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벌써 몇 년째 찾고 있지만 찾을 수 없었어. 대체 어디로 간 건지. 당장 그걸 구하지 못하면…….”
꽉 쥔 주먹을 부들거리며 중얼거리 던 미하일의 말을 자르고, 아벨이 소리쳤다.
“대, 대신관님. 그거 저한테 있어요.”
“……뭐라고요?”
미하일이 놀라 아벨을 돌아봤고, 아벨은 대답하지 않은 채 곧바로 하데스의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공자님!”
아벨을 붙잡으려는 미하일을 내가 말렸다.
“산트크리아의 보검을 가지러 간 거야.”
“뭐? 그게, 그게 왜 공자에게 있 지?”
“그……. 내가, 내가 구해놨었어.”
“뭐라고?”
미하일이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눈만 깜빡였다.
산트크리아의 보검.
소설〈페르소나〉에서 아벨이 그것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던 가.
떠올려보면 그 보검을 찾으려고 했 던 이유도 미하일 라이가르트 대신관의 부탁 때문이었다.
작중에서 미하일은 아벨에게 말했다.
신전과 데보라의 안위, 제국의 미래를 위해 산트크리아의 보검을 무조건 손에 넣어야 한다는 가이오니아의 계 시를 받았다고.
실은 계시 따위가 아니라, 가이오니아를 죽이려고 준비하고 있던 미하일 이 아벨에게 보검을 구하도록 했던 걸 테지만.
어찌 됐든, 다행이었다. 한시가 바 쁜 상황에서 우리는 신을 믿지 않는 자의 무기를 찾기 위해 시간을 낭비할 필요 없었다.
“대체 그걸 어떻게 알고…….”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네말이 맞는다면 전하는 가이오니아를 죽일 무기 하나 없이 오르쿠스로 간 거 아니야?”
“그래.”
“그럼 그걸, 얼른 가져다줘야 하는 데…….”
“일단 나는 데보라 사제를 데려올 게. 여기서 기다려.”
미하일이 두꺼운 책을 내게 넘기고 순식간에 집무실을 나섰다.
남겨진 채 가만히 책표지를 들여다보는 내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테우스.
프로크레아토르가 오직, 하데스를 위해 만들어둔 지옥의 입구였다.
***
산트크리아의 보검을 가져온 아벨 이 먼저 하데스의 집무실로 돌아왔 고, 다음은 미하일이었다.
잠들었던 아이를 깨워 왔는지 그의 품에는 졸린 눈을 한 데보라가 안겨 있었다.
그들이 오기 전, 어리둥절해하는 아자르와 록사에게 사정을 대강 설명했지만 둘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하데스를 구하러 가야 한다는 말에, 급히 채비를 하고 돌아왔던 아자르가 말했다.
“그러니까 결론만 말하자면, 부인 과 대신관이…….”
“형제셨다고라? 전혀 안 닮았는데 예?”
정리하려는데 록사가 불쑥 끼어들 자 아자르가 질색하며 그의 얼굴을 쭉 밀어냈다.
“등신이냐? 그 형제가 피붙이를 말하는 거겠냐? 머리가 이렇게 안 돌아 가는 놈이 지금까지 어떻게 밥 벌어먹고 살았지?”
“하이고, 니보다야 대굴빡 잘 돌아 간께 하등 걱정을 말어라.”
“저게…….”
발끈하던 아자르가 숨을 고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암속성의 능력이라는 것 자체가 그 용신이 내린 저주라는 말 입죠? 주군은 그 빌어먹을 저주를 푼 답시고 신을 찾아간 거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벨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좀 미안했다. 천천히 얘기하 려고 했던 사실을 한 번에 받아들이 기가 힘들 터였다.
믿고 있었을 텐데. 그런 내가, 암속성 능력자였다니.
“그런데 굳이…… 그런 위험을 감 수하면서까지 풀어야 하는 저주입니 까? 암속성 능력자가 배척당하기 때 문인가? 사실, 꺼림칙하기야 하지만 제법 강한 능력이기도 하잖아요.”
