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아자르 녀석이면 한 방일 텐데.’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끝이 보이 지 않는 나무의 끝을 찾으려 애쓰던 하데스가 생각했다.
설마 아자르의 능력이 그리워질 거 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아.’
그 순간, 하데스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필요할 때가 있을 거라 여겨 록사에게 받아놓았던 물약들이 있었다.
물론, 제법 유용한 풍속성의 ‘순간 이동’ 물약은 가장 먼저 챙겨두었던 것이다.
하데스는 고민했다.
물약을 먹고 발현시키는 이능들은 제 것이 아니므로 제한 시간이 있었다.
가이오니아를 만나러 갈 때까지 어 떤 장애물이 있을지 조금도 예상할수 없는 마당에, 자신과는 전혀 관계없는 어린아이들을 위해 그 약을 사 용해야 하는지.
냉정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의 성격상 두 번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그는 답지 않게 약해졌다.
‘제누스의 무덤’이라니.
이런 곳이 있다는 걸 꿈에도 모를 아이샤가 불쌍했다.
딱히 죄도 없는 아이들이 평생을, 이 땡볕 아래서, 자신의 시체가 시들 지 않도록 가꾸며 살아간다는 걸 알면…….
‘죽인다.’
진짜 죽인다.
정신 나간 도마뱀.
“이봐. 위에 가서 사과인지 배인지 따다 주기만 하면 되는 건가?”
하데스가 묻자, 아틀라스가 놀란 눈을 했다.
“저 위에 어떻게 올라가시게요? 풍속성 능력자세요?”
“그건 아니지만, 잠깐 능력을 사용할 순 있어서 말이다.”
품 안에 손을 집어넣자 약병 몇 개 가 덜그럭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안을 들여다보던 하데스가 푸른색 물약을 하나 꺼내 뚜껑을 열었다.
“와아. 재주가 많으신분이군요.”
“내 재주는 아니지만. 아무튼, 그것만 따다 주면 되는 거지?”
“아뇨, 괜히 힘 빼지 마세요. 가 봤 자 못 따실 거예요.”
“뭐?”
“하하…….”
멋쩍게 웃던 아틀라스가 한숨지었다.
“어린아이만 딸수 있거든요.”
“이런 미친.”
하데스의 입에서 대번에 욕설이 튀 어나왔다. 근처에 모여 있던 아이들 이 흠칫했다.
“우린 괜찮아요. 걱정하지마시고 문두스로 가세요.”
방법이 없다. 풍속성 능력자는 자신뿐 아니라 다른 존재도 함께 순간이 동을 시킬 수 있지만, 잠깐 능력을 빌 려 쓰는 물약의 힘으로는 제 몸 하나 움직이는 게 전부일 터.
고민하던 하데스가 근처에 있던 아이들 중 가장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녀석에게 손짓했다.
“너, 이리 와 봐라.”
아이가 쭈뼛쭈뼛 다가오자 하데스 가 약병을 들이밀었다.
“너, 이거 마시고…….”
“안 돼요. 그 아이는 할 수 없어요. 죽을 거예요.”
아틀라스가 끼어들었다.
“또 왜! 뭐! 왜 죽어?!”
하데스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치자거북이처럼 목을 쭉 밀어 넣은 아틀라스가 조용히 중얼거 렸다.
“저 위에 앙귀스라는 뱀 마수가 있 거든요. 사과를 못 따게 지키고 있어요.”
“아니, 와…….”
하데스가 허망하게 허공을 바라보 았다.
이제야 아이들이 받고 있는 ‘진짜’ 벌을 알 것 같았다.
희망고문. 그거였다.
언젠가는 자랄 거라는 희망.
그러나 영원히 자랄 수 없고.
언젠가는 열매가 떨어질 거라는 희 망.
그러나 그럴 리 없고.
언젠가는 열매를 딸 수 있을 거라는 희망.
그러나 하늘까지 도달해도 끝내는 뱀 먹이가 될 운명이라니.
처음부터 하데스가 도와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던 거다.
허망하게 웃음을 터뜨리고 있던 하데스에게 아틀라스가 조용히 속삭였다.
“저, 염치없지만 혹시 도와줄 생각 이시라면…….”
뭔가 방법이 있나.
하데스가 날카로운 눈으로 아틀라스를 돌아보았다.
