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여보……. 괜찮아요?”
“하모. 익숙혀. 그나저나 우리 아들 내미는 좀 어떻든가? 이번에는 비싼 걸로 먹였는디 어찌 좀 나을까 모르 겄네…….”
“아까 잠들었어요. 비싼 값은 하는 모양이에요. 편히 자요.”
“오오, 거 참말 다행이지라.”
“여보, 그런데 나…… 일 나가볼게요. 저번에 들었는데,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상한 일도 아니라고 그 랬어요. 그냥…….”
“아니, 이상한 일이든 뭐든 내가 당신 손에 어찌 물을 묻혀? 내일은 내가 더 열심히 일할라니께 자네는 아 들 좀 봐 주어.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하고. 알았제?”
“…….”
망설이는 어머니의 입을 막으며 아버지는 웃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긴 비참하게 남의 발치에 머리를 붙이고 침을 맞아도, 아내와 자식만은 그런 삶의 구렁텅이에 끌고 들어가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의지에도 결국 아슬아 슬했던 가족의 삶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지.
그냥 손 한 번 놓아버렸으면 되었을 쓸모없는 짐덩어리 때문에.
기어코.
“아.”
다시 한번 시야가 반전된 순간 록사는 병적으로 몸을 떨기 시작했다.
눈앞에 있던 어머니의 모습이 만신 창이였다. 뺨이 벌겋게 부풀어 있었 고 터진 입술에서는 피가 흘렀다.
앞섶이 찢긴 옷을 추스르며 어머니는 구석에 몰려 벌벌 떨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록사의 고개가 돌 아갔다.
“꺼져, 이 빌어먹을 새끼들아! 약속을 지켰는데도 왜 이 행팬데! 꺼져 라! 당장 나가라고!”
빚쟁이들의 얼굴은 이전과 같았지만 아버지의 태도는 달랐다.
처음부터 저 무뢰한들의 목적은 어머니였을 것이다. 깡촌 영지와는 어 울리지 않는 귀족 출신 여인을 얼마 나 오랫동안 음험한 시선으로 노려왔을이지, 보지 않아도 뻔하고 식상한 이 야기였다.
“이게 미쳤나!”
술까지 들이켠 무뢰배들은 의자를 휘두르며 난동 부리는 아버지의 모습에 폭발했다.
언제나 머리 조아리고 비굴하게 손 만 비빌 줄 알던 놈이 반항하는 꼴이 아니꼬웠겠지.
결코 우발적인 행동은 아니었을 테다. 돈 없는 버러지 하나쯤, 죽어 없 어져도 상관없다 여겼을지도.
“아부지!”
반사적으로 튀어나간 록사가 그들 사이를 막아섰지만, 이번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록사의 몸을 그대로 통과한 한 사내의 손에는 번뜩이는 단도 하나가 들 려 있었다.
“컥!”
외마디 비명과 함께, 놀라 눈을 치 뜬 록사의 고개가 뻣뻣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 또.
꼭 정말로 마주 보고 있는 것처럼 아버지의 마지막 시선이 정확히 록사의 시선과 맞물렸다.
시퍼런 날붙이가 그의 목에 꽂혀 있 었다.
“아부, 지…….”
보랏빛 눈동자는 한순간에 빛을 잃 었다.
어렸을 때는 본 적 없던 아버지의 낯선 얼굴. 겨우 마주하게 된 그 얼굴 이, 이런 마지막이라니.
“아, 아…….”
당황한 사내들이 주춤거리다 우르 르 가게를 빠져나갔고, 록사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을 감지도 못한 채로 죽어버린 아버지의 시체 가까이로만신창이가 된 어머니가 엉금엉금 기어 다가왔다.
“여, 여, 여보…….”
“왜…….”
“아아아아!”
“그니까 왜…….”
“여보……!”
“그러니까 시발! 왜!”
록사의 비명이 어머니의 오열뿐인 작은 공간 안에 울려 퍼졌다.