저주의 내용은 그저 암속성의 능력 이 전부라고 일축해 설명한 나였다.
당연했다. 매 생에서 선택권 없이 살인자가 되어야 하고, 이번에는 아벨을 죽일 운명이라는 말을 어찌 하 겠나.
미하일도 충격 받을 아벨을 위해 그 사실은 숨기는 게 좋다고 판단했는 지, 눈치껏 끼어들어줬다.
“꼭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일단은 전생을 기억한다든가, 필연적으로 일 어날 수밖에 없는 미래를 보기 싫어 도 보게 된다든가, 괴로운 삶을 살아 가야 하는 운명 이 니까요.”
“흠……. 뭔데 갑자기 공손해지셨어? 애가 있어서 말을 조심하는 건 가. 음흉하게시리.”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시고요, 데보라 사제.”
“네에…….”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난 데보라가 미하일의 품에서 내려왔다.
미하일이 그녀의 손에 책을 들려주 자 아자르가 막아섰다.
“잠깐, 잠깐. 그러니까 대신관 당신 말에 따르면 이 책이 지옥의 입구라 며? 당장 이 애에게 이걸 열게 하겠 다는 거야? 우리도 뭔가 대비를 해야지. 기다려보십쇼. 애들 좀 데려올 테 니까…….”
“안 돼요, 아자르.”
“예?”
“가는 건 우리뿐이에요. 지체할 생 각도 없으니 지금 당장이요.”
“뭔 말입니까? 주군이야 믿는 건 자 기 무력이 다인 분이니 그렇다 치고, 부인은 뭔 자신감으로요?”
아자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지 민,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본 미래에 ‘살아남은 채’ 가이오니아를 마주하고 있던 건 이곳에 남아있는 이들뿐이 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바로 답이 나왔다.
루버몬트의 정예군이라든가 기사들을 데리고 가면 든든하기는 할 테지.
하나 미래에서 그들의 모습은 보이 지 않았다.
만약 미래에서 봤던 얼굴들 이외의 사람들이 동행한다면?
‘모두 죽겠지. 가이오니아의 앞에 가기도 전에 다 죽어 없어지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거야.’
내가 본 그 ‘최후’까지 확실히 목숨이 보장되는 이들.
그들만 데리고 가야 했다.
“위험한 곳이에요. 그래서 내가, 마 지막 순간까지 목숨을 보장할 수 있는 사람은 여기 있는 이들이 전부예요. 내 말이 잘 이해가 안 되겠지만, 그냥 그렇게 알아주세요.”
아자르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듯했 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때 록사가 식은땀 흘리며 끼어들 었다.
“저, 저, 저, 부인……. 우리뿐이라 고 말씀하셔서 여쭙는 건데예, 거기에 지는 포함 아닌 것 맞지라? 지, 지는 돈을 좀 많이 받아가 전하의 부탁을 꼭 들어드려야 해서리…….”
다 같이 지옥으로 들어간다는 말이 퍽 무섭게 다가왔는지 록사가 벌벌 떨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록사 씨는 함께 갈 필요 없어요. 우리가 떠나고 나면 전하의 말대 로 해주세요. 부탁할게요.”
“어휴, 부인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심히 감사드리지라!”
“겁쟁이 새끼.”
“스읍!”
톡 쏘아붙이는 아자르에 록사가 발 끈했다.
“이걸 어떻게 해요? 그냥 책 읽듯이 읽으면 되는 거예요?”
데보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미하일이 다정하게 그녀와 눈높이를 맞 추어 앉으며 말했다.
“네, 데보라 사제. 해줄 수 있어요? 그냥…… 천천히 읽어보세요. 사제만 읽을 수 있는 책이거든요.”
데보라는 미하일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듯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이 고 책장을 펼쳤다.
긴장한 모두의 시선이 책을 펼친 데보라에게로 향했다.
