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이야, 형?”
“겁도 없군.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런 정신 나간 짓거리를 한 건지.”
“누군지는 모르지만 꽤 대단한 사람이란 건 알지. 이를테면 문두스를 받치고 서서도 날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그걸 알면…….”
“그렇지만 날 죽이고 나면 문두스는 영원히 형이 받치고 서 있어야 할 텐데. 뭐, 이 불쌍한 아이들이 다 죽 어도 상관없다면야…….”
“아, 아틀라스. 우리 죽어? 사, 사과 먹으면 어른 될 수 있잖아. 어른 되면 문두스로 갈 수 있잖아.”
아틀라스의 옆에 서 있던 어린아이 가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물었다.
아틀라스는 다정한 표정으로 아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당연히 어른 될 수 있지. 이 사과 먹으면.”
붉은 사과를 아이의 눈앞에 대고 흔 들던 아틀라스가 빙긋 웃었다.
“근데 내 몫 하나뿐이야.”
“으응?”
그 꼴을 지켜보고 있던 하데스가 실 소를 터뜨렸다.
아.
황금 사과를 따올 수 있었음에도 붉 은 사과를 따온 건, 자신을 계속 이곳에 묶어두기 위함이 었던가.
아이들이 모두 자라고, 전부 문두스 로 가고 나면 하데스는 더 이상 그것을 짊어질 필요가 없어질 테니까.
‘멍청했군.’
아주 오랜만에 생각 없이 행동했다. 뭐에 홀린 건지.
하데스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절망에 빠져 우는 아이들의 앞에서 아틀라스가 사과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미안. 그렇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 어. 평생 그걸 짊어지고 살 순 없잖 아.”
아틀라스가 또 한 번 비죽 웃음 지 었다.
***
아직 뭘 모르는 어린아이들이라서 인가.
절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이들은 다시 부지런히 맨손으로 마른 밭을 갈고 물을 길어와 나무를 가꾸기 시작했다.
죽은 이후 이곳에서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으므로, 아주 당연한 일을 계속 하는 것처럼.
여전히 문두스를 떠받치고 있는 하데스의 옆에는 시냐가 웅크린 채 힘겹게 떨고 있었다.
상처가 꽤 깊어 보였다.
“꼬맹아.”
“하아……. 네에.”
“여기, 내 옷 안쪽에 약이 있다. 하얀색 약병을 찾아서 마셔라. 그럼 상 처가 바로 나을 테니 까.”
“……전, 괜찮아요.”
“시간 없으니 빨리.”
하데스가 단호하게 눈을 부릅뜨자 시냐가 흠칫했다.
곧 비척비척 몸을 일으킨 시냐는 하데스의 옷 안쪽에서 백속성 물약 하 나를 찾아 마셨다.
곧바로 복부의 상처가 아물었다.
“이제 괜찮나?”
“네, 네…….”
“됐어. 그럼 거기 앉아있어.”
“저, 지금 그냥 가세요. 어차피 방 법이 없어요.”
“아니, 있어.”
하데스의 시선이 팔자 좋게 드러누 운 아틀라스에게 날카롭게 가 닿았다.
팔베개를 하고 누운 채 하늘을 올려 다보며 아틀라스는 이따금씩 콧노래를 훙얼거렸다.
한 시간 남짓 흘렀을 뿐인데도 아틀라스의 몸은 훌쩍 자라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사과를 한 입 더 베 어 문 아틀라스가, 무료했는지 몸을 일으켜 하데스에게로 다가왔다.
“형, 무거워?”
“말이라고 하냐?”
“겨우 한 시간 들어놓고 엄살은.”
“넌 내가 검만 쥐면 죽는다.”
“헤에……. 그거 말이야?”
하데스의 발치 옆에 굴러다니는 검을 가리키며 아틀라스가 큭큭 웃었다.
“내려놓게? 이 불쌍한 아이들이 다 깔려 죽을 텐데?”
“…….”
“헤헤……. 처음 우릴 도와준다고 할 때부터 느꼈지. 형은 이 아이들이 죽는 거, 절대 못 봐. 그냥 나 대신, 영원히 그거나 짊어지고 있어. 난 몸 이 다 자라면 가볼 테니까.”
으득, 분한 듯 이를 가는 하데스를 보며 아틀라스가 좋다고 웃었다.
다시 콧노래를 훙얼거리며 멀찍이 드러눕는 아틀라스를 빤히 응시하던 하데스가, 옆에 앉은 시냐에게 말했다.