울부짖는 록사의 시야에 어린 시절의 자신이 잡혀들었다.
소란에 1층으로 내려온 작은 아이는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모르고 구 석에서 숨 죽여 벌벌 떨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 버러지 같은 새 끼!”
록사가 미친 듯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미칠 듯한 살인 충동이 일었다. 그 게 어머니를 욕보이 려 하고 아버지를 죽였던 이들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 에게 향한 것이 참 아이러니했다.
록사는 만질 수도 없는 작은 어린아이의 목을 붙잡기 위해 손을 허우적거리며 소리 질렀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태어났으 면 시발, 구질구질하게 살려고 하지 말고 뒈졌어야지!”
“아가…….”
“어, 어무니…….”
미친 듯 울부짖던 록사가 허망하게 주저앉았다.
엉금엉금 기다시피 어린 록사에게로 다가온 어머니는 그를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아무,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 일도 없었어. 오, 올라가서 자. 자자, 우리 아가. 미안해. 흐으…….”
“어무니, 아, 아버지, 아버지는예? 아버지는 어디 계셔라?”
네가 죽였잖아.
아버지를 죽인 게 저놈들이라고 생 각해?
아니.
너야.
네가 죽였어.
“네가…….”
그 순간, 분노로 중얼거리던 록사의 뺨에 무언가가 사르륵 닿아왔다.
익숙한 어머니의 냄새가 났고, 왜인 지 앞이 보이지 않았다. 시야를 가린 천 때문이었다.
“아…….”
손을 들어 치워낸 천은 어머니의 치 맛자락이었다.
“이런, 시발…….”
어느새 또 반전된 시야.
결국 록사는 이 비극의 결말까지 보 고야 말았다.
천천히 그의 고개가 올라갔고, 그곳 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굵은 밧줄에 목을 매단 어머니의 생 기를 잃은 몸은, 축 늘어진 채 흔들거 리고 있었다.
이것은 록사 트리볼트가 태어나 처음으로 본, 광경이었다.
“어무니, 어디 계셔예?”
눈앞에 어머니의 목매단 시체가 있 다는 사실도 모른 채 어린아이는 잠에서 깨어나 한 발짝, 두 발짝 걸음을 내디뎠다.
문을 찾아 나서 려 던 아이의 뺨에 어머니의 치맛자락이 스쳤을 때.
그때에야 아이는 비로소 깨달았다.
“아…….”
쓸모없는 새끼도 새끼라고 끝끝내 놓지 못했던 그들을, 결국에는 자신 이 잡아먹고 말았음을.
“어, 어머…… 어머니!!!”
아마 그때 처음으로 생각했었지.
아, 그냥 뒈질걸.
매일 밤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아프다고, 살고 싶다고, 살려 달라고 허튼 소리 지껄 이지 말걸.
살고 싶어 하는 자식을 안쓰러워하는 마음 따위 느끼지 못하도록, 그냥 삶에 미련 없는 척할걸.
“이미 늦었지라. 이 버러지 새끼 야.”
오열하는 어린아이를 바라보며 록사는 허망하게 웃었다.
부모를 잃고, 이제 죽어 없어질 미래만 남겨두고 있을 줄 알았던 저 작 은 아이의 다음 이야기는 놀랍도록허무했다.
약해빠진 아이의 생명력은 징그러 웠다. 기어코 살아남아 부모까지 잡 아먹은 난 놈이니 당연한 말인가.
남들은 천천히 개방된다는 마력이 한순간, 그것도 폭발적으로 방출되는 경험은 아팠던 몸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정말로 한순간이었다.
창조.
그 대단한 능력은, 한 발 늦게야 아이를 살렸다.
아버지가 비참하게 누군가의 발치에 머리를 조아리기 전에, 어머니가 고통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
그 전에, 이 대단한 힘을 갖게 되었 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운명은 참으로 야속했다.
록사 트리볼트가 처음 만들어낸 것은 눈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어 상상만으로 떠 올리던 세상은, 처음부터 비극이었다.