펴자마자 백지밖에 보이지 않아 당 황했던 나와 달리, 첫 장을 펼친 데보라는 다음 장을 넘기지 않고 가만히 멈춰 서서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데보라의 마력에 감 응하는 듯하던 책장이 빠른 속도로 파라락 넘어가기 시작했고, 동시에 눈이 멀 정도로 붉은 빛이 뿜어져 나 오기 시작했다.
대비할 새도 없었다. ‘오르크스’로의 진입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 혀 달랐으므로.
쉴 새 없이 넘어가던 책장이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
책의 반경 5m가량 범위의 공간이 검은 아가리처럼 쩍 벌어졌다.
말 그대로 공간이 찢어진 느낌이었다. 나는 찰나의 순간에 빨아들이듯 몸이 당기는 느낌을 받았다.
검은 암흑뿐이었던 공간이 순식간에 반전되었고, 눈을 멀게 할 만큼 강 한 빛이 우리를 삼킨 순간.
시야가 암전되었다.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과정.
정신이 이공간으로 옮겨가는 그 느 낌.
그건 생소하면서도, 아주 불쾌했다.
“흡…….”
머리가 둘로 쪼개지는 듯한 고통이 이어졌다.
나는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그 와중에, 아벨과 데보라를 찾아 꽉 끌 어안았다.
아마 이 작은 아이들도 나와 똑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을지 모르기에…….
“헉!”
생경한 고통이 사라진 순간.
번쩍, 눈이 뜨였다.
“하아, 아…….”
“흡, 헉…….”
머리는 여전히 아팠지만 나는 억지로 눈을 떠 주변을 확인했다.
내 품에 안겨있던 아벨과 데보라가 엎드린 채로 힘겹게 숨을 고르는 게 보였다.
아벨보다는 데보라가 더 심각했다. 그녀는 왜인지 눈물을 줄줄 흘리며바닥 위로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나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그녀에게 로 다가가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데보라, 사제님…….”
“헉, 흐으……. 부, 불쌍해. 타, 탈리오도, 아테우스도. 제, 제발, 제발 사, 살려주세요.”
데보라는 내 기억 속 어딘가에서 익 숙한 이름들을 부르짖으며 오열했다.
그 순간 나는 직감했다.
아테우스, 그 책은 비단 지옥인 오르쿠스의 입구만은 아니었으리라.
누구도 엿볼 수 없었던 과거의 기억 들이, 데보라에게까지 읽힌 게 틀림없었다.
“미, 안.”
나는 고통스러워하는 데보라를 멍 하니 끌어안았다.
“미안, 해…….”
그녀는, 〈페르소나〉의 종막까지 빠 짐없이 등장했던 주연이었지만, 사실 우리의 비극과 전혀 관련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우리들의 굴레에 얽히고설켜 끝내는 고통받고 있었다.
그건, 하데스…… 그도 마찬가지였 고.
“헉, 흐…….”
“미안해. 미안. 내가 어떻게든, 어 떻게든 무사히 너를 돌려보내줄게. 약속해. 절대로, 더 아프게 하지 않을 게. 미안해. 미안해…….”
나는 데보라를 안은 채 오열했다.
옆에 있던 아벨이 겨우 몸을 추스르 고 나와 데보라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또 울컥 하고 말았다.
힘들고 괴로웠다. 아직 아무것도 시 작한 게 없는데.
아벨의 뒤로 광활히 펼쳐진 너른 지 평선이 눈에 들어왔다. 삭막한 모래 평야가 끝도 없이 펼쳐진 오르쿠스의 입구는, 미래에서 본 그곳과 꼭 닮아 있었다.
보았던 미래와는 달리 지금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아아아악! 이게 뭐지라?! 나는 왜 여기로 따라온 건데예!!!”
그때, 익숙한 말투가 넓은 공간을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육체와 분리된 영혼에 적응하 기 힘든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아자르와, 멍한 표정으로 선 미하일, 그리고…….
‘록사……?’