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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엄마가 되어버렸다-166화 (166/221)

166화.

놀란 내가 황급히 옆에 앉은 아벨의 눈을 가리며 그를 안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어린아이 앞에서 주먹을 휘두를 생각은 없는지, 아자르의 팔은 허공에서 멈췄다.

“너, 이 개새끼…….”

그들의 사정을 다는 모르지만, 아마 록사는 아자르의 역린을 건드려도 제대로 건드린 듯했다.

만난 이후 가장 무시무시한 표정으 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아자르가 입술을 씹으며 말했다.

“오늘…… 너 죽고 나 죽어보자.”

“아, 아자르!”

아자르는 진심으로 화가 난 모양이 었다. 그는 록사의 멱살을 잡은 채 질질 끌며 걸음을 옮겼다.

록사는 반항도 않고 그대로 끌려가 기 시작했다. 내가 황급히 둘을 따랐다.

“그러지 마세요! 지금 우리끼리 이 럴 때가 아니란 말이에요!”

아자르의 걸음은 빠르기도 빨랐다. 안 보이는 곳에 가서 주먹질이라도 할 생각인지,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있 던 숲길로 성큼성큼 향했다.

“어, 어머니! 같이 가요!”

모래밭에 푹푹 빠지는 내 걸음은 아자르와 달리 느려도 너무 느렸다.

끝내 숲 사이로 들어가 버린 둘을 나는 못 잡았고, 하는 수 없이 따라 들어가려던 순간이었다.

“아…….”

키가 큰 나무들이 양옆으로 빽빽이 자란 숲길에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나는 놀라 멈추었다.

아자르와 록사의 모습이 바로 눈앞에서 마법처럼 지워졌기 때문이었다.

“이, 이게 무슨…….”

깊이 들어가지만 않으면 될 줄 알았 는데, 착각이었다.

어쩐지 수상해 보이던 그 ‘입구’는, 단순한 숲이 아니라 역시 오르쿠스의 관문이고 이공간이었던 거다.

순식간에 둘을 삼켜버린 숲을 허망 하게 바라보던 나는, 어느새 옆에 따라와 선 아벨을 내려다보았다.

그도 나만큼이나 놀란 표정이었다.

세상에나. 이를 어쩌지.

“부인, 거기서 뭐 하십니까?”

돌아보니 뒤늦게야 돌아온 미하일 이 데보라를 안은 채 내게 묻고 있었다.

사라진 둘을 찾는지 의아해 보이는 표정의 미하일과 데보라를 바라보며, 나와 아벨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짐덩어리 같은 느이 동생들 기냥 편 하게 뒤져부는 게 맞았어야.

짐덩어리 같은…….

그래, 짐덩어리 같은 나는 그냥 죽어버리는 게 맞았다.

록사 트리볼트는 아주 오랜만에 재 미없는 회상에 잠겼다.

아자르에게 유감은 없지만 그에게 한 말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건 아니었지만 일단 태어났다면 남에게 폐 끼치 고 살지는 말아야 할 것이었다. 그게 록사 트리볼트의 생각이었다.

“이거이 뭐시랑가…….”

끌려오자마자 한 대 맞고 시작할 줄 알았는데 웬걸.

무슨 조화인지, 달이 세 개나 떠 있 어도 어두웠던 주위가 어느새 밝아져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시장 거리는 한낮이었다. 아무래도 오르쿠스는 아닌 듯했고, 찬찬히 살펴보니 록사의 기억 속에도 있는 장소였다.

“지랄도 풍년이네.”

우두커니 서서 중얼거리는 록사의 앞에는 낡은 집 한 채가 있었다.

다 떨어진 간판을 내건 그곳은 술과 음식을 파는 가게였고 2층은 주인들의 가정집이었다.

록사는 그곳을 아주 잘 알았다. 이 집의 2층, 낡은 침대 위에는 매일 피 섞인 기침을 토하는 장님 아이가 살 았으니까.

“이게 뭔 조화여?”

당황스러웠지만 그보다는 문을 열 고 들어갔을 때 혹시나 볼 수 있을지 도 모를 얼굴이 기대되었다.

급히 문을 열자 북적이는 가게의 내 부가 보였다.

제국 남부의 시골 영지, 파르고니아.

가난한 상인들이 하루 벌어 하루 먹 고 사는 이 영지의 작은 음식점은 록사의 어린 시절 집이었다.

“주인장! 여기, 여기!”

“옙 지금 가고 있지라!”

길게 기른 하얀 머리를 위로 질끈 묶은 주인은, 양손에 접시 서너 개를 겹쳐 든 아슬아슬한 모습으로도 용케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울컥, 록사의 가슴 위로 무언가가 치고 올라왔다.

“아부지.”

한 걸음에 남자에게로 달려간 록사 가 그를 불렀고, 마주 오던 남자는.

“아…….”

록사를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아니, 정확히는 록사의 몸을 그대로 통 과해 지나갔다.

멍하니 선 록사가 제 손을 들어 내 려다보았다.

손이 희미해져서 색이 사라졌다 돌 아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에야 록사는 깨달았다.

그는 그리운 그 시절로 돌아온 게 아니었다. 괴로운 그 시절을 다시 두 고 보아야 하는 상황일 뿐이었다.

“진짜지랄도 풍년이지라.”

뒤돌아 아버지의 모습을 가만히 지 켜보던 록사는 성큼성큼 2층 계단을 올랐다.

낡은 문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기침 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볕이 잘 드는 유일한 방에는 작은 침대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여섯 살 남짓한 사내아이가 누워있었다.

“아들, 괜찮아?”

