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짐작도 못 하고 있던 나머지들은 일 그러지는 세세푸우의 표정으로 내가 또 답을 맞혔음을 눈치채곤 적잖이 놀랐다.
[바로 맞혔다. 낮과 밤의 순환에 관 한 문제이지.]
“야호!”
“이제 빨리 문이나 열어. 사람 농락하지 말고.”
[마지막 문제를 내겠다.]
“하…….”
부들부들 떠는 미하일을 무시하고 세세푸우는 또 한 번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이쯤 되니 다른 이들도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아자르와 아벨의 표정도 굳었다.
[마지막으로 너희들이 맞힐 것은, 인간의 이름이다.]
“네?”
대뜸 나온 마지막 문제에 나는 흠칫 했다.
인간의 이름?
프로크레아토르 선생님의 기출문제 에는 나온 적 없는 거다.
기출문제의 변형식이라니. 나 응용 문제에는 취약한 편이었는데…….
왠지 굳은 내 표정을 발견한 모두의 표정도 함께 굳었다.
이번에는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설마 수능 1등급의 신화가 여기서 무너지는 건 아니겠지. 오르쿠스도 못 밟아보고 잡아먹힐 수는 없는 데…….
[나는 오르쿠스를 지나간 인간들의 이름을 단 한 번도 기억한 적이 없다. 문제를 맞혔어도 묻지 않았기 때문이 지. 그러나 딱 한명, 이름을 물은 놈 이 있다. 뼈에 새겨놓기 위해서지.]
세세푸우의 얼굴이 갑자기 분노로 일그러졌다.
***
죽은 자들의 터전, 지옥 오르쿠스와 산 자들의 세계의 시간은 다르게 흐 른다.
그 인간이 찾아온 건, 이그니스의 일행들이 도착하기 일곱 밤 전의 일이었다.
「나를 간절히 마주하고 싶어 하는 아이가 오는구나. 내 믿음직스러운 수호자야, 문을 열어주도록 하여 라.」
오랜 시간 동안 들려오지 않았던 가이오니아의 전언.
기다리고 있던 인간의 등장이, 세세푸우는 처음에는 흥미로웠다. 물론직접 마주하고 나서는 흥미 대신 공 포로 벌벌 떨었다.
죽지도 않은 채로 오르쿠스에 밀고 들어오는 인간들은 대체로 손에 꼽을 정도로 강한 수준이었지만, 문지기 세세푸우의 힘 앞에서는 전부 무릎 끓기 일쑤였다.
하나…….
그 인간만은 달랐다. 세세푸우는 죽 기 일보 직전에 겨우 하나 남은 대가리를 땅에 붙이고 빌었다.
[나는 이곳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너의 뜻대로 오르쿠스의 문을 열어줄 터이니, 내 목숨을 거두지 말고 가거라.]
“재미없군. 가이오니아도 너처럼 허접한가? 그렇다면 내가 실패할 리 가 없는데…….”
피가 진득하게 묻은 칼을 허공으로 휘휘 휘두르며 말하는 인간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없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한낱 인간에게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하고 머리를 두 개나 잃은 꼴이라니.
“살려줄까, 말까. 재수 없는 문제를 낸 주둥아리가 영 마음에 안 들어서, 맨입으로 살려주기는 좀 곤란한데.”
[…….]
“아, 그러면. 너도 내가 내는 문제 하나 맞혀봐라.”
[크윽…….]
바닥에 붙인 세세푸우의 머리 앞에 발치를 들이밀고 검을 내리꽂은 채, 인간은 히죽 웃었다.
“잘 들어라. 이 망자들의 세계에도 길이길이 남을 위인이니까.”
[…….]
“사랑하는 여자를 구하기 위해서산 채로 지옥 불구덩이에 들어간 남자가 있다. 이름을 맞혀봐라.”
[뭐, 뭐?]
세세푸우는 오랜 기억을 꺼내 떠올 리느라 곤혹스러웠다.
