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마지막 문제가 제일로 쉬웠네예~! 못 맞춘 바보 없지라?”
킬킬거리는 록사의 목소리가 공허 한 주변으로 넓게 울려 퍼졌다.
지옥의 첫 관문, 문지기 세세푸우의 마지막 문제는 참으로 쉬웠다.
문제를 세 개씩이나 낸 건 너무했지만 세세푸우는 그래도 자기 말을 지켰다.
곳곳에서 외치는 ‘하데스 루버몬트’의 이름에 그는 군말 없이 오르쿠스로 향하는 입구를 열었고, 우리는 비로소 ‘살아있는 존재’로서 지옥 땅을 밟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이곳.
“한데 생각보다 너무 평범해 보이는 건…… 제 생각만은 아니겠지 라?”
오르쿠스.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영혼들 과, 죽은 마수들이 얽매여 환생하지못하고 영원을 살아가는 곳.
그 끔찍한 악명과는 달리 오르쿠스는 지상의 세계와 별다를 것 없어 보였다.
다른 게 있다면, 낮이 올지 안 올지 확신할 수 없는 밤에 휩싸여 있다는 것과, 하늘 위에 세 개의 달이 일자로 떠 있다는 것뿐.
오르쿠스에 들어가면 바로 가이오니아를 만날 수 있냐는 우리의 질문에 세세푸우는 대답했었다.
「나도 오르쿠스가 어떻게 생겼는 지 알지 못한다. 다만 확실한 것은 오르쿠스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시 련’의 집합소라는 사실이지. 모두에게 시련은 다르게 적용되는 법이다. 너희들이 마주할 시련을 나는 알지 못한다. 같은 시련을 지나간 인간도 없을 테지.」
「시련은 각각 인간들의 가장 취약 한 부분을 건드린다. 그러고 보니 궁 금해지는군. 그 오만한 인간은 어떤 시련을 겪으면서 괴로워할지.」
애매모호한 그의 말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오르쿠스에 들어온 지금도.
우리가 오르쿠스에 들어서자마자 본 건, 그저 입구와 다름없이 광활히 펼쳐진 끝없는 지평선뿐.
도무지 어디로 가야 할지 짐작도 할 수 없었지만, 다행히 이정표는 있었다.
풀 한 포기 없는 주변과 달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칙칙한 나 무들이 이룬 숲이 덩그러니 우리 앞에 있었으므로.
심지어 입구랍시고 갈라져 길까지 나 있었으니, 누가 봐도 ‘이곳으로 들 어가시오.’ 하고 알려주는 듯했다.
한시가 급했지만 우리는 망설였다.
바람 한 점 없는데도 어두운 숲에서는 키 큰 나무의 잎사귀들끼리 부딪 치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들려왔다. 마치 슬프게 오열하는 여자의 울음소 리 같았다.
“일단은 생각을 좀 해보고 들어가는 게 어떻겠어라? 제가 챙겨온 물약 도 있으니까네 천천히 취향 맞는 걸 로 좀 나눠 갖고…….”
섣불리 들어가기를 주저하던 우리는, 록사의 제안에 냉큼 멈추어 섰다.
하데스의 서재에서 나올 때부터 소중히 들고 있던 록사의 꾸러미.
그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묵직한 그 것을 펼쳐 열며 바닥에 덜렁 주저앉 았다.
꾸러미 안에서는 각양각색의 빛을 내는 물약들이 쉴 새 없이 나왔다.
아벨과 데보라가 눈을 빛내며 록사의 곁으로 가 그것들을 구경했다.
잠시 그들을 지켜보던 나는, 문득 말없이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미하일을 발견했다.
그는 왜인지 흔들리는 눈으로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세개의 달이 빛나고 있는 오르쿠스의 밤하늘을.
내가 그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왜 그래?”
홈칫 놀라며 미하일이 나를 돌아봤다.
“아니,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누구 앞에서 뭘 숨기려고? 표정 심각해, 너.”
“아냐.”
“…….”
미하일은 더 말하지 않고 침묵했다.
어차피 물어도 대답하지 않을 듯해, 나는 더 묻지 않고 그냥 그의 옆을 지켰다.
그는 한참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다가 데보라에게 손짓했다.
“데보라 사제.”
록사의 곁에서 약을 구경하던 데보라가 귀를 쫑긋하며 얼른 우리 곁으 로 달려왔다.
“웃챠.”
다가온 데보라를 번쩍 안아든 미하일이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잠깐 우리 사제님과 얘기 좀 나누고 오겠습니다. 금방 돌아올게요.”
이미 연기 따위 부질없어진 마당에 왜 천사 같은 표정인가 의아했지 만…….
미하일은 태연한 얼굴 뒤로 초조한 마음을 감춘 채 데보라를 안고 내게 서 멀어졌다.
그의 뒷모습이 왠지 걱정스러웠다.
***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일행과 멀어진 미하일의 표정은 굳을 대 로 굳어 있었다.
가만히 미하일의 품에 안겨있던 데보라가 위로하듯 그의 목덜미에 뺨을 비 비적거렸다.
“왜 그러세요, 대신관님?”
“데보라 사제.”
“네.”
“많이 놀랐죠. 내게 묻고 싶은 것도 많을 테고…….”
당연한 말이었다. 천사 같았던 미하일이 꼭 몸속에 다른 영혼이라도 들 어간 듯 난폭하게 굴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보라는 그런 미하일에게서 전혀 괴리감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이게 그의 본모습이었다는 추측이 거의 확신에 가까워졌고, 그 사실이 딱히 싫다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시정잡배 같은 말투나 험악한 표정 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미하일과 전 혀 달랐지만, 그 속만은 자신이 알던 미하일이 분명했기에.
