시 부모와 어린 자신의 사이에 놓여있었다.
갑자기 튀어나왔던 하데스는 어디 론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뭔…….”
“왜 그러니, 아들? 얼른 가야지.”
어머니가 다정한 웃음과 함께 록사의 팔을 이끌었지만, 걸음을 멈춘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힘들게 살려놓은 놈이 서른도 안 되어 지옥 불구덩이에 들어오면 네 부모는 피눈물을 흘릴 거다.」
「자식 죽길 바라는 부모는 없어.」
「뒈져서 두 번이나 불효하지 말고, 살아라.」
「네가 마음껏 능력을 펼칠 수 있도 록 도와줄 테니.」
“허억……!”
선명한 기억 속에 흩어지는 하데스의 목소리를 끝으로, 록사는 눈을 떴다.
“이이, 뭐, 뭐시지라?!”
부모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제 몸 은 무언가에 꽉 묶여 있었다.
록사는 순간,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크고 검은 아홉 개의 눈동자를 발견했다.
‘거미?’
그건 3m쯤 되어 보이는 거대한 크기의 괴물 거미였다.
그리고, 그의 몸을 꽉 얽고 있는 것은 거미의 주둥아리에서 뽑혀 나온 하얀 실.
질겁한 록사가 빽 소리 질렀다.
“아악! 이게 뭐여!”
[아들, 왜 그러니? 저기로 가야지.]
[아버지랑 내기하기로 했자네?]
괴물 거미는 눈을 희번덕이며 부모의 목소리를 흉내 내고 있었다.
“야, 이 등신 새끼야! 이제야 정신을 차렸냐?!”
단단한 실고치 안에 몸이 매인 록사 가, 익숙한 목소리에 겨우 고개를 틀었다.
아자르였다. 그는 숲 안에서 수도 없이 기어 나오는 새끼 거미들을 하 나하나 칼로 베어내며 조금씩 다가오 고 있었다.
이미 그의 주변에는 수많은 거미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고, 용케도 허공에 록사를 붙들어놓은 단단한 거미줄까지 반쯤 잘라내는 데 성공한 상태였다.
“이게 뭔…….”
“정신 차려! 최면을 거는 마수 같으 니까! 머저리같이 현혹되지 말고! 네놈이 동화될수록 이 빌어먹을 거미줄 이 더 질겨진단 말이다!”
생각해 보니, 오르쿠스에 들어왔고, 아자르의 손에 이끌려 수상해 보이는 숲에 들어왔었다.
그곳에 살던 최면을 거는 거미 괴 물?
그럼 그렇지. 뜬금없이 한참 전에 죽었던 부모가 나타나 이제는 행복하 자고 말하는 달콤한 상상이 현실일 리 없었다.
“으아아아아! 거미 징그라!!!”
“아니, 저 등신 새끼가! 지금 그런말 할 때야?! 정신 차렸으면 뭣 좀 해 봐!”
점점 록사의 몸을 조이는 굵은 거미 줄에 아자르도 당황했다.
공격력이 크지 않은 새끼 거미들을 수도 없이 만들어내는 것 빼고, 그다 지 강하지는 않은 마수였다.
다만 쉽게 마수를 처리할 수 있음에 도 망설였던 건, 록사 때문이었다.
[지금 이 녀석은 내 정신과 연결된 상태란다. 나를 죽이는 순간 동시에 이 애의 정신도 아주 깨져 사라지고 야 말지. 살지도 죽지도 않은 상태가 될 거야.]
대충 아자르의 무력을 알아본 거미 마수의 협박은 잘 먹혀들어갔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섣불리 마수를 죽일 수는 없었기에 록사의 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버티며 새끼들만 상대하던 아자르였다.
“너, 정신 다 제대로 차렸어?”
“아아아악! 거미 징그라! 징그랍다 고오오!”
“이런 미친.”
저 정신 나간 촉새와는 대화가 될 것 같지 않았다.
그 순간, 아자르는 거미 괴수의 눈 깔 아홉 개가 번뜩이는 걸 보았다.
[하는 수 없구나.]