대롱대롱 매달려 흔들리던 어머니의 시체.
작은 키로 이미 죽은 어머니를 끌어내리려 몸부림치던 어린 자신.
“하하하…….”
“야.”
순간, 어머니의 발치를 붙잡고 울던 어린아이가 정확히 록사를 직시하며 그를 불렀다.
아이는 히죽 웃었다.
“오래되었다고 잊은 건 아니지? 이 거 봐. 네가 죽인 어머니의 모습이 야.”
“…….”
“너, 왜 아직까지 살고 있어?”
어린 록사는 보랏빛 눈을 번뜩이며가까이로 다가왔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 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버러지처럼 억지로 살다가 어머니 도 아버지도 다 죽여 버렸잖아. 그래 놓고 아직까지 살아있어? 왜?”
“그러게.”
“살아서 뭐 하려고?”
“……그러게.”
“도와줄까? 네가 지은 죄는 갚아야 할 게 아니니?”
아이가 살짝 고개를 끄덕인 순간, 또 시야가 반전되었다.
눈부신 햇살 아래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평 화로운 그곳에는 단란한 가족의 모습 이 있었다.
어린 록사를 목마 태운 아버지와, 아름다운 어머니.
행복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록사의 눈이 놀라움에 커졌다.
아버지와 마주 보며 웃던 어머니가 록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가, 이리 온.”
“……어머니.”
주저앉은 몸을 일으킨 록사가 미친 듯 달려 나갔다.
몇 번을 허우적거리고 비틀거렸던 걸음이 겨우 그들과 가까워졌다.
“우리 아가. 오랜만이야.”
“어머니…….”
“이제 여기서 행복하게 살자. 알겠 지?”
“네, 네…….”
“이것 봐. 이제 여기서는 네 능력으 로 뭐든 해줄 수 있어.”
아버지의 목에 타고 있던 어린 록사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해드리고 싶은 게 많았잖아. 지금 해드려.”
“아…….”
망설이던 록사는 대뜸 손 위로 돈뭉치를 만들어냈다. 지폐들이 한 장, 두 장 생겨나기 시작하다가 종국에는 묵 직한 금화들도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 졌다.
“저, 저……. 어무니, 이거, 이거 보 셔라. 어, 어무니 항상 입버릇처럼 잡 숫고 싶다 말하시던 그, 그거 뭐였지 라. 제가 그것도, 그것도…….”
“어머, 우리 아들. 언제 이렇게 부 자가 되었어? 하하…….”
어머니는 상냥하게 웃으며 록사를 끌어안았다.
눈물이 났다. 다시 만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던 어머니의 품은 놀라울 정도로 따뜻해서.
“엄만 이런 거 없어도 괜찮아. 그냥 우리 아들을 다시 본 것만으로도 행 복해.”
“어무니…….”
“아들, 저어 위까지 누가 더 빨리 가나 시합 안 해볼래?”
아버지는 록사의 어깨를 다정하게 툭 치며 멀리 언덕 위를 가리켰다.
“예, 예…….”
황망한 얼굴로 록사가 눈물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행복하지?”
어린 록사가 물었다.
“……그러네.”
어머니의 품에 안긴 채, 록사가 대 답했다.
“바보야. 이렇게 좋은데 왜 꾸역꾸 역 살려고 했어? 빨리 여기로 오지.”
“그러게…….”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왜 악착같이 살려고 했더라?
처음에는 저 때문에 평생을 구질구 질하게 살았던 부모의 삶에 화가 나 서였지.
다시금 누군가에게 폐 끼치기 싫고 약해지기 싫어서, 아파지면 걱정 없 이 약을 살 수 있는 그런 삶을 살려 고 그냥 목적 없이 돈을 벌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러고 보니 딱히 꾸역꾸역 살아 야 할 필요는 없었지.”
괜히 머리 복잡해질 필요는 없었다. 록사는 아주 간단하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