“앙귀스만 좀 잡아주시면 안 될까 요? 그럼 제가 올라가서 사과를 따올게요.”
“네가 어떻게? 약은 한 병뿐이야. 내가 쓰고 나면 없다.”
하데스가 곧바로 대답하자 아틀라스가 방긋 웃었다.
“저, 풍속성 능력자예요.”
“뭐?”
“이곳 아이들은 전부 마력을 개방하지 못한 상태로 여기 왔지만, 저는 아니거든요. 헤헤…….”
“왜 너만?”
“그래서 이러고 있는 거죠. 저 위에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니 까…….”
아.
하데스가 또 허탈하게 웃었다.
그마저도 희망고문인 거였다.
순간이동을 사용할 수 있는 풍속성능력자라면, 충분히 저 높은 나무 위에서 사과를 따올 수 있을 터.
허나 그러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하 나뿐이었다.
“제가 손을 놓으면 이 아이들은 모 두 죽어요. 문두스가 내려앉으면 전 부 깔리고 말거든요.”
일부러 하늘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아이를, 그러지 못하는 상황에 가두 어둔 것이다.
도마뱀. 진짜 죽인다.
어금니를 꽉 문 하데스가 아틀라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혼자…… 시도해볼 수도 있었을 텐데, 너.”
“에이……. 저 하나 살자고 이 아이 들을 다 죽이 라고요?”
씁쓸하게 웃는 아틀라스의 얼굴에 서 문득 아벨이 보였다.
길게 한숨 쉰 하데스가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지? 내가 그 마수를 잡고 나면…….”
“제가 무사히 사과를 따올 동안만, 저 대신 문두스를 받치고 계셔 주시 면 안 될까요? 이렇게 보여도 그렇게 많이 무겁지는 않아요. 아니, 많이 무겁나…….”
“그래. 그렇게 하지.”
“네?”
“뭘 그렇게 놀라?”
“거, 거절하셔도 돼요. 굉장히 무리 한부탁인데…….”
“됐다. 일단은 뱀 먼저 잡으면 되는 거냐.”
“네, 네…….”
“기다려.”
한 치의 고민도 없이 하데스가 물약을들이켰다.
풍속성의 마력이 몸 안에 휘돌았다. 하데스는 지체 없이 그 낯선 마력을 잡아 발현시켰다.
단숨에 고도가 높아졌고, 시야에 잎 이 무성히 자란 나무 꼭대기가 보였다.
굵은 가지와 싱싱하게 꿈틀거리는 잎사귀.
황폐한 땅과 달리 어린아이들이 평 생을 가꾼 나무는 생기 넘 쳤다.
단단한 나뭇가지 위에 정확히 착지 한 하데스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붉은색?’
평생을 길러왔다는 나무인지라 열 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을 줄 알았 는데…….
고작 하나, 그것도 아틀라스가 말했 던 ‘황금색’ 사과도 아니었다.
탐스러운 붉은 사과를 바라보며 인 상을 찌푸리던 하데스의 입에서 탄성 이 터졌다.
시야를 가리는 넓은 잎사귀들이 요 새처럼 지키고 있는 사이로, 과연 아틀라스가 말했던 황금색 사과 하나가 열려 있었다.
무심코 그곳을 향해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쉬이이이익!
다리 없는 파충류가 빠른 속도로 기 어오는 소름 끼치는 소리.
순식간에 하데스의 시야 정면으로 쩍 벌린 뱀의 아가리가 들어찼다.
누런 독물을 뚝뚝 흘리는 이빨을 드 러낸 채 하데스의 머리를 씹어 먹을 것처럼 돌진한 뱀 마수는…….
[끼야아아아악!]
……바로 하데스의 코앞에서 멈춘 채,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주변의 잎사귀와 가지 몇 개까지 함 께 불태우며, 뱀 마수는 한순간에 재 가 되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깜짝 놀랐잖아.”
전혀 놀라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중 얼거린 하데스가 다시 황금 사과를 향해 손을 뻗었다.
파직!
“아, 젠장…….”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아틀라스의 말대로 어린아이만 딸수 있는 모양인지, 하데스는 사과를 건드릴 수조차 없었다.
아쉽지만 뒷일은 아틀라스에게 맡 겨야 했다.
다시 순식간에 하데스가 땅으로 몸을 옮겨왔다. 아틀라스를 비롯한 모 두가 놀란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버, 벌써 다녀오셨어요?”