“꼬맹아.”
“네.”
“지금부터 저 애들을 전부 나무 오 른편으로 보내 놔라. 황금 사과는 따 자마자 심어놓고, 다시 내 쪽으로 오 도록 해.”
“……네?”
“시간 없으니 더 묻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아무도 죽게 두지 않을 거다. 저 미친놈도 마찬가지고.”
한가로이 누운 아틀라스를 죽일 듯 노려보며 하데스가 비죽 웃었다.
“감히 이 나를 속인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해야지. 그냥 죽이는 건 너무 자비로우니 말이야.”
왜인지 무시무시해 보이는 하데스의 표정을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던 시냐가, 주먹을 꼭 쥔 채 자리에서 일 어났다.
하데스의 계획은 잘 모르겠지만 일 단은 시키는 대로 해볼 생각이었다.
멀리서 아이들을 움직이는 시냐를 바라보던 하데스의 시선이 우두커니 선 나무에 가 닿았다.
‘진작 이렇게 할걸.’
풍속성 물약도 없고, 이제는 아틀라스가 아니면 꼭대기에 열린 열매를 딸수 없다.
그렇지만 굳이 저 꼭대기까지 오를 필요가 뭐 있겠는가. 그냥 나무를 부 러뜨리면 될 일인데.
만약 아틀라스를 의심부터 했다면, 항상 냉정한 판단을 내리는 하데스는 처음부터 이렇게 했을 테다.
한데 말려들고 말다니…….
하데스는 자신이 멍청하게 굴었음을 아주 담백하게 인정했다.
‘그래도 뭐.’
시간을 낭비한 건 아쉬웠지만 이 오르쿠스의 관문들이 생각보다 만만찮 음을 깨달았으니 이것은 이것대로 다 행이리라.
“형, 뭐 해?”
아이들을 옮기는 시냐의 움직임이 수상쩍었는지, 아틀라스가 일어나 하데스에게 물었다.
그는 벌써 성인 남성의 키만큼 훌쩍자라 있었다. 얼굴에도 세월의 흐름 이 새겨져 있었다.
하데스가 웃으며 말했다.
“생각보다 빨리 자라는군. 시간의 흐름이 위쪽과는 달라서 다행이야. 빌어먹을 사과나무도 순식간에 자라 겠는걸.”
“……뭐?”
피식 웃는 하데스의 표정에 아틀라스가 불안한 얼굴을 했다.
전부 멀찍이 대피한 아이들을 확인 한 하데스가 가볍게 한 번 턱짓했다.
그 순간, 굵은 나무의 밑동 왼쪽에 불이 붙었다. 강한 불은 순식간에 굵 직한 나무 기둥을 태우기 시작했다.
근처에 서 있던 시냐는 그제야 하데스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눈치챘다.
강한 불은 금세 굵은 기둥을 살라먹 었고, 오랜 시간 동안 그 자리를 지키 고 있던 나무는 퍽 처량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쾅!
큰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나무가 쓰 러졌다.
사과를 따기 위해선지, 자욱한 모래 먼지 사이로 재빠르게 달려 사라지는 시냐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뭐, 뭐야!”
아틀라스의 눈이 흔들렸다.
큰일이었다. 황금 사과를 무사히 심 게 두어선 안 되는데.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아틀라스가 정신을 집중하고 몸을 이동시키 려 할 때였다.
“아아아악!”
이제는 성인의 것처럼 자란 아틀라스의 단단한 두 다리 위로 불이 붙었다.
지독히도 뜨거운 불이 피부를 살라 먹기 시작하자 아틀라스는 아무 생각 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고통에 울부짖으며 땅 위를 뒹 굴뿐.
불은 몸부림칠수록 더 크게 일렁이 며 아틀라스의 두 다리를 삼켰다. 옮 겨 붙을 것이 뻔했기에 차마 손을 들 어 불을 끌 수도 없었다.
“아악! 악!”
무시무시한 화염이 살을 태우고 뼈를 녹이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새 반쪽만 남은 몸으로, 아틀라스는 한 줌 잿더미가 된 제 다리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이런 몸으로는 사과를 심는 시냐를 막을 수도, 열매를 먹을 아이들을 말 릴 수도 없었다.
부들부들 떨며 눈물 흘리는 아틀라스를 향해 하데스가 피식 웃어 보이 며 말했다.
“계속 짊어지고 있으니 무거운 줄 도 잘 모르겠군. 저 빌어먹을 놈의 나 무가 자랄 때까지 몇 년이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뭐, 기꺼이 너 대신이걸 받치고 서 있도록 하지.”