아이, 록사의 어머니는 그를 간호하는 데에 거의 하루 종일을 보내곤 했다.

파르고니아 출신이 아닌 중부 소영 주의 막내딸이었던 어머니는 사실 이 렇게 구질구질한 삶을 살 팔자도 아니었다.

하필이면 영문도 모를 병에 걸려 태 어난 짐덩어리 같은 장님 아들을 돌 본답시고 그녀는 기꺼이 청춘도 젊음 도 내려놓았다.

참으로 재미없는, 이야기였다.

“여보! 혹시 아들 좀 괘안나? 오늘손님이 많아서리…….”

“어, 여보! 미안해요! 금방 내려갈 게요.”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순간, 록사가 흠칫했다.

자길 볼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이 상하게도 마주친 시선이 가슴을 미어 지게 만들었으므로.

“아들, 미안해. 아빠 좀 도와주고 금방 다시 돌아올게. 혼자 있을 수 있 지?”

“으으…….”

“미안, 미안해.”

뭐가 저렇게 미안한 걸까.

록사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다.

연신 사과하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 음으로 방을 나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에, 록사는 오랜만에 분노했다.

그는 이 이야기의 끝을 알고 있었다.

나름대로 입에 풀칠하며 도란도란 살 수 있었던 부부는, 병명도 모르는 아들의 약값을 대기 위해 힘들게 살 다가 비참하게 죽었으니까.

그들은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있었는 데. 하루가 멀다고 피를 토하는 짐덩어리 같은 자식을 포기만 했으면 될 일이었다.

“그냥…… 그냥 뒤져브러. 응?”

록사는 침대 위에서 끙끙 앓고 있는 어린 날의 자신을 바라보며 괴로운 눈으로 중얼거 렸다.

돌연 그가 침대 위의 어린아이에게 로 달려들어 목을 졸랐다.

시간의 결이 다른 존재와는 물리적 인 접촉이 불가했지만, 그걸 알면서 도 록사는 부질없이 계속, 계속해서 어린아이의 목을 조르며 울부짖었다.

“지발! 지발! 그냥 뒤져브러! 엉? 니놈 새끼 낳은 죄밖에 없는 우리 아 부지랑 어무니 잡아먹지 말고! 이 빌어먹을 새끼야! 지발 그냥! 뒤져부리 라고!”

어느새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그는 계속해서 소리 질렀다.

“왜! 이 시발! 쓸모없는 새끼! 왜, 왜……. 뭐 하러, 시발…… 태어나가 지고, 기어코…….”

한순간, 그의 시야가 반전되었다.

어느새 록사는 불 꺼진 가게의 1층에 놓여있었다.

아버지가 보였다. 그는 험상궂은 표 정과 큰 덩치의 사내들 앞에 무릎 꿇 고 앉아이마를 바닥에 붙인 채로 빌 었다.

“하유, 지송하지라. 시간을 쫌만 더 주시믄 지가 어떻게든 이것저것 팔아 가지고 얼른 돈을 마련해볼라니 께…….”

“같은 소리만 몇 번째여? 뭐, 우리는 땅 파서 장사혀? 이번 달에는 두 배로 빌려갔자네?”

“하이고, 선생님. 지송혀라. 우리사정 아시잖어예. 이번에는 꽤 좋은 약이어가지고 아들내미도 많이 나아 졌어라. 조금만, 조금만예…….”

손이 닳도록 비는 아버지의 얼굴에는 그늘이 가득했다.

장님이었던 어린아이는 본 적 없는 과거의 비극.

2층에서 숨죽여 입을 틀어막고 귀 로만 들었던 이 비참함을 뜬 눈으로 마주하는 것이 괴로웠다.

록사가 무서운 얼굴로 아버지의 팔을 붙잡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시발! 청승 엔만히 떨고 일어나셔라! 와, 대체 와 이리 구질구질하게 염병 지랄을 떨고 있는데예! 시발! 그냥! 그냥 돈 없으면 뒈지라고 놔둬 블믄 될 거 아녀라! 좀!”

빚쟁이들이 머리 위로 침을 뱉어도 그의 아버지는 마냥 생글생글 웃었다.

록사는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런 시발, 옘병할 것들이나 보 여주고 지랄인디! 보고 미안해라도 하라고 그랍니까! 안 그래도, 시발, 충분히…….”

아무리 만지려고 해도 닿지 않았다. 허공 위로 손을 허우적거 리며 록사가 무릎 꿇은 채 무너졌다.

“……미안해서, 아직까지도, 하루 하루 죄스럽게 살고 있는데, 와 이러 냐고예…….”

“여, 주인장. 돈이 없으믄 몸으로라 도 때워야지 않겄소. 피차 닦달하는 우리도 맴 아프고 그란께는, 저번에 말했던 거 잘 생각해 보랑께?”

험상궂은 얼굴의 사내는 쪼그려 앉 아 아버지의 어깨를 살살 어루만졌다.

꼭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는 눈빛으 로, 그는 구석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어머니였다.

결말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비극.

더 울고 소리 지를 힘도 남지 않아 서, 록사는 무슨 뜻을 담고 있는지 뻔한 남자의 말에 그저 허망하게 웃음 지었다.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 억지로 웃으 며 그들을 밀어냈다.

“생각해주셔서 정말 감사하지라. 한데 조금만 시간을 주셔예. 다음 기한까지는 꼭, 준비해 놓을 테니까 예…….”

빚쟁이들은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 로 마지막까지 아버지의 얼굴에 침을 뱉고 떠나갔다.

“하, 하하…….”

너무, 너무 괴로워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록사가 뱉는 헛웃음이 허공 위로 스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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