‘솔직해진’ 그의 모습이 어색했지만 마음에 들기도 했다.
데보라는 고개 저으며 대답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으 셔도 돼요. 그치만 제가 대신관님을 사랑하는 건 변함없어요. 걱정하지마세요.”
“…….”
데보라를 안은 미하일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겨우 쥐어짜듯 입을 열어 말했다.
“고맙습니다.”
“네에.”
“부탁이 있어요, 사제. 염치없지만 들어줄 수 있나요?”
“부탁이요? 네에.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요.”
“사제만이 해줄 수 있는 거예요.”
빙긋 웃은 미하일이 품에서 데보라를 내려놓았다.
고개를 갸웃하는 데보라와 무릎 굽 혀 눈높이를 맞춘 미하일이 잠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는 제 의지로 마력을 묶어 봉인하는 중이었다. 몸에 휘돌던 마력들이 억지로 제어되는 순간, 가슴 위로 찌릿한 통증이 일었다.
감았던 눈을 뜬 미하일이 천천히 심 호흡했다.
“제가 꼭 지니고 다니라고 사제에게 줬던 것, 갖고 있지요?”
미하일이 묻자 망설이던 데보라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하얀색 손잡이에 금자수가 놓인 작 은 단검.
위협적인 용도의 물건치고는, 그 생김새가 지극히도 고귀해 보였다.
데보라의 작은 손에 들린 단검을 가 만히 바라보던 미하일이 고개를 들었다.
세 개의 달이 떠오른 하늘.
수백 번, 기억하는 고통의 삶. 영원의 시긴을 살아오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억에는 분명, 달이 세 개 뜬 하늘이 남아있었다.
「컥, 제바…….」
「살려, 줘…….」
만신창이가 된 몸. 젖은 얼굴.
기억 속의 연인은 또 자신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아주 잔인하고, 끔찍하고, 치욕스럽게.
아니, 아마도 이번에는 제 연인이 아닌 형제 제누스였을, 아이샤.
선명하게 읽히던 끔찍한 미래.
그것을 피해가고자 미하일은 이번 생에서도 그녀의 목숨을 먼저 가져가 기로 결심했지만, 결국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도 아버지를 먼저 죽이면, 일 어나지 않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결국은 이렇게 되는군.’
미하일은 씁쓸하게 웃었다.
밤이 드리운 오르쿠스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절망했다.
그 충격적인 미래에서 미하일이 기 억하는 건, 비단 고통스러워하는 아이샤의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하늘에 떠오른 세 개의 달.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아이샤를 죽였던 미래가 언제, 어디에서 펼쳐지는이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단 하나는 확실했다.
그 밤하늘에는 세 개의 달이 떠있었 으며 자신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 지 못했다.
‘이곳이었다니.’
아마 비극은, 가이오니아를 만나러 가기도 전에 일어날지도 모른다.
아니, 거의 확실했다.
상념에 잠겨있던 미하일이 걱정스 러운 듯 손을 잡아오는 데보라의 온 기에 빙긋 웃었다.
“이런 부탁을 하려니 너무 미안하 지만, 들어줄 수 있는 게 사제뿐이에요.”
“네에. 꼭, 꼭들어드릴게요.”
불쌍한 아이.
너에게 지은 죄도 어떻게든 갚아야 겠지.
미하일은 천천히 입고 있던 사제복의 목깃 단추를 두어 개 끌렀다.
앞섶을 벌리고 내보인 순간, 데보라의 눈이 놀라움에 휘둥그레졌다.
“…….”
흑색의 핵석. 저주받았다는 증거.
아직 어린 데보라였지만 그것이 무 언지 모를 리 없었다.
“대, 대신관님…….”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괴물이 될 거예요.”
“……네?”
“착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끝내 죽이고야 마는 무서운 괴물 말 이에요.”
“대, 대신관님이 왜요? 왜?”
“우리의 아버지께서 나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
데보라가 숨을 참은 채 경악했다.
“사제, 공작부인은 나의 오랜 형제랍니다.”
“…….”
“지금까지 수도 없이 이 손에 피를 묻혀왔지만, 사실 나는…….”
미하일의 목소리가 천천히 젖어 들 어감과 동시에 데보라의 눈에도 눈물 이 고였다.
“……아직도, 전혀, 익숙해지질 않 았어요.”
“대신관님…….”
우는 미하일의 목소리가 뭉개질 대 로 뭉개졌다.
데보라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일그 러진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소중한 사람을…… 내 손으로, 죽여야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끔찍한 지…… 잘, 압니다. 그래서 사제에게 더 미안합니다.”
“…….”
“그렇지만 너무, 너무 고통스러워 서요. 사랑하는 연인을 죽이는 걸로 도 모자라 오랜 세월을 나눈 내 형제까지 죽이고 나면, 나는 정말, 미치고 말 거예요.”
미하일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고여 있던 눈물이 기어코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대신관님…….”
데보라의 작은 손이 미하일의 뺨을 훔쳤다.
“부디, 데보라 사제. 기어코 이 죄 인이 끔찍한 괴물이 되어버리면, 말 이에요. 그때…….”
미하일이 단검을 쥔 데보라의 손을 잡고 천천히 제 가슴께의 핵석 위로 끌어올렸다.
죽이기 전에는 죽을 수도 없는 저주받은 몸뚱이였지만, 놀랍게도 칼끝이 살짝 닿은 핵석에서는 아무런 거부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
“……내게 안식을, 선물해줄 수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