“…….”
“네 말마따나 저 애들을 깔려 죽게 할 순 없으니까.”
“이, 이…….”
“아이들을 무사히 올려 보내고 나면…….”
그러면 더 이상, 문두스를 짊어지고 있을 필요도 없겠지.
하데스가 비죽 웃고 말했다.
“……너만 뒈지는 거야.”
“으아아악!”
상체만 남은 흉측한 몰골로 아틀라스는 울부짖으며 몸부림 쳤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아틀라스의 눈에서 조금이나마 살아있던 의욕까 지 전부 꺼져버렸을 때에야 무사히 사과를 심은 듯한 시냐가 돌아왔다.
헐떡이며 달려온 시냐가 아틀라스의 모습을 보고 놀라 멈추었다.
바라던 대로 성인의 몸으로 자라났 지만, 애석하게도 두 다리는 온데간 데없었다.
“얼마나 걸릴 것 같더냐?”
끔찍한 아틀라스의 몰골을 앞에 두고도 태연하게 하데스가 묻자, 멍하 니 서 있던 시냐가 홈칫하며 대답했다.
“심자마자 제 키만큼 자랐어요. 해 가 막 지고 나면 사과가 열릴 거예요.”
“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해 지 면 뒈지겠네.”
“혀, 형…….”
“왜. 그 꼴을 하고도 살고 싶나? 하 긴, 그 정도로 의지가 강한 놈이니 평 생 이걸 떠받치고 있었겠지만.”
조롱하는 하데스의 말에도 아틀라스는 대꾸가 없었다.
그는 다리 대신 두 팔로 엉금엉금 기어 하데스의 앞으로 왔다.
“내게 또 부탁할 거라도 있나? 설마 다시 이걸 받치고 있겠다고 할 건 아니지?”
사악하게 웃는 하데스를 올려다보 며 아틀라스가 떨리는 입술을 꽉 다 물었다.
다시 평생 문두스를 떠받치고 있든 가, 해가 지고 나면 소멸하든가, 선택 지는 둘 중 하나뿐이 었다.
사실은 다시 문두스를 들고 있으려해도…… 하데스가 허락하지 않는다 면 가능하지 않을 터다.
두 팔을 짚고 뭉개진 다리로 선 아틀라스가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
“제, 제발…….”
“살려는 의지. 그거 하난 마음에 드 네.”
하데스가 무심히 중얼거 렸다.
아틀라스가 허공을 향해 천천히 두 팔을 뻗자, 하데스가 허리를 기울여 문두스를 넘겼다.
쿵, 소리와 함께 묵직한 공간이 훌 쩍 아래로 내 려앉았다.
받치고 있을 때에는 그렇게 무거웠 던 문두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만져 지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아, 죽겠네.”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던 검을 주운 하데스가, 뻐근한 몸을 풀며 기지개를 켰다.
어느새 시냐의 뒤로 많은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몇몇은 두려운 눈으로, 몇몇은 들뜬 눈으로 하데스와 아틀라스를 힐끔거 렸다.
“사과를 먹고 나면, 자랄 수 있는 게 맞지?”
하데스가 묻자, 시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행이군. 한데 나는 바빠 서, 해가 질 때까지 같이 있어줄 여유 가 없다. 먼저 가 봐야 해.”
“네, 네…….”
시냐가 뺨을 붉히며 울먹였고, 망설 이 던 아이들이 저마다 하데스에게 고 맙다며 수줍게 인사했다.
아이들 몇몇의 밤톨 같은 머리를 대 충 쓰다듬어주던 하데스가 검을 허리 춤에 맨 뒤, 문두스로 열 려 있는 포털을 향해 걸었다.
몇 걸음 걷던 그가 멈추어 서고 말 했다.
“예쁘게 자라라.”
문득,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 고 있던 시냐가 멈칫했다.
아마 자신을 향해 하는 말인 모양이 었다.
“예쁘게 자라서 꼭, 무사히, 다시 태어나라. 시냐.”
“아…….”
설마…….
알고 있었을까?
기억할 만한 시간도 함께 보내지 못했는데.
「아……. 귀엽다, 내 동생.」
「아테우스, 아기는 약해요. 손은 깨끗이 씻고 예뻐해야지.」
「예뻐요, 어머니. 우리 시냐.」
어렴풋이 기억에만 남아있던 영혼의 목소리는,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 었다.
“언제고 다시 네 오라비가 되어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