제가 낸 문제를 맞히고 오르쿠스 안으로 들어간 인간들은 몇 있었지만,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많지는 않았다.
전부 그들만의 사정이 있었고 세세푸우는 예의상 따분한 그들의 사정을 하나하나 들어주곤 했다.
‘한데 그런 놈이 있었나?’
고민하는 세세푸우의 앞에서 인간은 위협적으로 검을 휘두르며 재촉했다.
“남은 대가리 금방 날아간다. 5초 주마. 5, 4, 3…….”
[자, 잠깐! 나는 태초부터 이곳에 존재해 왔다. 그 까마득한 시간을 어 찌 이렇게 단숨에 되짚어 보겠나. 조금만 더 시간을 줘. 아니, 괜찮다면 실마리라도 조금 더…….]
“좋다. 나는 고귀하고 강하고 자애 로운 인간이니까.”
가이오니아를 염두에 두고 물었던 ‘강하고 자애로운 존재가 누구냐’ 하는 질문을 조롱하는 것이었다.
세세푸우는 화가 났지만 꾹 참았다. 남은 머리 하나까지 날아가면 그 뒤는 죽음이었으므로, 아쉬워도 인간의 비위를 맞춰주는 수밖에 없었기에.
“대가리가 세 개 달린 문지기의 재 미없는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인간은, 그냥 놈의 머리를 잘라 혼내 주고 가이오니아를 만나는 데 성공했 지. 그리고…….”
인간은 검을 높이 들었다. 검의 끝 은 거대한 세세푸우의 몸, 정확히 심 장 쪽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 빌어먹을 도마뱀의심장을 꿰뚫고 씹어 먹었다. 그리고 비로소, 그 도마뱀이 꽁꽁 감춰두고 있던 사랑하는 여자의 자유를 쟁취했지.”
아…….
그제야 깨달은 세세푸우는 말을 잃 었다.
이런 겁 없는 인간이 있나.
인간은, 과거의 어떤 존재에 대해 묻고 있는 게 아니었다.
문지기 세세푸우의 머리를 자르고 오르쿠스에 들어가 끝내는 가이오니아를 만난 인간.
가이오니아의심장을 꿰뚫고 씹어 먹는 데에 성공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인간은 분명…….
‘정신이 나간 건가?’
자기 자신의 다음 행보를 얘기하고 있었다.
세세푸우는 분노로 몸을 떨 었다.
[가능할 거 라고 생각하는가.]
“그 인간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 지.”
[불경한 인간이……. 신을 모독하고 도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커 억!]
인간은 지체 없이 들고 있던 검으로 세세푸우의 하나 남은 목덜미를 꿰뚫 었다.
딱, 죽지 않을 정도의 깊이로 파고 든 검.
목덜미를 한 번 헤집고 검을 빼낸 인간은 무서운 표정으로 다시 한번 히죽 웃었다.
“쓸데없이 주둥아리 나불거리지 말 고 질문에 정답만 얘기해라. 그 용맹 한 사내의 이름은 뭐지? 맞히면 살려주마.”
[크……윽.]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수치스러 웠지만, 세세푸우는 이성을 다잡았다.
이곳 오르쿠스를 믿고 맡긴 가이오니아를 실망시킬 수 없었다. 세세푸우는 언제부턴가 오르쿠스에 숨어든 가이오니아를 지키기 위한 최전방의 방어선이었다.
답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세세푸우는 물었다.
[그래. 네…… 이름이, 무어냐. 신께 받은 ‘세세푸우 앙크’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다. 너의 이름을 뼈에 새겨기 억하도록 하마.]
“오, 그래. 나라는 걸 용케 맞혔군.”
[인간이여. 너를 위해 충고하자면 사랑이라는 알량한 감정은 결코 영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네가 죽음도 불 사하며 신에게 대적하게 만든 그 존재가 너를 영원히 사랑해줄 거라 생 각하느냐? 아니면 너의 마음은, 영원 할 거 라 생각하느냐?]