거미 괴수는 실을 뽑던 주둥아리를 쩍 벌려 록사를 삼키려 했다.
아무래도 확실히, 록사와의 정신 연 결이 끊긴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살려두며 최면 걸던 록사를 죽일 요량으로 저리 입을 벌리지 않을 테니까.
빠르게 판단한 아자르가 순간 거미 괴수의 주둥이 앞으로 이동했다.
‘젠장, 늦었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지만 아자르는 본능적으로 늦었음을 느꼈다.
바로 몸을 뺀다?
그러면 록사는 죽겠지.
물러서지 않고 괴수의 주둥아리 안으로 검을 꽂아 처리한다?
그러려면 제 한쪽 팔을 내어놓아야 할 터였다.
이가 강한 놈은 아니 었지만 독이 있는 마수였다. 주둥이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녹색 독은 바닥에 닿자마자 땅을 녹일 정도로 강력했다.
‘젠장, 이 예쁘지도 않은 놈 때문에 내가 왜!’
길게 고민할 시간이 없었고, 아자르는 록사의 앞을 막아선 채 거미 괴수의 주둥아리 안으로 팔을 욱여넣었다.
“크윽……!”
동시에 그의 손에 들린 검이 괴수의 주둥이 안쪽으로 파고들어 머리통을 뚫었다.
[크아아아아악!]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거미 괴수가 몸부림 쳤다.
아자르의 팔뚝에 이를 박고 괴로워하던 괴수가 끝내 뒤로 나동그라졌 고, 허공에 매달려있던 록사는 힘없 이 추락했다.
“이 등신 새끼!”
떨어지는 록사의 몸을 받아 바닥으 로 내려온 아자르가 검 끝으로 그의 몸을 얽고 있던 거미줄을 쳐냈다.
“악! 조심히 혀라! 내 몸까지 베면 죽여블랑께!”
“입 닥쳐, 이 새끼야.”
험악하게 대꾸하면서도 아자르는 록사의 말대로 퍽 세심히 실고치를 갈라냈다.
겨우 자유로워진 록사가 벌떡 일어 나 호들갑 떨었다.
“악! 진짜 이게 뭔 고생이지라?! 하 여간 하데스 루버몬트, 고 인간이랑 엮여가지고 내 인생에 바람 잘 날이 하루도 없.”
서걱—!
조잘거리던 록사의 눈이 놀라움에 휘둥그레졌다.
찰나에 일어난 일이라 말릴 새도 없 었다.
실고치를 잘라낸 아자르가 검을 왼 손으로 쥐더니, 순식간에 제 오른팔을 잘라냈다.
“뭐, 뭐…….”
“지혈되게 뭐라도 붙여봐.”
고통에 이를 악문 채로 아자르가 록사에게 말했다.
“너, 뭐…….”
“빨리.”
태연하게 말하면서도 아자르는 생각이 많았다.
독이 퍼지면 죽음이었다. 팔을 자르는 빠른 판단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궁수인 자신이 팔을 잃었다는 건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활을 쏠 수 없는 건 물론이었고 왼 손으로 검을 쥐는 것이 고작이겠으나 그마저도 힘들 터였다.
‘빌어먹을.’
오르쿠스에 들어오자마자 이런 상 황과 맞닥뜨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러나 누굴 탓할 텐가.
욱하는 마음에 섣불리 록사를 끌고 들어오지만 않았어도 될 일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입술을 물고 고 통을 참는 아자르를 멍하니 바라보던록사가 천천히 다가왔다.
“등신 새끼 아니가? 내가 뭐라고 이 지랄을 다 했지라?”
“뭐?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딱!
록사가 허공 위로 손가락을 한 번 퉁겼다.
강한 마력이 아자르의 팔 부근으로 모여들었고, 잘린 부분에서 느껴지던 고통이 한순간에 사그라졌다.
언제 잘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생채기 하나 없는 온전한 팔이 다시붙어 있었다.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며 새로 붙은 팔을 바라보던 아자르가, 가만 히 록사에게로 시선을 틀었다.
얄밉게 실눈을 휘는 그 특유의 웃음 과 함께 록사가 말했다.
“나, 록사 트리볼트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