“그래. 뱀 한 마리 맞지?”
“네. 마, 맞긴 한데. 정말로?”
“그래. 속고만 살았나? 그런데, 붉 은 사과도 열 려있던데 말이다.”
“네. 우리들이 먹어야 하는 건 붉은 사과거든요.”
“한 개밖에 없는데?”
“그러니까 붉은 사과 말고 황금 사과를 따와야 해요. 황금 사과를 이 땅에 심으면, 아이들의 머릿수만큼 붉 은 사과가 열리니까.”
“아하, 그렇군.”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하데스가 한 손에 들고 있던 검을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곧바로 문두스를 대신 받쳐 들 것처럼 자세를 취하는 하데스를 향해 아틀라스가 망설이며 물었다.
“저, 정말로…… 대신 들어주시는 거예요?”
“몇 번을 묻냐?”
아틀라스의 뒤에 단단히 버티고 선 하데스가 양팔을 뻗어 문두스를 받쳐 들었다.
그가 제대로 문두스를 받쳐 들었음을 확인한 아틀라스가 천천히 손을 떼었다.
손을 뗀 순간, 문두스의 무게가 고 스란히 하데스에게로 옮겨왔다.
“음.”
하데스의 입이 꽉 다물렸다.
문두스의 무게는 딱, 드는 이가 감 당할 수 있는 최대한의 무게였다.
예상은 했지만 황당할 정도의 무게다. 하지만 힘든 티를 낼 순 없었다.
이걸, 고작 열 살짜리 소년인 아틀라스는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 짊 어지고 있었으니까.
“괜찮으세요?”
“어어…….”
“어, 얼른 다녀올게요. 그런데 능력을 엄청 오랜만에 써 보는 거라, 아저 씨처럼 빨리 다녀오지는 못할 것 같아요. 나무를 타고 여러 번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
“아저, 뭐? 너 내가 아저씨로 보이 냐?”
“네, 네?!”
아벨과 비슷한 나이이니 굳이 따지 자면 아저씨가 맞긴 한데…….
썩 듣기 좋은 호칭은 아니었다.
힘든 표정을 열심히 숨기며 하데스 가 말했다.
“형이라고 불러라. 말도 편하게 하 고. 너도 어차피 여기서 꽤 오래 살지 않았나?”
“아…….”
멍하니 서 있던 아틀라스가 방긋 웃 었다.
“응, 형! 정말 고마워! 금방 다녀올 게!”
“오랜만에 능력을 쓰는 거라며. 괜 히 빨리 가려다 미끄러지지 말고 신 중하게 천천히 다녀와.”
답지 않게 다정한 배려였다.
나무를 향해 다가가던 아틀라스가 하데스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정—말 고마워, 형. 형처럼 착한 사람이 와주다니 다행이야.”
천진하게 웃는 아틀라스의 얼굴은 꼭 아벨을 떠오르게 했다.
오랜만에 힘에 부치는 일을 하고 있 었지만, 하데스는 태연한 척 마주 웃 어주며 말했다.
“그래. 다녀와라.”
아틀라스가 떠나갔고, 하데스의 주 위로 아이들이 조잘거리며 모여들었다.
“우리 이제 어른 될 수 있는 거야?”
“우와, 드디어?”
“감사합니다.”
저마다 행복해하며 웃는 아이들의 얼굴이 보기 좋았다.
하데스는 무사히 돌아가면 이 대단 한 업적을 아이샤에게 꼭 자랑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마 그녀라면 눈물을 글썽이며 잘 했다고 먼저 입을 맞춰줄지도 모르 지.
그런 생각을 하니 이제 힘든지도 모 르겠다.
“이리 와 봐, 시냐! 엄청 센 어른이 우리를 도와줬다니까!”
그때 모여 있던 아이들이 갈라지며멀리서 누군가가 달려왔다.
양 갈래로 땋은 머리가 귀여운 여자 아이는, 왜인지 다급한 표정으로 다 른 아이의 손에 이끌려 하데스의 앞에 왔다.
다른 아이들보다 유독 더 자라 있는 아이였다.
시냐라고 불린 여자아이는 아틀라스 대신에 문두스를 받쳐 들고 있는 하데스를 보자마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안 돼…….”
왜인지 아이의 눈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하데스는 의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