“…….”
[어리석구나. 내가 알던 신의 자식 들 중에도 그런 멍청한 자가 하나 있 었지. 결국은 변심한 연인의 마음에 영원히 괴로워하게 되었다. 너 또한 그렇게 후회하게 될 것이야.」
“글쎄, 나는.”
인간은 묘한 시선으로 허공을 더듬 으며 말했다.
“상관없어. 그 여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서.”
[…….]
“그리고 내 의지까지 네놈이 걱정해줄 필요는 없을 것 같군. 기억은 안 나지만 벌써 까마득한 시간을 사랑해 온 여자라…….”
인간은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한번 웃고 말했다.
“아직 변심하는 법은 깨치지 못해 서 말이다.”
[어리석은…….]
“나는 자애로우니 마지막으로 묻 지. 어때, 정답을 알려줄 테니 대답해 볼 텐가?”
[……말하라.]
결국 포기하고 오르쿠스의 문을 연 다음, 세세푸우는 말했다.
칼로 베어낸 듯 허공에 찢어진 공간 이 나타났고 그것은 당장이 라도 작은 인간의 몸을 삼킬 듯 꿀렁이는 어둠으로 일렁거렸다.
만족스러운 듯 웃은 인간은 주저 없 이 오르쿠스의 입구로 들어서며 말했다.
“하데스 루버몬트.”
[…….]
“네놈의 그 자랑스러운 아버지에게 서 심장을 뽑아 씹어 먹을 인간의 이 름이다.”
[……기억, 하겠다.]
그렇게 인간, 하데스 루버몬트는 세세푸우에게 수치스러운 목숨을 허락하고 오르쿠스로 입성했다.
정확히 일곱 빔, 전의 일이었다.
***
대체 무슨 회상을 그리 하는지, 세세푸우에게 달린 인간의 머리는 붉으 락푸르락해진 채 시시각각 다른 표정을 지었다.
매우 수치스러워하다가도, 울컥 분 노하고, 중간중간 욕지거리를 내뱉기 도 했다.
우리는 아주 지루했지만 인내심 있 게 기다렸다.
‘문제 언제 내…….’
예상치 못했던 응용문제가 나올 예정이라 바짝 긴장하고 있던 마음도 느슨해진 그때.
겨우 세세푸우의 입이 열렸다.
[그 인간은 문제를 맞히지도 않고 감히 내 목을 동강냈지. 그리고 억지로 내게 오르쿠스의 문을 열게 하였다.]
……응?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세세푸우를 올려다보고 있던 미하일의 고개가 내 쪽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가만히 맞춘 눈을 깜빡거렸다.
[오만하고 또 오만한 인간……. 그러나 그만큼 강한 인간은 내 만들어 진 이래로 보지 못했다.]
빠득, 세세푸우가 이를 가는 소리가 천지에 진동했다.
[자기가 강하다는 걸 잘 인지하고 있어서인지 아주 거만하고, 아버지를 모독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지.]
세세푸우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덧붙였다.
[그자는 아주 재수 없는 표정으로 자기 이름을 말하고 아버지께로 향했다. 그 빌어먹을 인간의 이름이 무 엇…….]
이건 진짜 의외였다.
마지막 문제가 제일 쉬울 줄은.
아직 세세푸우의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건만, 허공 위로 모두의 손이 번 쩍번쩍 올라왔다.
“정답, 정답!”
“정답! 저도 알겄지라!”
“저도요!”
얘네 뭐야, 하는 표정으로 미간을 좁힌 세세푸우가 홍분한 우리들을 휘 둘러보았다.
나는 서로 골든벨을 울리고 싶어 하는 동료들 사이에서, 반쯤 들었던 손을 천천히 접어 내렸다.
으음, 굳이 내가 맞힐 필요도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